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불지르는 소방차
"펌프차는 차고에 있겠지?"
내 말에 최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거미줄에 안 걸리도록 거기까지 동행해주지. 거기에서 숨 죽이고 기다리고 있어."
건물 근처까지 다가갔는데도 내부에서 별 다른 반응이 없다. 거미줄에 걸리지만 않는다면야 저 녀석들이 움직일 일은 없어 보인다.
"가서 그냥 있으라고?"
최태훈의 질문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래,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나와 서지현은 다시 여기로 돌아올 거야."
열쇠가 있는 위치는 알았으니, 펌프차를 운전해야 하는 최태훈은 펌프차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좋다.
"2번 펌프차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열쇠를 가져 갈 거야. 그 펌프차 앞에 있도록 해."
그 다음, 나와 서지현은 다시 열쇠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바로 3층으로 짓치고 들어가서, 열쇠 챙긴 다음에 펌프차 있는 곳까지 달릴거다."
그 다음에는 재빨리 최태훈에게 키를 건네주고, 소방차를 타고 여기를 벗어난다. 서지현이 내 말에 대답했다.
"그러네요. 어차피 안 걸리는게 힘들다면."
안 걸리기 힘든 상황에서 어거지로 안 걸리려고 기 쓰면서 움직이다가 좆되느니, 번개처럼 처들어가서 키를 챙겨 여기를 벗어나는 편이 성공 확률이 높다.
"글쎄... 성공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는 않아 보이는데."
최태훈의 다소 부정적인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오현석 씨의 말대로라면 이 소방 학교는 저 거미인간들의 부화장이에요. 저 거미인간들도 여기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지는 않을 걸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동조했다.
"위험 요소가 떠나면, 굳이 뒤쫒지는 않을 거다."
소방용 펌프차도 엄연히 기름 먹고 달리는 자동차다. 아무리 느려도 60km/h는 찍을 수 있겠지. 그 속도가 그렇게 느린 속도가 아니다. 키 챙겨서 바로 최태훈에게 달리고, 키를 받은 최태훈이 소방차를 운전해서 여기를 빠져나가면 된다.
"내가 남아 있을 거라고 확신하나?"
최태훈의 말에 나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나랑 이 간호사 아가씨는 소방학교를 벗어나는게 불가능해서 이렇게 계획을 짜고 있는게 아니거든. 한 번 없어봐. 내가 여기 벗어나 교회로 향해서, 무슨 일을 저지르나."
우린 지금 가지고 나올 물건이 있어서 계획을 짜는 것 뿐이다. 일이 틀어졌을 때, 단순히 여기를 벗어나는 것 뿐이라면 해낼 자신이 있다. 내 말에 서지현이 다소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나쁜 사람이 되는 걸 선호하지는 않지만... 일방적인 강요도 아니고, 서로 주고 받는게 있어서 진행된 거래에서 배신을 당하면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자신은 없네요."
최태훈이 펌프차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 길로 바로 소방학교를 벗어나서 교회로 향할 거다.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악어 잡아서 벌려고 했던 경험치를, 사람 잡아서 얻게 될 수도 있다는 식의 협박이다.
"알았다고, 그냥 물어 본 것 뿐이야. 기다리고 있겠네."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 최태훈을 소방 학교의 차고 쪽으로 인도했다. 최태훈은 소방용 펌프차 옆에서 대기시키고 나는 서지현과 함께 다시 아까의 장소로 향했다.
"그나저나, 3층인데 어떻게 올라갈 생각이죠?"
서지현은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보았다.
"기어 올라가야지."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그래야겠죠, 너무 행복하네요. 빨리 하실 수 있겠어요?"
나는 그 말에 꽉 쥐먹을 쥐었다가 피면서 말했다.
"해봐야지. 이전에는 5층까지 벽을 타고 올라가는데 한 20초 정도 걸렸어."
지금은 감각 만큼은 아니라도 레벨 업 하면서 육채와 체력도 올렸으니 더 빠르지 않을까. 게다가 5층도 아니고 3층이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사람이 건물 벽 타고 오를 일이..."
보통은 없지? 나도 알아. 서지현의 말에 곧장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미성년자 하나 때문에 그래야 했던 적이 있거든. 다른 사람이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야."
서지현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한 번 퍽 치고는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아, 혹시 아래에서 손으로 받쳐 올려 줄 수 있을까?"
서지현은 내 말에 어렵사리 대답했다.
"해본 적은 없지만."
괜찮아. 아래에서 받쳐 올려 주는 사람은 올라가는 사람의 박자에만 잘 맞춰주면 되니까. 이전까지 경험을 미루어 판단하면, 서지현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거다.
그때는 사람 죽이려고 벽을 탔지만, 이번에는 도둑질 하려고 벽을 탄다. 나는 가방 안에 들어있던 모포를 꺼내서 한쪽 다리에 감으며 중얼거렸다.
"기가 막히는 팔자로구만."
곧장 앞에서 자리 잡고 있는 서지현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서지현은 긴장한 표정으로 양 손을 모으고 나를 기다린다. 내 발이 서지현의 손에 올라타지고, 내가 아래로 미는 힘에 맞춰서 서지현이 양 팔에 힘을 주고 들어올린다.
"으윽."
서지현의 짧은 신음와 함께 내 몸이 붕 떠오른다. 곧바로 2층의 실외기를 양 팔로 꽉 붙잡은 나는 곧바로 팔에 힘을 주고 벽을 타기 시작했다. 몸에 거미줄이 몇 가닥 얽히는게 느껴진다. 좋아, 아마 이걸로 녀석들도 눈치를 챘을테고.
후욱, 후욱.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건물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목표로 한 창문 근처의 실외기에 자리잡은 나는 곧바로 모포를 휘감아 놓은 다리로 유리창을 걷어 찼다.
와장창.
유리가 박살나고, 나는 곧바로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서둘러야 한다. 벌써 1층에서 뭐가 타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곧바로 장갑의 버튼을 누르고 돌린 다음에, 문 너머로 네모를 날려 보냈다.
"거, 좀 기다려봐. 필요한 거만 챙겨서 나갈테니까.
미리 봐두었던 장소로 달려간 나는 그대로 열쇠가 담긴 캐비닛을 잠그고 있는 자물쇠를 칼 손잡이로 미친듯이 내려 찍었다.
그 와중에 손등의 네모가 바깥의 상황을 비추어준다. 거미인간 하나가 계단을 올라와,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게 보인다. 더럽게 빠르네 저거. 그나저나, 모습을 확인했는데 왜 시간이 안 느려지는거야.
마침내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아니라, 자물쇠가 걸려있던 고리가 통째로 뜯어져 나간다.
열린 캐비닛에서 열쇠를 집자 마자, 나는 곧바로 문 근처로 달리며 손거울을 확인했다.
올라온 건 저 녀석이 전부다. 뒤편에 다른 녀석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저 거미 인간은 여기에서 정리를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안 그러면 도망치는 나와 서지현 뒤를 곧장 따라올테니까.
하나, 둘. 벽 너머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시간을 계산한다.
미닫이 문이 통째로 박살나면서, 어제 봤던 거미인간이 오늘도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그 녀석을 바라보자, 곧바로 시간이 느려진다. 그래, 손거울로 확인한 건 육안으로 본게 아니다 그건가? 덕분에 좋은 거 하나 알아가네.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거울로 만들어진 미로에서 레벨업 해서 올린 다소의 능력치와, 반사신경 2단계의 힘으로 그때보다는 몸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준다.
문을 열고 들어닥친 녀석의 다리를 밟고 뛰어올랐다. 내가 쥐고 있던 칼이 곧바로 녀석의 목줄기를 핥고 지나간다. 칼이 열어놓은 목줄기를 통해서 투명한 액체가 쏟아진다.
그제서야, 녀석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며, 나를 바라본다.
5초 같은 1초가 지나갔다. 세상이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 그르르르륵.
이상한 소리와 함께 목줄기가 활짝 열려 피를 쏟는 와중에 녀석이 나를 향해 앞다리를 내지른다. 마찬가지로, 나도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민감해진 감각 속에서 내가 휘둘러진 검과 녀석이 내지르는 다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거미 인간의 다리는 내 가슴을 노리고, 나는 녀석이 내지르는 다리를 노리고.
동시에 서로에게 닿아야 하는 공격이었지만. 갑자기 내가 검을 휘두른 검에 속도가 팍 하고 붙는다. 후발선타. 찍어두길 잘 했다니까.
동시에 서로를 타격해야 했을 공격이었지만, 내 공격이 녀석의 다리에 먼저 닿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다리에 칼이 박혀들어 공격 방향이 살짝 밖으로 틀어진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나는 허리를 옆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내 공격이 먼저 적중하면서 궤도가 바깥으로 틀어진 다리가, 내 죄수복 앞섶을 찢고 허공을 가른다.
뒤늦게, 녀석이 칼로 베어졌었던 자신의 목줄기를 다시 양 손으로 감싼다. 투명한 점액질의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저건 죽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녀석의 배를 향해 검을 쑤셔 넣고 휘저은 다음 발로 배를 차서 검을 뽑아냈다.
뒤를 돌아볼 시간도 없고, 저 녀석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나는 녀석이 맛탱이가 가 있는 동안 내가 부수고 들어온 창문 쪽으로 달렸다.
"좀 받아줘!"
외침과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아래에 있던 서지현이 황급하게 떨어지는 나를 향해서 양 팔을 내민다.
"우와악."
그런 소리와 함께 서지현의 허리가 한 번 크게 휘청인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 떠오르는 문자. 아까 그 거미 인간은 죽은게 맞구만. 서지현의 도움으로 착지에 성공한 나는 함꼐 달리면서 말했다.
"허리 괜찮지?"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다행히도."
좋아, 그럼 이제 정줄 놓고 뛰자고. 여기 저기 걸려 있는 거미줄 그런 거 신경 쓰며 피할 시간 없다. 숨 몰아쉴 틈도 없이 우리는 미친듯이 달렸다.
툭툭, 몸에 닿은 가느다란 거미줄이 끊어지는 감촉이 느껴진다. 차고 근처로 다가간 서지현이 외쳤다.
"최태훈씨!"
"왔습니까?!"
좋아, 안 떠나고 있었구만 그래. 우리는 곧바로 최태훈이 기다리고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뒤편에서 괴성이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몇 마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괴성이 각양각색인걸 보니 꽤 많은 모양이다.
"빨리!"
최태훈은 우리를 보며 외쳤고,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서 녀석에게 던졌다.
"소방관 아저씨, 선물 받아!"
최태훈이 자기 쪽으로 날아오는 열쇠를 받고는, 곧바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 와중에도 두두둑 하며 거미 다리가 포장된 길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세상에."
서지현이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질린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열 다섯 마리? 아니 그 이상은 되는 것 같은 거미 인간들이 약이 정수리까지 오른 표정으로 우리 쪽으로 달려온다. 펌프차에 시동이 걸린다.
"우린 뒤에 매달리죠."
그래야 할 것 같다. 나와 서지현이 펌프차 뒤에 매달리고, 곧바로 서지현이 칼면으로 차를 한 번 때리며 깡. 하는 소리를 내며 외쳤다.
"소방관 아저씨, 달려요!"
부우웅, 하는 진동음과 함께 소방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운전석 쪽에서 으아아아아! 하는 소리도 들린다. 정신이 쏙 빠지네. 펌프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이것 만큼 묵직하고 튼튼한 차량도 한국에 드물다.
소방차잖아. 속력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하고 서지현의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 나는 능력치 창을 열고 포인트를 재빨리 분배했다. 아까 레벨업 했잖아. 육체에 2, 체력에 1, 감각에 2. 끝! 그리고 울려퍼지는 괴성.
질주하는 소방차를 정면에서 막을 용기는 없는지, 양 옆으로 빠져있던 거미들이 펌프차의 뒤를 미친듯이 쫒아온다.
"미친!"
후웅,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뒤를 쫒고 있던 거미 인간 중 하나가 손에 쥐고 있던 창을 우리 쪽으로 집어 던진다. 날아오는 창, 나는 기겁하며 그걸 칼로 쳐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서지현이 한 손에 불꽃을 피워올린 다음에 우리 뒤를 쫒는 녀석들에게 몇 개 던졌다.
달려들던 거미들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불덩이를 피하고, 그 사이에 속도가 붙은 펌프차가 쭉쭉 치고 나가, 소방학교 정문을 벗어난다.
우리 뒤를 따라오던 거미들이 정문에서 조금 더 나아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역시, 쫒아오지는 않을 모양이다.
"그 거미 새끼들 표정 봤어?"
"저 새끼들 뭐야, 뭐하러 온 거지? 하는 표정이던데요."
"크흐흑..."
내가 웃음을 흘리자 옆에서 서지현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성공했다. 웃겨 죽겠네. 이게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