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휴식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거, 이전에도 나눴던 이야기 같은데."
"그래, 혹시 까먹었나 싶어서. 게다가 그떈 제대로 된 대답도 아니었잖아? 아직도 생각 중이신가?"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중요한 건 가능성이에요. 세상이 한 번 뒤집어진게 오늘로 나흘째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현은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오현석 씨와 만난 건 사흘이 지났네요. 첫 날에는 보건지소에서 눈깔이 없는 늑대를 죽였죠. 다음 날에는 온 천지에 거울 뿐인 이상한 공간을 통과하는데 성공했어요. 그리고 오늘, 소방차에 휘발유 잔뜩 채우고 악어들이 입 벌리고 쉬고 있는 곳에 불을 질렀죠."
서지현은 말을 마치고 나서 잠깐 땅바닥을 바라봤다.
"반면, 여기에 남은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봐요. 우리가 3일 동안 그런 일을 벌이는 동안 저 사람들은 뭘 했죠?"
"공동체를 만들었잖아."
그건 꽤 가치가 있는 일 같은데. 내 말에 서지현이 손을 휘휘 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그건 저 사람들이 한 일이 아니라 최태훈 씨가 한 일이죠."
그렇게 보면 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우리가 해낸 일들, 저 사람들이 해낸 일들..."
서지현은 말을 마치고 나서 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72시간이에요. 꼴랑 72시간이 지났는데 우리와 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그 정도의 차이가 생겼지요."
말을 마친 서지현이 슬쩍 나를 본 다음에 말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을 때는 얼마나 큰 차이가 벌어질까. 요 3일간을 생각해보면 전 알 것 같네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어차피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기술을 익힌 입장에서 굳이 그런 걸 생각할 이유는 없잖아."
서지현은 다른 사람들과 차이를 벌려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나도 거기에 동의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쳐도 서지현이 그럴 이유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없다. 굳이 자신이 타인과의 차이를 벌릴 필요 없이, 전문 지식이라는 물건을 가지고 공동체의 보호를 받으면 될 일이다.
서지현이 내 말에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휴게소로 팔이 묶인채 끌려온 사람들을 보고 확실히 느꼈죠. 아, 힘이 깡패구나."
서지현은 말을 하고 나서 도로를 신발로 한 번 쿡 찍었다.
"농작물을 키워본 경험이 있어서 농사를 지을 수 있어도, 여태동안 배운 지식 덕분에 사람을 치료 할 수 있어도, 다양한 기계를 다룰 줄 알아도... 그런 건 중요한게 아니에요. 그래봤자 힘이 센 사람이 나타났을 때, 저항할 힘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전부 바쳐야 하니까."
서지현이 잠깐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 사람들을 풀어주지 않고, 노예로 부려먹겠다고 결정했다면 못 부렸을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안 한거지."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안 한거죠. 무섭지 않아요? 우리 기분에 따라서 그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무력했죠. 아무것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서지현은 말을 마치고 살짝 몸을 떨었다.
"저는 그런 상황에 처하기 싫어요. 거기에 덤으로."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어깨를 으쓱했다.
"믿을 만 하니까."
나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믿을 만 하다니?"
"3일이 지났는데도 아직 저는 묶이지도 않았고, 몹쓸 꼴을 당하지도 않았잖아요? 이 이상 믿을 수 있는 사람도 드물걸요."
"믿을 수 있는 연쇄 살인범이라. 이성애자 게이 같은 느낌인데."
양립 할 수 없는 두 단어가 서로 나란히 사용되고 있다. 내 말에 서지현이 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게요."
우리는 걸음은 교회 맞은 편 지하실 쪽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 누가 먼저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임동면을 벗어나는 중이다.
사실, 그 사람들 눈을 보면 오늘 지하실에서 머물렀다가는 뭔 사단이 날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서지현이 남더라도 나는 오늘 중으로 여기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짐은 애초에 새벽부터 전부 챙겨서 돌아다니는 중이었기에 지하실에 들렀다가 갈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여행하는게 아니니까. 숙소에 짐 두고 나가는 짓거리를 할 수는 없다. 돌아와서 짐이 죄다 털려 있으면 그건 훔쳐간 사람만큼이나 짐을 두고 간 사람이 나쁜거다.
임동면을 벗어나서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작은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가 나왔다. 그리고 그 너머에 서 있는 모텔 한 채.
"오늘은 저기에서 쉬면 될 것 같은데."
"그러네요. 마침 물가도 근처에 있으니까. 퍼오죠."
물을 퍼가자니.
"어차피 식수로 쓰기는 힘들잖아."
마셨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씻을 수는 있잖아요. 위생이 얼마나 중요한데."
"글쎄다... 모텔 안에 물을 담을 만한 물건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서지현은 강가를 바라보는 내 팔뚝을 자기 팔꿈치로 쿡 치며 말했다.
"레벨업 이후 능력치 많이 찍어서, 목욕물 정도는 뜨시게 덥혀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좋아, 없으면 모텔의 욕조를 뜯어내서라도 강물을 퍼오지."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건 교도소 시절부터 꿈에 그리던 사치 중 하나였다.
"바로 그런 정신이에요."
서지현과 나는 곧바로 모텔 쪽으로 향했다. 전기가 나간 모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어설프게나마 쌓아놓은 바리케이트 정도는 눈에 들어왔어야 하니까. 그래도 예의 상 손거울로 내부를 싹 훑어본 다음에 나는 확실히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모텔을 싹 뒤져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20L가 들어가는, 소위 말통이라고 불리는 물통을 몇 개 찾아냈다.
"이걸로 몇 번 퍼다 나르면 충분히 욕조 하나는 채울 걸."
내 말에 서지현이 좋아요. 라고 말한 다음에 말통 두 개를 손에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말통 몇 개를 챙겨서 다시 모텔 밖으로 나온 다음, 개울에서 물을 퍼올렸다. 내가 든 말 통이 네 개다.
80L, 다른 말로는 80kg. 하지만 들어올리는게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짊어진 느낌 상으로는 20kg 정도로 싼 군장을 짊어진 느낌. 능력치가 확 뛰어오른 만큼, 변한 신체의 차이가 더 명확하게 느껴진다.
"데워서 샤워하고 난 다음에는, 옷도 좀 빨죠. 욕조에 담긴 물에 몸을 담그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니까."
물은 아껴 써야지. 서지현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나를 슬쩍 바라봤다.
"먼저 씻어도 괜찮을까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누구 덕분에 뜨신 물로 목욕하는데. 먼저 써."
내 말에 서지현이 슬쩍 인사를 한 다음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 장갑으로 훔쳐보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죠?"
나는 서지현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간호사 아가씨. 내가 정말 보고 싶으면 그냥 여기에서 벗겨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대놓고 보는 것 보다 훔쳐보는 걸 더 즐기는 사람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랄이 났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씻기나 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욕조가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서지현이 씻는 사이에, 나는 모텔 건물 안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모텔의 냉장고가 크지는 않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언제나 음료 몇 캔과 작은 생수 두 통 정도는 들어 있었다.
그 말은 이 모텔 안을 뒤져보면 이것저것 주워 갈 만한 것들이 꽤 있다는 거다. 노느니 염불한다고, 서지현 씻는 동안 식수나 좀 구해봐야지.
거기에 더해서 컵라면 같은 것도 방 안에 두는 경우가 있으니까. 재수가 좋고, 서지현이 조금만 더 고생을 해준다면 식사까지도 처리 할 수 있을거다.
"말통도..."
락스로 안을 깨끗하게 소독한 다음 물을 보관한다면 짐에 추가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다. 네 통을 들었는데도 크게 무게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았으니까. 모텔 안에서 생수를 발견한다면 까서 말통 안에 집어 넣으면 되겠지.
"과장 조금 보태면 인간 당나귀구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모텔을 뒤지고 다니다가, 방에 채우는 용도로 쓰는 생수와 기타 비품들을 발견했다. 생수와 캔 커피 같은 음료, 거기에 더해서 컵라면 따위였다.
"좋아."
주변에 도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 머리 속에 먹거리와 마실 거리가 있는 곳이라고 하면 편의점이나 가게, 마트 같은 곳 부터 뒤지다보니 여기까지는 아직 손을 뻗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생각하고 있던 물자들을 확보한 나는 곧바로 그것들을 챙겨서 나르기 시작했다.
"히히힉."
컵라면이나 생수병 같은 것을 나른 다음에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화장실에서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지현의 바보같은 웃음이 들린다. 얼씨구, 좋단다.
그리고 얼마 뒤에 문이 열리고 서지현이 젖은 머리를 하고 나왔다. 목에 걸어놓은 수건으로 옆머리를 비비던 그녀는 방 안에 놓인 생수병 따위를 보고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 같은 소리 하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물, 아직 따뜻하지?"
내 말에 서지현이 엄지를 올리며 말했다.
"당연하죠. 컵라면에 넣을 물 끓여 놓을까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제 교대 시간이다. 나는 화장실 안에 들어가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뜨신 물이 몸 위로 한 바가지 쏟아지자 온 몽에 열기가 확 퍼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다.
"아이고."
뜨신 물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건 좋은데. 아래를 보니 땟국물이 장난이 아니다.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어차피 씻는데 필요한 도구는 화장실 안에 다 있다. 모텔 방 안에 샴푸랑 바디 워시 같은 게 없는 경우는 없으니까.
간만에 깔끔하게 몸을 씻고 나서,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중얼거렸다.
"망할, 어쨌든 비누잖아."
따로 세탁 비누까지 챙겨 올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모텔에 있는 비누를 이용해서 옷을 빨았다.
"..."
비누 거품과 물이 섞여서 연해진 핏물과 떗국물이 옷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과 발로 꾹꾹 밟아서 마저 빨기 시작했다. 옷에서 핏물을 뺴기는 참 쉽지만, 사람에게서 핏물을 빼는 건 불가능하다. 옷과 속옷을 주무르는 손이 다소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씨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가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은 인생을 속죄하면서 살아라.
그런다고 변하는 건 없다.
피해자가 용서해도 소용 없다. 가해자가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도 의미 없다. 스님이나 신부, 목사를 찾아간다고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저지른 일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강간 피해자가 강간범을 용서한다고 해도 강간을 했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아있다. 신에게 용서를 구해도 여전히 내가 강간을 했다는 사실은 남아있다. 내가 스스로 이쯤 하면 속죄가 되었겠지 하는 생각을 해도 강간을 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살인도 마찬가지다. 내 죄에 대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 스스로 내 머리통을 날려버린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거다. 내가 사람을 여럿 죽였다고 하는 그 사실은 내가 죽어도 변하지 않을거다.
이미 저지른 일이니까.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비누로 빤 옷과 속옷을 헹구고, 물기를 짜낸 나는 여벌 옷으로 갈아입고 깨끗하게 빤 옷을 챙겨서 화장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