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태양 천하
2020년 1월 대치동 태양 고등학교.
수능 필수 과목인 한국 근현대사 수업 시간이다.
“주목. 오늘은 수능에 꼭 나오는 한국 발전사 ‘태양의 기적’에 대해 수업하겠다.”
교사는 교과서를 교탁에 내려놨다.
“20세기 한국은 일제의 수탈과 한국 전쟁, 이후 외국 원조에 의지한 개발도상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프리카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였지.”
75년까지만 해도 외국 차관이 68억 달러, 1인당 GDP는 1천 달러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76년 태양 그룹이 제7광구 대륙붕 석유 개발에 성공하면서 우리는 사우디에 이은 세계 2위 산유국이 되었다.”
학생들은 열심히 필기했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2020년 현재 시중 휘발유 가격이 얼마인지 아는 사람?”
“1리터에 290원이요.”
“태양 그룹의 최대 업적은 바로 기름 값을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 아닌데.”
학생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선생님, 석유가 아니더라도 태양 그룹이라면 세계 최초로 내놓은 게 많잖아요?”
“맞아요. 세계 최초 반도체, 세계 최초 컴퓨터, 세계 최초 인터넷, 세계 최초 휴대폰, 세계 최대 온라인 마켓.”
“그냥 뭔가 새로운 게 나왔다 하면 전부 태양 그룹 기술인데요?”
학생들이 술렁대자 교사가 국사책을 교탁에 탕탕 내려쳤다.
“주목. 현재 태양 그룹은 전 분야 세계 1위라는 걸 누가 몰라? 2000년대 이후로는 19세기 석유 재벌이라는 록펠러 가문도 태양 그룹에겐 명함 못 내민 지 오래됐다.”
그제야 학생들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세계 최강대국이란 대한민국도 미국에 원조 받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야. 그 시절을 이끈 게 바로 태양 그룹 강태수 회장이다.”
학생들이 재빨리 필기를 시작했다.
수능 시험 단골 소재니까 집중해야 한다.
“강태수 회장이 주목한 것이 바로 석유 사업이었다. 석유를 바탕으로 한국의 미래가 바뀌었지. 80년대 눈부신 국가 발전은 전 세계에서 독보적이었다. 최단 기간 선진국 진입이란 쾌거를 이루었으니까.”
이후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에서 이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몰려들었다.
“76년 안정우 대통령을 시작으로 친일 세력 청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 조직 폭력배와 마약을 뿌리 뽑았다. 이후 공교육 전문 무료, 전 학교 급식 시설, 국민 의료 보험 제도를 실시했지.”
안정우 대통령은 지지율 91%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퇴임했다.
“한 명의 천재가 세계를 바꾸어 놓는다. 강태수 태양 그룹 회장이란 걸출한 천재 한 명이 세계 경제와 정치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한국의 축복이다.”
모두 태수가 계획했던 그대로 이뤄졌다.
“대통령과 태양 그룹이 공조하여 내놓는 ‘국가 개발 5개년 계획’마다 성공한 덕분이었지. 2020년 현재까지도 태양 그룹과 한국 정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공조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정재계의 기술 연합의 시너지가 극대화된 세계 유일한 성공 사례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정치 경제에 미치는 태수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태양 그룹이 후원하는 장학 재단에서 수준 높은 국가 인재들이 국가 기술을 책임졌고, 한국 전자제품 기술력은 세계 최고란 평가를 받게 됐다.”
그걸 바탕으로 태양 그룹은 세계 최초란 업적을 매년 갈아 치우고 있다.
“전 분야 세계 최고 수준 교육을 제공하는 대치동 태양 학군부터 태양 대학교까지. 노벨상 후보들이 무더기로 배출하는 교육 도시를 태양 그룹이 만들었다.”
지금 이곳에서 수업 받는 학생들이 바로 전국,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앞으로 태양 그룹에 입사하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들이다.
“전 세계 인재들이 모두 태양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몰려드는 거 잘 알지?”
“네!”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너희 역시 분발해야 한다. 알겠나? 너희는 자랑스러운 태양 고등학교의 영재들이다.”
“예, 알겠습니다.”
이후 한참이나 더 그들은 한국 근현대 발전사를 공부했다.
그게 곧 태양 그룹의 역사이기도 했다.
* * *
대치동 태양 그룹 본사 27층 회장실.
집무실 책상 위에는 번쩍이는 명패가 빛났다.
<태양 그룹 총수 회장 강태수>
지팡이를 가지고는 있지만 70대라고 보기 힘든 건장한 육체의 노인.
강태수가 집무실 책상을 등진 채 유리창 밖을 보았다.
낮게 가라앉은 눈빛이 차가웠다.
“주석, 내 아들의 경고가 그리 가볍던가?”
책상 앞에는 방호복으로 전신을 감싼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자가 있었다.
중국 주석이 작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어눌한 한국어로 간청했다.
“회장님, 부디 한 번만 노여움을 거둬 주십시오. 돌아가는 즉시 어떻게든 이 사태를 막아 보겠습니다.”
“늦었어.”
태수는 노여움을 숨기지 않았다.
“이번 코로나 사태의 책임을 묻겠다.”
팬데믹.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로, 세계 보건기구의 전염병 경보 단계 중 최고 위험 등급에 해당된다.
중국에서 터진 코로나 때문에 팬데믹이 발령된 것이다.
“태양 제약이 보내 준 매뉴얼대로 초기 대처만 확실했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태수의 분노는 당연했다.
하지만 중국 주석은 억울했다.
“아무리 태양 그룹이라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무당의 말보다 허황된 추측성 경고문이었습니다!”
2019년 12월 1일.
중국 우한 행정부로 태양 그룹이 보낸 공문이 들어왔다.
또한 중국 주석 앞으로도 같은 공문이 전송되었다.
“중국 인구가 몇입니까? 고작 바이러스성 감기 하나에 중국 전역을 봉쇄하고! 전 국민 마스크 착용 의무화와 자가 격리를 전면 시행하라니요?”
따를 수 없는 명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태양 그룹에서 나온 경고문이라도 말이다.
“중국을 견제한 세력이 부리는 농간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지 않았어요! 이건 미국 연구실에서 우리 중국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그만.”
더 듣고 싶지 않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놈에게 낭비할 시간 따윈 없다.
“끌어 내.”
태수의 명에 따라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중국 주석을 결박했다.
질질 끌려가면서 중국 주석은 울부짖었다.
“회장님,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시끄러우니까 입 막고.”
“우웁! 웁!”
태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유리창 밑으로 엄청나게 발전한 서울의 모습이 보인다.
75년도 준공했을 때와는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진 2020년의 서울이었다.
‘경고를 귓등으로도 들어 처먹지 않지. 사리사욕에 눈이 먼 어리석은 놈들 때문에 미래가 바뀌지 않았구나.’
중국 주석이 끌려간 후, 온몸에 소독제를 뿌리고 온 40대 중년인이 회장실에 들어왔다.
“아버님, 중국은 어찌 처리하실 작정이십니까?”
“중국 봉쇄령부터 내려. 비행기와 배, 철도와 버스 등 모든 도로와 운송 가능 시설을 틀어막는다. 마스크와 자가 격리부터.”
첫 환자가 발생했음에도 중국 정부는 모든 정보를 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태양 그룹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고 한 짓이었다.
이미 태양 그룹은 코로나 관련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끝났다.
우한에서 코로나가 발생하자마자 바이러스 채취한 이후 바로 백신과 치료제 생산에 돌입했다.
“무능한 놈들은 물갈이 해야지. 이 일은 이제 네게 맡기마.”
태수가 서랍에서 USB 하나를 꺼내 아들에게 내밀었다.
“이것이라면 중국 정부 인사들을 한꺼번에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살생부와 치부책도 이렇게 간단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됐다.
태양 그룹 부회장이자 태수의 아들이 USB를 받아 들었다.
대신 태수에게 결재 서류를 내밀었다.
“태양 제약에서 보내온 보고서입니다. 전 세계 병원에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 납품 완료되었습니다.”
“좀 늦었구나. 한 달이나 걸렸어. 7년 전부터 준비한 일이거늘.”
“아버님께서 설명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정확히 일치하는 바이러스 찾는 게 일이었잖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신종 바이러스는 2019년 12월 우한에서 처음 괴질로 발견되었다.
아무리 유능한 태양 제약 연구진이라고 할지라도 해당 바이러스를 찾는 일이 요원했다.
하지만 무려 7년 동안 수많은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연구하지 않았던가.
중국발 우한 바이러스를 찾아내자마자 바로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들어갔다.
이미 비슷한 바이러스를 대상으로 임상 실험까지 끝내 놓은 지 오래다.
“그런데 백신과 치료제 가격은…….”
“무료로 배포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된 연구로 천문학적인 금액이 투자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 짐작하고 있던 태수의 아들은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가 떼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이리 허망하게 날려 버리는 것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돈 냄새 안 나십니까?”
“나지.”
돈 냄새가 왜 안 나겠나?
백신 한 병에 2천 원만 받아도 얼마인가.
전생과 달리 한국 인구는 이제 1억 5천 명을 넘어섰다.
일찍부터 출산을 장려 하고, 정부가 육아 보육 정책에 힘을 쏟은 덕분이었다.
“굳이 무료로 배포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한국인들 중에 돈 없어서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 구입 못할 가정은 없을 텐데요.”
“세상에 사람 목숨보다 귀하고 비싼 것은 없다.”
임신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문제도 대두되지 않도록 복지에 신경 썼다.
IMF 같은 경제적 여파도 겪지 않은 황금세대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대한민국 최전성기에 이를 때까지 풍요로움만 맛봤다.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무려 7만 달러를 넘지 않았던가.
“전 세계가 모두 한국만큼 잘 사는 건 아니니까.”
태수는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앞으로 태양 그룹은 네가 맡기마. 내 몫의 주식과 재산도 전부 네가 거둬 가거라.”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선 아직 정정하십니다.”
“아니다. 이만하면 됐다.”
그러자 태수의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수가 집무실 책상 위에 있던 자신의 명패를 가방에 넣는다.
그리고 가방에서 새로운 명패를 꺼내 아들에게 건넸다.
“받아라.”
<태양 그룹 총수 회장 강태양>
“감사합니다.”
“록펠러 성을 물려줄 것을 그랬나?”
“관심 없습니다. 그건 여동생 몫입니다. 어머니께서도 그러시길 바라시잖습니까.”
“그래.”
엘리스는 록펠러의 차기 가주로 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태수가 지팡이를 짚고 회장실을 나서자 아들이 물었다.
“아직 퇴근하기 이른 시간인데, 어디 가십니까?”
“태양 병원 VIP 병실에 가려 한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난 멀쩡하다.”
전생에서보다도 건강관리에 훨씬 힘쓴 결과다.
“해묵은 인연을 매듭지을 때로구나.”
뜻 모를 소리와 함께 태수는 태양 그룹 본사를 떠났다.
* * *
태양 병원 VIP 병실.
병원장이 직접 태수를 위해 병실 문을 열어 주었다.
태수는 뒤따르는 태양 그룹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잠시 여기서 대기하지.”
“알겠습니다.”
각종 생명 유지 장치를 달고 있는 70대 노인이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
그가 태수를 보고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강태수……!”
한일권이었다.
‘전생에서 바로 오늘 이 시각, 너와 난 이 자리에서 만났었지.’
그때는 환자복을 입은 태수와 양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한일권이 마주했었다.
그리고 태수는 한일권의 손에 죽었다.
“오랜만이야.”
“이 지긋지긋한 놈…….”
다 죽어 가는 목소리였다.
한일권은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중국계 폭력배들과 어울려 다니더니 코로나에 걸렸다더군. 이거 유감이야.”
“너도 코로나에 걸려 볼 테냐……? 클클클.”
“소식 못 들었나? 태양 제약에서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성공한 지 오래다.”
한일권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넌 대체 나와 무슨 원한이 있어서……!”
한일권은 비참하게 망했다.
청일 건설이 부도나면서 사채업자들에게 쫓겨 다녀야 했다.
집안에 전부 빨간 압류 딱지 붙이는 광경도 지켜봐야 했다.
태수가 한청호 대저택을 태수가 직접 포클레인으로 허무는 것도 봐야 했다.
과거 한일권이 태양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때려 부쉈던 그대로 돌려받았다.
“네놈 덕분에 감방 구경도 여러 번 했지…….”
한일권을 지켜 주던 청일이 망하자 피해자들이 여기저기서 나와 한일권을 끌어내렸다.
결국 뒷배가 없던 한일권은 지었던 죄로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네놈이 록펠러 가문 사위가 되는 동안… 난 약쟁이 여자랑 살림을 차려야 했고…….”
믿었던 초명 은행도 망해 버리고, 사채업자들 등쌀에 그 집 딸과 함께 살아야 했다.
이를 두고 다들 ‘자업자득’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지긋지긋한 밑바닥 삶이었어……. 지옥이 따로 없어…….”
은행 대출도 막히고, 신용불량자로 카드도 못 썼다.
감방 생활 때문에 그어진 빨간 줄로 변변한 직업도 못 구했다.
서울역 노숙자 생활을 몇 년이나 했던가.
무료 급식 봉사로 하루 한 끼 연명하는 삶이었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지……?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난 청일 그룹 총수였단 말이다……!”
울부짖던 한일권이 격하게 기침했다.
“마지막까지 좋은 구경 시켜 주는군.”
한일권은 죽어 가는 태수에게 ‘마지막까지 좋은 선물을 준다.’며 좋아했다.
전생에 이미 대한민국 1위로 키운 청일 그룹은 태수의 계획대로 금산 그룹을 먹어 치웠을까.
태수는 차가운 눈으로 죽어 가는 한일권을 내려다봤다.
“잘 가라.”
태수는 등을 돌렸다.
전생에 한일권이 했던 저승 배웅을 이번엔 태수가 해 준다.
한일권은 손을 뻗었다.
“치료제를 줘……!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성공했다며……?”
하지만 태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온다.
“강태수……! 돌아와……!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제발 살려 줘……! 쿨럭……! 끄흐흐흡-!”
태수는 병실 문을 닫았다.
그런데 병실 문밖에 대기하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없었다.
병원 복도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태수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남자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딸랑.
들리지 말아야 할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태수는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분명 낯이 익은데, 누군지 기억할 수 없었다.
“장군 신께서 말씀하시길, 넌 흙 만지는 사업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럼 장차 대한민국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태양 같은 인물이 될, 재벌 잡는 재벌 사냥꾼이다.”
기억났다.
“그때 그 무당이로군.”
분명 한일권의 손에 죽었다.
주마등을 본 직후 눈을 뜨자 눈앞에서 이 무당이 방울을 흔들고 있었다.
1972년 7월에 봤던 얼굴 그대로였다.
“어떤가? 2회차 인생은 만족스럽던가?”
누구에게도 회구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던 태수다.
하지만 무당은 거리낌 없이 ‘2회차 인생’에 대해 말했다.
태수는 깨달았다.
‘이제 보니 사람이 아니었군. 설마…….’
전생에 태수는 바로 오늘 이곳에서 죽었다.
“절 데리러 오신 겁니까?”
“이번에는 아니야. 데려갈 사람은 따로 있다.”
그가 품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이거 말이야.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이렇게 다시 내 손에 돌아오게 됐다. 넌 네 소임을 충실히 완수했다.”
태수의 집 서재 서랍에 잠들어 있어야 할 공책이었다.
태수는 요즘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며 회고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인생 한 번 더 살게 된 값으로 이것을 받아 가겠다.”
그가 태수의 회고록을 도로 품에 넣었다.
“자네 회고록 제목은 내가 지어 주지. 음, <치부책>이라 하지.”
“치부책?”
왜 하고 많은 제목 중에.
문득 한청호가 가지고 있던 보물 <치부책>이 떠올랐다.
한청호가 성공하게 된 근원이자 죽을 때까지 태수에게 보여 주지 않던 것이다.
“그래, 난 이걸 회수하기 위해 너를 과거로 보냈다.”
그가 한일권의 병실을 힐끔 보았다.
“내 과오였다. 그로 인해 이들 부자가 네 인생을 훔쳐 살았으니 네게 그 값을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
“한청호 부자가 제 인생을 훔쳐 살았다고요?”
“그럼 한청호 부자가 무슨 능력으로 재벌이 되었겠나? 왜 자네 가족과 친구들을 전부 죽였겠나? 네가 돈 냄새 맞는 것은 어찌 알고? 널 청일의 개로 키우기 위해 무슨 수작을 부렸지?”
“하지만…….”
“동생을 시장 바닥에서 잃어버린 죄책감으로 돈 냄새 맡는 능력을 일부러 봉인하게 된 게 아직도 우연이라 할 텐가? 누가 널 꾀여내고 네 동생을 납치했겠나?”
그가 태수를 지나쳐 한일권의 병실 문을 열었다.
한일권은 울부짖던 그대로 시간이 멈춰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너는 7살 때 태양 건설을 세웠을 거야. 어리다고 얕봐서는 안 되지. 한청호는 어린 네 대신 손발이 되어 뛰어다녀야 했다.”
태수는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생에서 태수는 한일권의 손발이 되어 뛰어다녔다.
사채 빚을 대신 갚아 주고, 가족을 거둬 준 한청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강태수,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 깨달았던 점이 있던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태수는 한일권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인간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
한일권은 개과천선하지 않았다.
청일 그룹 총수로 살았을 때나, 밑바닥 인생을 살았을 때나.
한결같이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다녔다.
또한 태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생과 똑같이 일에 빠져 살았다.
전생에선 청일 그룹을 키우느라, 이번 생에선 태양 그룹을 키우느라.
“그렇지만 내 하기에 따라 상황은 얼마든지 변한다는 것.”
하지만 태수가 하는 것에 따라 미래도 변하고, 환경도 변했고, 인연을 맺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나라는 사람은 바뀌지 않았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덕분에 이번 생은 행복했습니다.”
좋은 아내를 얻었고, 기특한 아들과 딸도 얻었다.
태수의 부모님은 호강하며 천수를 누렸고, 한수와 홀쭉이와 함께 즐거움을 누렸다.
무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무당은 한일권의 멱살을 잡고 홀연히 사라졌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이-
한일권은 죽었다.
전생에서 태수가 죽었던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였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