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패드립은 하지 말자
녀석이 한 말을 이해하자마자 나는 달려들었다. 제대로 반응 하기도 전에 내가 쥐고 있던 칼이 녀석의 허벅지를 쑤시고 들어간다. 뒤늦게 나를 칼로 내려찍기 위해서 휘둘러지는 손이 보인다.
검을 잡고 있는 녀석의 손목을 꽉 붙잡고. 칼을 쥐고 있는 녀석의 손가락에 입을 가져간다.
"으아아아아악!"
내 입 안에서 녀석의 손가락이 씹히기 시작하고, 입 안에 피비린내가 한 가득 차오른다. 손가락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검을 쥐고 있던 녀석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서 검을 빼앗아 들고, 녀석의 허벅지에 박혀들어간 내 검을 무릎으로 꽉 눌렀다.
무릎을 타고, 검이 조금 더 깊숙하게 박히는 감촉이 전해진다.
칼이 허벅지를 쑤시고 들어가는 통증과 내가 달려든 무게를 견디지 못한 몸이 뒤로 넘어간다. 나는 뒤로 넘어가는 녀석의 턱을 신발로 한 번 강하게 밟았다.
멍하니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있던 두 명의 남자가 몸을 떤다. 바닥을 향해 침을 뱉었다. 물어뜯은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와 내 침이 섞인 타액이 바닥을 때린다.
"모르는 사람한테 말을 걸 때는 정중해야 하는 법이야. 어디에서 뭘 하던 새끼인지 전혀 모르잖아. 미친 놈이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을 막 하고 그래?""
말을 하는 와중에 발 아래에서 끄으으, 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린다.
"아이씨, 이거 아직도 소리가 나네."
곧바로 녀석의 입을 발뒤꿈치로 두어 번 내려찍었다.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두 녀석은 검자루만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꽉 잡은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나는 그 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칼 버려 씹새들아."
내 말에 녀석들이 주춤거리며 계속 검을 드고 있는다.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생물이다. 이미 불알이 쪼그라들 정도로 위축되었다고 해도 시킨 걸 무조건 적으로 따르는 경우는 없다. 이럴 떄는, 대충 이유 비스무레 한 것을 하나 던져주면 된다.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녀석의 가슴을 발로 몇 번 밟았다.
"계속 들고 있으면, 이 새끼 맞아 죽는다?"
허벅지에 칼이 박히고 턱주가리가 발로 밟혀서 아작난 이상, 지금 기절해서 뻗어있는 이 녀석이 살기는 글렀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안 그래도 잔뜩 쫄아있던 상황에서 칼을 버려야 하는 그럴듯한 이유까지 던져주자 두 사람은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서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제 그만 좀..."
나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리고 조금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자, 니들 친구 데려가라."
살릴 수 있으면 한 번 살려도 보고.
두 녀석이 내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바닥에 기절한 녀석에게 다가가서 녀석을 부축하고,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빠지기 시작한다. 녀석들이 멀어지는 걸 보고 있던 나는 시선을 돌렸다. 창백하게 질린 여자가 나를 보며 입술을 떨고 있다.
"안동을 가려고 하는데. 가는 길 알면 말 좀 해주지. 내가 바깥 사정을 잘 몰라서."
범죄자라고 해도 구해준 사람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내 말에 여자가 더듬더듬 입을 연다.
"쭈... 쭉 내려가시면 저기, 34번 국도가 나올거에요. 국도를 따라서 서쪽으로 계속 가시면."
나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34번 국도라.
"여기서 안동까지는 멀려나."
"어, 음. 한 40km 정도 될 거에요."
"방금 그건 혼잣말이었는데? 뭐, 대답은 고마워."
40km 정도 되는 거리라면 3일 정도를 잡는 편이 좋겠지. 물론 그냥 걷기 시작한다면야 하루 꼬박 걸으면 도착하겠지만. 지친 상태로 도착해서는 의미가 없다. 삼일 정도 휴식과 이동을 번갈아가며 움직이자. 생각을 마친 나는 여자의 상태를 한 번 슥 훑어보고는 말했다.
"트럭에 치일 뻔했다고 생각하고 털어버려. 오래 생각하고 있어봤자 도움 될 거 없을테니까."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고, 움직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야 할 길이 있고, 저 여자도 내가 주변에 오래 있으면 불안해 할 것이 뻔하니까.
"저기."
내가 그 말에 시선을 돌리자. 여자가 내 쪽으로 통 두 개를 굴려서 보내주었다.
"뭐야 이건."
내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포비돈 요오드에요."
뭐라는 거야. 잠깐 여자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지간하면 한글로 말해주지?"
"... 빨간약."
아하, 빨간약? 봐, 알아듣게 말할 수 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통을 손에 집어들고 열어보았다. 안에는 파란색 알약이 들어있다.
"이건?"
"나프록센나트... 진통소염제에요. 최초 먹을 때는 2알. 이후 6-8 시간마다 한 알씩. 알러지가 있을 수 있으니. 먹고나서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먹지 마세요."
뭐야. 이 아가씨 의사 같은 거였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통을 구경하다가 둘러메고 있던 가방 안에 약이 들은 통 두 개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 사이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말을 걸었다.
"그리고, 해가 저물면 돌아다니지 마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던 일이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지겠지. 천상 하루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미션이 추가되었습니다.]
나는 눈 앞에 떠오른 문자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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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울부짖는 밤
목표 : 이 마을 주변을 밤그늘 졌을 때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한 모양이다. 죽지 않고, 이 마을 주변에서 하룻밤을 버텨라.
보상 : 400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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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뭐가 돌아다니는지, 알아?"
내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눈알이 없는, 늑대를 닮은 괴물들이에요. 해 지기 전에 시간이 좀 있으니, 화장품 가게 같은 곳을 잘 뒤져보면 좋아요."
나는 여자의 말에 픽 웃었다. 화장품 가게라니.
"화장하면 안 잡아먹기라도 하나?"
내 말에 여자가 억지 웃음을 지은 채로 자기 코를 검지로 툭 쳤다.
"새벽에 여유가 조금 생겨서 위험을 감수하고 몇 가지 확인 해봤는데, 그 녀석들은 후각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사냥감을 찾아요. 쫒기는 와중에 싸구려 향수 통 하나 까서 바닥에 뿌려놓으면 시간을 제법 벌 수 있죠."
"이야, 도움을 많이 받는 것 같은데."
약에 더불어서 이 쬐그만 마을에 해가 지면 돌아다니게 될 괴물들. 거기에 더해서 대처법까지. 내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트럭에 치일 뻔했는데 덕분에 살았잖아요."
여자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말은 강단있게 하지만 다리는 조금 떨리고 있다. 나는 그런 여자를 보다가 말했다.
"그나저나, 제법 똘똘하신 분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내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그 세 녀석 모두, 얼굴을 알고 있는 새끼들이었어요. 설마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죠. 아는 척 하길래 조심스럽게 다가갔더니."
아하, 원래 성범죄의 대부분은 얼굴을 아는 사람이 저지른다고 하던데. 나는 그 말에 여자를 슥 훑어보고는 말했다.
"그렇게 호리병 같이 미끈한 몸을 하고 돌아다닐거면 사람은 조심해야지."
내 말에 여자가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갈 곳이 없으면 따라오시는 건 어때요?"
나는 그 말에 여자를 바라봤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아까 세게 맞은 곳은 배잖아. 근데 왜 이 여자는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것 같지. 내 말에 여자가 주변을 둘러보고, 손목 시계를 확인한 다음 말했다.
"해는 이미 지고 있어요.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지금부터 준비해서는 안전하기 힘들걸요."
여자의 말에 나는 대답했다.
"그건 내 사정이지."
내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젯 밤을 무사히 보낸 곳이 있어요."
나는 여자의 말에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대답했다.
"방금 전에 그 꼴을 당할 뻔한 주제에. 이젠 이런 복장 하고 있는 사람을 자기 은신처로 데려가겠다고?"
게다가 내가 그 친구들 어떻게 쓰다듬어 줬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을텐데. 내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죄수복을 보니, 교도소에서 탈출하신 모양이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교도소는 흉악범들을 가두기로 유명하지만..."
여자는 말을 마치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아직 나는 멀쩡히 살아서 숨쉬고 있잖아요."
이 아가씨 봐라.
"이 범죄자가 마음이 바뀌면. 감당 할 수는 있고?"
내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글쎄요. 곱게는 안 당해보려고 노력해야죠."
여자는 말을 마치고 잠깐 있다가 나를 바라봤다.
"안동으로 가는 이유는 미션 때문이죠?"
나는 그 말에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역시,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하게 눈 앞에 문자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오늘 하루 더 여기에서 머무르고 저도 안동으로 향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같이 가기라도 하자는 건가.
"다 큰 여자가 범죄자를 은신처로 들이고, 동행까지 신청하다니. 제정신으로 할 만한 제안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보건지소에서 수액 놔줄 때 농담 던지며 친한 척 하던 새끼들이 대뜸 저를 강간하려고 했어요."
아, 간호사였나. 하긴, 아까 하는 말을 들어보니 뭐 의약품에는 제법 지식이 있어 보였다. 여자는 잠깐 몸을 떨고 나서 말했다.
"제정신? 죄수복 입은 까까머리만 범죄자인게 아닌 세상이라는 건 방금 뼈저리게 느꼈는데 무슨 제정신."
여자는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반 시체가 된 한 명은 몰라도... 나머지 두 명은 멀쩡히 돌아갔어요. 하려던 일이 당신 때문에 실패했으니 여전히 저에게 미련은 남아있을 수 있죠. 하지만 그 잔악무도한 꼴을 눈으로 봤으니 여전히 당신은 무서워 할 테고."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하긴, 혼자 돌아다니다가 그 꼴을 당했으니, 혼자보다는 둘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차라리 범죄자랑 붙어있는게 혼자 돌아다니는 것 보다 안전하다는 건가?"
물론 나는 먼저 시비를 털지 않는다 뭐 빨간 색이 보고 싶다면서 사람 배를 활짝 여는 또라이가 아니다. 하지만 저 여자는 나란 녀석이 어떤 놈인지 모르잖아. 알고 있는 건 교도소에서 탈출한 탈옥범이라는 것 뿐인데. 굉장히 대담한 발상이다.
내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그 상황에서 나를 구해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요."
안동까지 동행이라. 거기에다가 이미 이 여자는 여기에서 하루를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에서 그친 것도 아니다.
이야기 하는 걸 보니 자기 목숨줄 달랑거리는 상황에서 괴물들을 상대로 이런 저런 실험까지 할 정도의 담력도 있는 것 같다.
애초에 내가 그 짓거리 하는 걸 보고 나서도 두려움 속에서 저런 제안을 할 정도니까. 담력은 보증수표라고 해도 좋다.
"그럼 안동까지는 함께 하지."
원래 이런 세상에서 전문인력 찾아보기는 힘들테고, 심지어 간호사라고 하면 의료업 종사자다. 전문인력 중에서도 사람 목숨을 살리는데 관여하는 전문인력은 귀족에 속한다.
상점 목록에는 분명히 마시면 부상이 회복되는 포션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지만, 가격이 굉장했으니까. 지금은 살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이다.
내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아요, 따라오세요. 이름이?"
내 이름이 뭐였지.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답을 돌려주었다. 오늘 꿈 속에서 누나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면 아마 기억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8년이나 죄수 번호로 불렸으니까.
"오현석."
내 말에 여자가 걸어가던 걸음을 잠깐 멈추고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잠깐만요. 오현석이라고, 당신이?"
"뭐야, 나를 아는 모양이네. 생각 바뀌었으면 지금 말해."
내 말에 여자가 잠깐 입술을 달싹였다. 한 2초 정도 지났을까. 여자가 탄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생 될 대로 되라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따라오세요."
여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앞장서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나는 다시 여자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