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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2화 (22/237)

# 22

들어가는 건 자유지만

내 질문에 곧바로 남자 중 한 녀석이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한다.

"알려줄 이유가 있나?"

그거야 그렇지. 안 알려 줄 것 같다고 해도 한 번 물어 볼 수는 있는 거잖아. 그들은 우리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확실한건, 안전지대는 그 이름값을 한다. 안에 있으면 어떤 위협도 없어."

"사람만 빼고 말이죠."

손을 검 쪽으로 가져가며 던진 서지현의 말에 남자가 키들거리며 뒤편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중년 하나가 큼지막한 장작더미 옆에 서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도 말아. 소지품 반납하기 싫다고 우리랑 쌈박질 하려 들면 저 형님이 장작에 불을 붙일거야. 그러면 안동역에 신호가 가는 거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소지품 검사를 피하기 위해서 저 녀석들과 싸운다는 건 방금 전에 떠오른 그 문자에 예, 라는 대답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려면 안동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안동역에 사람이 얼마나 모여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머릿수가 적지는 않을거다. 당연히 그들은 우리가 안동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을테고... 아마 안동역에 들어가는 건 실패하게 될 거다.

즉, 여기에서 쌈박질을 벌이면 안동에 설정된 안전지대 밖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한다는 그 붉은 포식인지 뭔지 하는 현상을 견뎌야 한다.

그 현상 속에서 버티는 데에 성공한다고 해도 우리는 지치겠지. 이후에 안동역에서 튀어나온 생존자들이 공격한다면 대항할 수 없겠지.

뭐, 레벨도 높여 놓았고 스킬도 많이 배웠으니 몇 번은 이겨낼 수 있겠지만.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결과적으로 엿을 먹는 건 우리다. 세상 망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이 새끼들, 뭐가 이렇게 체계적이야.

"아가씨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그 빵빵한 젖탱이 반 만큼만이라도 마음을 넉넉하게 먹어봐. 며칠 굶겨 놓으면 다들 영양바 한 개에 몸을 파는 고분고분한 매춘부로 변신하니까."

코 앞에서 젖탱이라는 단어로 얻어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서지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을 던진 녀석에게 질문을 한다.

"소지품을 모두 압수한다면, 안동 대학교는 어떻게 통과하죠?"

"우리가 책임지고 통과시켜 주지. 이미 몇 번 통과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훤하게 알아."

소지품을 모두 압수하고, 안동대학교의 통과는 저 녀석들이 대신 책임지는 건가. 서지현은 잠깐 그들을 보다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속삭였다.

"일단은 뒤로 빠지죠."

나와 서지현은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뒤편에서는 별 말이 없다. 어차피 우리가 저 안으로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 녀석들도 밖으로 나올 수는 없으니까.

"랜드 클리어라."

서지현이 내 중얼거림에 반응한다.

"안동이 목적지가 아니라고 하셨죠? 신경쓰이겠네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런 제한이 없어도 안동에서 서울까지 가는 건 한 세월이 걸리는 긴 예정이 될 게 뻔한데 거기에 더해서 이런 제한까지 있다니. 심지어 그 상황에 한 술 더 떠서 이미 안전지대에 머무르고 있는 생존자들도 예상했던 것처럼 배타적인 성향을 고수하는 중이다.

"저도 지금 바로 안동으로 넘어가는 건 썩 내키지 않아요. 그렇게 고생을 해서 얻은 장비들과 물자인데. 그걸 전부 바치라니."

소지품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우리는 그렇지도 않다. 당장 바쳐야 하는 장비 중에는 내가 오늘 포인트 꼴아 박아서 산 바람개비부터 시작해서 손거울, 거울 가락지, 수호의 고리가 포함되어있다. 어디 그뿐이냐. 보건소에서 털어낸 약품이나 다른 곳에서 구한 물자. 거기에 더해서 꼬박꼬박 구매해서 쌓아놓은 영양바까지.

"그런 나사 빠진 조건을 감수하면서까지 안동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어."

대화를 나누면서 돌아가던 중에 도로 옆의 야산 쪽에서 뭐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나와 서지현은 무기를 손에 쥐었다.

"사람이야. 진정해."

수풀에서 튀어나온 여자가 양 손을 살짝 들어올린채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에는 사람이 다섯 정도 서 있다.

"미안하지만, 방금 전에 날강도 같은 요구를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마친 참이라."

사람이라고 자신을 밝혀도 썩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렇겠지, 안동 대학교 입구에서 녀석들을 만났잖아?"

"미행이라, 더 수상해지는데."

무슨 의도를 가지고 우리가 그 대학교 정문에 자리잡고 있는 문지기 비슷한 녀석들과 대화하는 걸 지켜본 거지. 보브컷의 여자는 머리에 달라붙은 풀쪼가리를 털어내면서 말했다.

"그 조건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들만 있는게 아니야."

이 아가씨도 그 중 하나인 모양이지. 보브컷을 포함해서, 그 뒤에 서 있는 녀석들의 숫자를 헤아려본 나는 다소 실망감이 들었다.

"여섯 명이라. 그렇게 많지는 않은 모양이군."

"아니, 우리가 전부는 아니야. 더 숫자가 많지. 우리랑 비슷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중이거든. 이 길을 지키고 있다가, 누군가가 안동 대학교 쪽으로 향하면 접촉하는 거야."

그리고 그 문지기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되돌아가기 시작하면 모습을 드러내 대화를 나눠 보는 건가.

"근거지는 따로 있다는 뜻이군요."

서지현의 물음에 보브컷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야.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어때?"

나와 서지현의 시선이 서로 마주친다.

"어떻게 생각해?"

서지현이 한 손 검지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들어보죠.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인데, 크게 어긋날 것이 없다면 함께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서지현의 의견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돌려 보브컷을 바라봤다.

"이야기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안내 좀 해줘."

"기꺼이. 따라와."

보브컷은 말을 마치고 나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한옥?"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옥이었다. 그것도 작은 한옥이 아니라 꽤 커다란 크기로 지어진 한옥.

"안동제산종택. 조선 후기 학자 중 하나인 김성탁이 18세기 초 머무르며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지."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역사에 관심이 많나봐?"

"문화재청에 근무하려면 그럴 수 밖에."

뭐야, 공무원 아가씨였군 그래. 한옥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우리를 슥 훑고는 보브컷 여자를 확인하고는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자."

우리는 한옥 안으로 들어가서 툇마루에 걸터 앉았다.

"자기 소개부터. 나는 김아은이야."

"서지현이에요."

"오현석."

내 이름을 들은 김아은이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잠깐 본 다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름 때문에 고생이 좀 있었겠네. 그 뭐냐, 옛날에 엄청 유명했던 연쇄 살인범 이름이잖아."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서지현이 웃으며 선수를 쳤다.

"맞아요. 저도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 이름을 듣고는 크게 오해를 할 뻔했다니까요."

지금은 죄수복 복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그냥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서지현이 먼저 선수를 친 건 다행이다. 내가 그 연쇄살인마 본인이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초면에 사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잖아.

물론 일을 저지르고 잡혀갔을 때 이미 얼굴이 대한민국에 쫙 뿌려지긴 했지만. 그게 벌써 8년 전이다. 보통 사람들이 아직도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기는 힘들지.

게다가 10년이면 강산이 바뀌고, 8년 간의 교도소 생활은 사람 얼굴을 변하게 한다. 지금의 내 얼굴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연쇄 살인범 오현석과는 다소 다르다. 죄수복이라는 복장을 벗은 상황에서 오현석이라는 이름만 듣고 곧바로 내가 그 연쇄살인범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겠지.

"이 한옥에는 몇 명이나 머무르고 있는거지?"

"13명. 두 사람이 합류한다면 15명으로 깔끔하게 숫자가 맞아 떨어지겠네."

저런, 적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많다고 할 수도 없다. 뭔가 애매한 숫자인데.

'안동시에 있는 사람들 중에 극소수만 살아남아서 안동역에 도착했다고 해도 100단위는 훌쩍 넘을텐데요."

서지현의 말에 김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하지만, 생각해봐. 두 사람이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고 뒷걸음질 친 이유가 뭐야?"

김아은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 한 것 같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잃을 게 제법 있는 사람들이라는 건가?"

포인트로 장비를 구매하거나, 미션 클리어를 통해 보상으로 뭔가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거다.

"그래,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레벨 5-7 사이를 유지하는데다가 각자 스킬이나 장비 같은 것도 최소 하나씩은 갖추고 있어. 단순히 머릿수로만 따지면 부족한 숫자지만..."

모인 개개인의 질로만 따지면 안동역에 머무르는 사람들 대다수보다 뛰어나다. 5-7이라. 나는 내 레벨을 떠올려 보고는 약간 안심했다. 단순히 레벨로 전부 평가 할 수는 없지만 나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나가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그래도 머릿수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있던데요."

서지현의 반론에 김아은이 대답했다.

"대학교 입구를 봐서 알겠지만. 이 사태가 벌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녀석들은 상당히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어.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안동역은 지금 누군가의 통제에 따르고 있다는 뜻이야. 통제와 복종이 있는 사회에서 계급 분화는 필연적이지."

김아은은 꽤 있어보이는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안동역을 통제하는 머리를 날리는데 성공하면 된다는 뜻이군."

김아은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동역을 통제하고 있는 녀석들이 누구건, 녀석들을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 된다.

"너희들도 안동으로 갈 생각이잖아?"

김아은은 우리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있으면, 서로 믿을 수 있지."

"공유하는 동안에는."

그 뒤에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김아은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내 말에 김아은이 으응, 하는 애매한 소리를 냈다.

"그래, 목적을 공유하는 동안에는."

서지현이 나와 김아은을 한 번 번갈아 본 다음에 말했다.

"우리는 안동역에 머무를 생각이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서지현을 바라봤다. 서지현은 나와 눈을 가만히 마주치고 있었다. 이내 나는 한숨을 섞어서 대답했다.

"그래, 우리에게 있어서 안동역은 단순한 경유지야."

내 말에 김아은이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안동역에 한 번 들어가면 랜드 클리어라는 미션을 끝내기 전까지는..."

"안동을 벗어 날 수 없지."

떠오른 메시지는 확인해보았다. 내 표정을 보고 있던 김아은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우리의 목적은 안동역을 차지하는거야. 랜드 클리어라는 미션의 클리어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거기까지는 함께 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서지현이 다리 위에 손을 포개놓은채 김아은의 발언을 듣고는 말했다.

"이해해요. 어차피 우리가 목표로 하고 있는 일도 우선 안동역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최종 목적이 달라도 경유지가 같으면 문제 될거 없잖아요?"

"그래, 거기까지만 함께 하면 될 테니."

김아은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아가씨를 포함해서, 이 한옥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아. 안동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하고 나서 어떤 일을 벌일지도 안 궁금하고."

이 한옥에 머무르고 있는 녀석들이 안동역을 차지하려고 하는 이유는 대단한게 아니다. 안동은 도시고, 도시 안을 굴러다니는 물자는 아직도 많을거다. 다른 녀석들이 거기에서 잘 먹고 잘 사는게 부러우니 우리가 빼앗아서 그걸 누리겠다는 속셈이겠지.

그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살이가 원래 다 그런거잖아. 게다가 나 같은 자식이 다른 사람들의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드는 것도 개그가 따로 없는 수준이다.

"안동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하고 나면 나는..."

말하던 와중 고개를 돌려보니 서지현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안동역에 머무르며 랜드 클리어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할 거다. 안동역을 점령하고 나서는 부려먹으려고 들거나, 뭔가를 부탁할 생각은 하지 마."

그 이후의 일은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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