# 24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
싸움은 끝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깔 뻘건 고릴라 여섯 마리는 작살나 있었고, 나는 레벨 업을 하나 더 했다. 서지현은 내 손목에 파스를 뿌리고 압박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귀신 보는 것 같은 표정을 하던데요."
"..."
"협력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시선은 별로 좋지 않다는 거 알죠?'
"..."
다소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침묵에도 서지현의 목소리에는 한 가닥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곧 이어서 서지현이 황당한 말을 던져 사람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생리대 빌려드릴까요?"
뭐?
"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거야 갑자기."
"하시는 행동거지를 보니 그날 인것 같아서"
참나. 못하는 말이 없네.
덕분에 정신은 돌아왔다. 애매한 표정으로 서지현을 바라보려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 멋대로 날뛰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우리를 무서워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계획한 일을 실행하면 나는 안동으로 가고, 간호사 아가씨는 여기에 남아야 하잖아?"
상대가 다른 생각을 품지 않게 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김아은에게 선을 명확하게 그어놓으면서 다소의 불쾌감을 준 상황이다.
다른 생각을 품기 전에 '이 녀석들 건드리면 우리가 사지 멀쩡히 대지를 딛고 서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식의 의문을 품게 해주는건 썩 나쁜 일이 아니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하지만 그걸 노리고 대문 앞에 유인원 변사체를 걸어놓은 건 아니잖아요."
"기왕에 벌어진 일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는 거지."
일을 벌이기 전에 계획을 짤 수도 있지만, 벌여놓은 일에 맞춰 계획을 짤 수도 있는 거잖아. 물론 지금 하는 말이 변명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손목에 압박 붕대를 다 감은 서지현이 내 등짝을 한 번 탁 쳤다.
"알았어요, 벌어진 일에 대해서 꿍얼거려봤자 도움 될 건 하나도 없으니."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압박붕대가 감긴 손을 살짝 움직여보니, 금방 나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무 뿌리 뽑아서 휘두르는 괴물딱지의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맨손으로 막은 거 치고는 굉장히 가벼운 부상이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는 언제 나눠보는게 좋을거 같아?"
내가 안동에 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안동역을 되찾을 때까지는 동맹이고, 함께 진행해야 하는 일이니까 당연히 원래 이 한옥에 머무르고 있던 사람들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아은과 상의를 해보는 거겠지. 이 한옥에 모인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건 그녀로 여겨지니까.
"조금 더 구체화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는 하지만, 계획의 골자는 이미 짜올린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래. 내가 안에 들어가서 미리 뒷공작을 좀 해놓고, 서지현을 포함해서 이 한옥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철도선을 타고 안동역의 플랫폼 쪽으로 향한다.
"정해졌다면 말하는 건 빠를 수록 좋지 않을까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저쪽에서도 나름의 의견을 제시 할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바로 이야기를 나누자. 문을 열고 나오자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녀석이 하나 보였다. 그 놈에게 다가가자 대뜸 나를 보며 눈에 띄게 경계하기 시작한다.
"뭐야, 무슨 일이야."
"대놓고 그렇게 경계 할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저 반응은 살짝 상처 받는데. 물론 방금 전 과격하게 난동을 피우긴 했지만 어쨌든 니들이 도와달라는 말을 듣고 달려와서 고릴라 여섯 마리의 명줄을 따버린 사람이잖아.
"용건이...?"
"김아은을 만나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밤이 깊어지는 중이지만 길게 이야기를 나눌 건 아니다. 잠깐 고민하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방에서 쉬고 있을거다."
아하, 그래? 나는 녀석을 슥 보고는 말했다.
"오라고 좀 전해줘."
말을 마친 나는 다시 내가 머무는 곳으로 돌아갔다.
"김아은에게는 잠깐 이야기 나누고 싶으니 이리 오라고 했어."
굳이 우리가 갈 필요는 없잖아. 오늘 밤의 고릴라 도륙사태 덕분에 사람들은 우리를 무서워한다. 기왕 받게 된 두려움의 시선이라면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머리를 감은 모양인지 머리가 젖은 김아은이 수건을 어깨에 두른채 도착했다. 한 손에는 보따리가 하나 들려 있다.
"불렀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야?"
"안동역에 관련된 이야기."
이야기를 나누려는 와중에 서지현이 김아은에게 보온병 뚜껑을 건네주었다. 안에는 김이 오르는 녹차가 담겨 있었다.
"공격을 시작 할 떄 노릴 만한 곳을 생각해 봤어."
서지현이 곧장 지도를 펼처서 김아은에게 보여주었다.
"철도와 연결된 플랫폼을 통해서 안동역으로 진입할 거에요."
우리의 설명에 김아은이 애매한 표정을 지은 채로 잠깐 나와 서지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플랫폼이 약점이라는 걸 안동역에 머무는 생존자들이 모를리가 없어. 들키고 싶지 않다면 사람을 쪼개야 하는데, 지금 우리 숫자로는 그럴 여력이 없고."
정확히 나와 서지현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김아은이 다시 읊어준다. 그렇다면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해법도 공유해야겠지.
"오현석 씨는 몸 검사를 받고, 소지품을 압수당한 다음 안동역에 들어갈 생각이에요."
서지현의 말에 김아은이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 뚜껑을 옆에 내려놓고는 나를 바라봤다.
"안에 들어가겠다니."
이후의 이야기 전개는 아까 서지현과 나눈 이야기와 유사했다. 딱 하나, 내 짐을 서지현에게 넘길 생각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찬장 위에 놓인 꿀통을 발견하면 먹고 싶은게 사람 욕심이잖아. 굳이 내 소지품 중에서 유용한 물건들을 서지현에게 맡기고 떠난다는 말을 꺼낼 필요는 없다.
이야기를 다 들은 김아은이 아까와는 다르게 꽤 밝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오현석 씨가 안동역 내부에서 소란을 만들어 준다면 일의 진행이 더 쉬워지긴 할 거야. 우리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겠지?"
김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 보통은 아무리 안동역을 점령하고 싶다고 해도 자기가 나서서 몰래 들어가겠다고 말하지는 않잖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고 자청하는 쥐는 둘 중 하나다. 굉장히 용감하거나, 그렇게 해서라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할 정도로 절실하거나. 아마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댁은 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을 끌고 안동역 입구로 향해. 철도를 타고 플랫폼 쪽으로 오는 건 서지현을 포함한 소수면 충분 할 거야."
김아은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은채로 서지현을 흘긋 바라봤다.
"오현석, 네 실력은 오늘 일로 잘 알았어. 하지만..."
서지현의 실력이 영 못 미더운 모양이지? 하긴, 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어머, 저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하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서지현이 김아은을 마주 본다.
"우리가 함께 다니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야."
잠깐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던 김아은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세세한 계획은 내일 아침 중으로 생각해보자. 대비해야 할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잖아."
김아은의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당장, 오현석 씨는 소지품을 전부 녀석들에게 반납하고 안동 대학교를 통과할 테니 문제가 없지만... 뒤따라 안동역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안동 대학교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괴물들과 싸울 수 밖에 없어요."
대학교 앞을 지키는 녀석들으르 말하는게 아니다. 안동 대학교가 우리가 경험했던 거울의 벽과 비슷한 장애물이라면, 대학교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괴물들의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통과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지쳐버린 상태에서는 제대로 싸울 수 없을테고...
계획의 큰 방향은 잡혔지만 가는 길에 마주 칠 수 있는 여러 난관들을 처리할 방법은 아직 논의가 더 필요하다.
나와 서지현이 고민하는 있는 모습을 살피던 김아은이 챙겨왔던 보따리를 우리에게 내밀었다.
"내일 아침에 해당 문제를 포함해서 부딪 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 의논을 나누자. 오늘은 식사 하고 쉬어둬. 습격을 막아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긴 조금 그렇지만, 먹을 걸 가져왔어."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김아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아은이 돌아가고 나서 그녀가 가져온 보따리를 살펴보니 버너와 쌀, 냄비와 물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에 더해서 마늘쫑이나 고추, 깻잎으로 만든 장아찌 같은 것도 보인다. 인근 농가에서 털어온건가. 하나 살짝 꺼내서 먹어보니 파는게 아니라 어느 가정집에서 두고 두고 먹어치울 요량으로 만들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맛은 있는데, 밥 없이 먹기에는 많이 짜다.
여튼, 쌀밥에 장아찌라.
"생각해보니 자는 건 고사하고, 저녁도 안 먹었었네요. 냄비밥은 제가 지을 줄 알아요. 아, 고기도 있었으면 좋았을 걸."
간만에 밥상에 통조림 말고 다른게 올라오게 생기니 서지현이 꽤 신이 난 모양이다.
"아까 죽인 그 고릴라 고기라도 좀 썰어올테니, 구워먹을래?"
"어머, 고기보다는 뇌가 맛있다고 하던데. 고기 말고 차라리 골을 하나 파내 오시죠."
그런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가며 식사는 순식간에 준비되었다.
"진짜 할 줄 알았네."
서지현이 만들어낸 냄비밥의 성과는 훌륭했다. 삼층밥 뭐 이런게 아니라 제대로 된 밥이 냄비 안에서 튀어나왔다.
지을 줄 안다는 당당한 선언에 걸맞은 결과. 밥을 퍼내면서 서지현이 하하, 하고 찬바람나게 웃었다.
"밥솥 살 돈이 아까울 정도로 감동적인 나날을 보냈다고만 해두죠."
잠깐, 밥솥 살 돈이 아깝다니.
"싼 밥솥은 5만원 정도면 살 수 있지 않아?"
마늘쫑 장아찌를 젓가락으로 집어올리며, 서지현이 픽 웃었다.
"에이, 새로 사는게 아니라면 그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할 수도 있는 걸요. 그 돈도 아까워서 문제였지."
무슨 대답을 돌려줘야 할 지 살짝 당황스럽다. 서지현은 별로 대단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아니라는 듯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깻잎 장아찌에 아직 김이 오르는 흰 밥을 싸서 입에 넣자, 곧바로 짭쪼름한 간장 뒤에 숨어있던 감칠맛과 깻잎의 향이 입 안에 싹 퍼진다.
"맛있다."
서지현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냄비에 지은 밥이 싹 사라지는데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인스턴트와 통조림으로 점철된 5일간의 강행군 뒤에 맞이한 갓 지은 쌀밥에 장아찌는 눈 앞에서 밥을 삭제하는 마력이 있었다.
"아, 숭늉 드실래요?"
식사를 마치고 나서 냄비를 열자 어느 틈인가 물을 넣어서 끓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준다면야 안 먹을 이유가 없지.
숭늉을 홀짝이면서 별 다른 대화 없이 몇 분 정도가 지났다. 다시 말문을 연 것은 이번에도 서지현이다.
"별 한 번 많네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서지현의 말대로 밤하늘에 별이 엄청나게 많이 떠 있다. 전기가 나간 대한민국에는 더 이상 한 밤 중에 만들어지는 인공광이 없으니까. 아래가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별들도 마구 모습을 드러낸 거다. 다소 메마른 생각일 수는 있지만... 나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랫 동네가 엉망진창이 나니 윗 동네는 더 신나보이네."
"꼭 비웃는 것처럼 말이죠. 어쨌든, 밥은 제가 했으니까 설거지는 맡겨둘게요."
숭늉을 마저 비우고, 서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도 방 안에 들어가서 물티슈로 대충 몸을 닦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