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태양 천하(1)
태양 그룹 본사 27층에 위치한 총수 회의실.
계열사 사장단이 전부 물러간 후, 회의실엔 태수와 김우진만 남았다.
김우진만 남긴 이유는 따로 있었다.
태수는 김우진의 인사 고과 서류를 읽으며 말했다.
“사우디뿐만 아니라 주변 중동 국가에서 공사 수주를 제법 많이 땄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리비아 대수로, 바레인 아랍조선수리소, 쿠웨이트 국제공항, 이라크 고속도로. 굵직한 것만 추려도 족히 20억 달러는 될 것 같군요.”
20억 달러라면 70년대 한 해 대한민국 정부 예산과 맞먹는다.
태수가 사우디에서 따낸 주베일 산업항 공사보다 무려 2배에 달한다.
‘전생에서도 김우진은 친화력이 남달랐지. 영업의 귀재였다.’
특히 포장과 홍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각국의 정상들과 두터운 친교를 바탕으로 사업을 따내곤 했다.
‘전생에서 중동 건설 붐의 가장 큰 수혜자는 김우진이었다. 단숨에 재계 서열 4위까지 도약했으니까.’
이번에도 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작년 한 해 그룹 최고 실적이 해외 영업부에서 나왔습니다.”
“기회가 왔기에 잡으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빨리 귀국하고 싶어서요.”
“금의환향하기 충분한 실적이군요.”
“귀국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태수는 조용히 서류를 덮었다.
잠시 김우진을 말없이 응시했다.
“복수?”
“회장님께서 확실하게 하셨다더군요.”
김우진은 매일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권토중래를 꿈꿨다.
악착같이 성공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그래서 김우진은 씩 웃었다.
“전 청일을 무너뜨릴 생각만 했는데, 회장님께선 청일을 알뜰하게 먹어치우셨죠. 확실히 저보다 낫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대운 그룹의 지주 회사가 대운 건설이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룹이라고 해봤자 재계 서열 300위에도 들지 못하는 작은 기업이었습니다.”
김우진은 대운 건설을 한청호에게 빼앗기듯 넘겨야 했다.
한청호가 박정환의 권력을 이용해 은행을 동원하여 태수와 김우진의 대출을 틀어막았을 때, 태수는 버텨냈지만 김우진은 그렇지 못했다.
“한청호는 대운 건설을 초명은행에 넘겼습니다.”
“뭐라고요? 청일 건설에 합병된 게 아닙니까?”
이해할 수 없었다.
“한청호가 건실한 대운 건설을 탐낸 게 아니었다면 왜……!”
“초명 은행장의 화를 달래기 위해서. 선물로 넘겼다더군요.”
“개새끼! 빌어먹을!”
초명 은행장 최무룡이 검은돈 세탁 창구로 쓰던 삼원 건설이다.
삼원 건설은 사우디 공사에서 문제를 일으켰단 이유로 박정환의 분노를 샀다.
그때 한청호는 삼원 건설을 외면했고, 삼원 건설을 빼앗기게 된 최무룡은 분노했다.
오랜 동맹이 깨질 뻔 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대운 그룹을 도산시켰다고? 그럴싸한 선물을 주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초명 은행이 대운 건설을 먹어?”
불같이 화가 끓었다.
“아직도 되찾아 오고 싶습니까?”
“네, 찾아오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걸 가져가십시오.”
태수는 김우진 앞에 서류 뭉치를 하나 툭 던졌다.
서류를 넘길수록 김우진은 안색을 굳혔다.
“이, 이건……!”
“최무룡 전용 치부책입니다.”
초명 은행의 최무룡과 청일의 한청호는 한 배를 탔다.
한청호가 양지에서 고위관료들 뇌물을 뿌릴 때, 최무룡은 음지에서 해결사 노릇을 했다.
그렇게 한청호는 재계 서열 13위의 청일 그룹의 회장이 되었고, 최무룡은 강북 최고의 사채업자에서 번듯한 은행장까지 되었다.
“김차열 검찰청장이 도와줄 겁니다.”
김우진은 서류뭉치를 꽉 쥐었다.
“제게 대운 그룹을 돌려주시겠다는 뜻, 뼛속 깊이 은혜로 새기겠습니다.”
복수의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김우진의 눈이 다시 열정으로 활활 타올랐다.
“회장님, 제게 왜 이런 호의를 베풀어주시는 겁니까?”
“나는 상벌이 분명합니다.”
태수는 손에 들고 있던 김우진의 서류를 흔들었다.
“무려 20억 달러짜리 실적인데 치하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회장님께서 그간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로도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도망자 신세를 면케 해주고, 빚을 대신 갚아주고, 일을 주고, 능력을 인정해줬다.
“대운 건설은 반드시 되찾아오겠습니다. 하지만 회장심의 예상과 달리 저는 독립할 생각이 없습니다.”
“한때마다 스스로 재벌 그룹을 꾸려왔던 사람이 독립을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한때마나 스스로 재벌 그룹을 꾸려왔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김우진은 웃었다.
“태양 그룹 같은 재벌 그룹까지 키울 자신도 없고, 회장님과 제대로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 같지도 않습니다.”
“겸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꿈이 크신 분 아닙니까.”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제가 이제껏 탄복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회장님이십니다.”
김우진이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회장님을 끝까지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앞으로 제 꿈은 태양 그룹에서 키우겠습니다.”
허리를 편 김우진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초명 은행을 무너뜨리고 내 손으로 대운 그룹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태양 건설에 흡수 합병시킬 생각입니다. 해외 건설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만족스러웠다.
김우진은 태수의 시험을 통과했다.
“승리의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올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김우진이라면 화끈하게 초명 은행을 무너뜨릴 것이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 우리 가족을 오래도록 괴롭혔던 사채업자도 이렇게 정리하게 되는군.’
전생에서 태수 가족의 불행은 한 장의 차용증에서 시작됐다.
아버지 친구에게 속아 연대보증을 약속한 바람에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며 살았다.
전생에 태수는 사채의 구렁텅이에서 일가족을 구해준 은인으로 한청호를 모셨다.
청일 병원 VIP 병실에서 한일권이 말해주었다.
-네 아버지를 죽이고, 가족들을 팔아버린 사채업자가 바로 최무룡이야. 클클클.
전생에 태수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한청호와 최무룡은 한 배를 탄 사람들이란 점이었다.
빚 독촉하다가 태수 아버지를 야산에 매장했던 사채업자가 누구겠는가.
한청호는 대체 무슨 수로 태수 아버지의 시신을 되찾아주었겠는가.
‘최무룡, 이제껏 한청호 그늘에서 호의호식하고 살았으니, 너도 이제는 죄 값을 치러야지.’
세계 제1차 석유 파동 때 초명 은행을 노렸던 이유다.
‘그때는 한청호가 구조선으로 살려줬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 누구도 너를 건져줄 수 없을 것이다.’
전생에서는 갚지 못했던 복수의 시간이다.
* * *
촤촤촤촤촤.
카메라 플래시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안정우의 대통령 취임식은 국민들의 관심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다.
“제 9대 대통령 취임식을 이것으로 마칩니다.”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안정우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제일 앞자리에서 참관하고 있던 태수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 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서 보는군. 고맙네. 감사의 의미로 보답 하나 하지.”
“뭡니까?”
“자네가 청일 해운을 얻은 참에 조선소도 하나 세워야하지 않겠나?”
구미가 당긴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이런 제안을 해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찬장까지 같이 가지. 가면서 마저 얘기하자고.”
“무슨 꿍꿍이십니까?”
“꿍꿍이라니. 난 그저 앞으로 가족 같이 잘 지내보자는 뜻인데.”
안정우가 안소정을 태수 옆에 붙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안소정은 얼굴이 빨개져서 부끄러워했고, 태수는 헛웃음 지었다.
장말동이 즐겨하던 짓을 안정우가 하다니.
“제가 확실하게 거절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알아. 그것까진 안 바란다. 그냥 화면에만 같이 한 번 비추면 돼. 쇼 한 번 하자고.”
어느새 정치인이 다 되셨군.
태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석유를 갖고 있는 자네가 내 공약을 지지한다는 것만 보여줘. 다른 건 안 바란다니까. 거사를 함께 도모한 동맹이며 가족 같은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주겠지?”
“대통령 만들어 드렸으면 됐지, 여기서 뭘 더 해드립니까?”
“조선소 받고 제철소 추가. 됐나?”
안정우는 태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세. 내가 이참에 자네한테 귀찮게 달라붙는 똥파리들 전부 떼어줄 테니까.”
그제야 태수는 걸음을 옮겼다.
촤촤촤촤촤촤.
안정우와 태수, 그리고 안소정 뒤로 각 부처의 장관과 청와대 인사들이 줄지어 따랐다.
그들을 축복하는 것처럼 카메라 세례가 쏟아졌다.
태수와 안정우가 나란히 이동하는 장면은 전국 생방송으로 나갔다.
안정우는 태수의 손을 들어 올리며 크게 웃었다.
안정우가 의도한 결과였고, 태수가 용인한 상황이다.
그 옆을 딸 안소정이 지켰다.
‘안정우 대통령과 강태수 회장이 끈끈한 사이라더니.’
‘설마 안정우 대통령이 사윗감으로 강태수를 찍었단 말인가?’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자들은 차고 넘쳤다.
정치권 인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재벌 총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삼청그룹 총수 이병춘은 헛웃음을 흘렸다.
‘강태수, 정말 대단한 놈이야. 나 이병춘의 머리 위를 한 번에 뛰어넘다니.’
호랑이 한청호가 버티고 서 있던 청일 그룹을 단숨에 먹어치울 줄이야.
이병춘은 여태 한 번도 재계 서열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강태수가 한경련에 모습을 드러낸 지 불과 1년도 채 안 되어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듣도 보도 못했던 안정우를 대통령으로 만든 수완에다, 석유까지 손에 쥐었으니.’
이병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삼청은 절대로 태양을 넘어설 수 없겠구나.’
마음이 꺾이자 기력이 쇠한다.
근래 병색이 짙어져 잔기침을 내뱉는 이병춘이다.
이건후가 아버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버지, 두고 보십시오. 삼청은 언제고 반드시 태양을 뛰어넘을 겁니다. 제가 더 분발하겠습니다. 세계 시장은 크고, 기회는 많습니다.”
“그래야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병춘은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눈앞에 나타난 거물을 보고도 아들은 기죽지 않았다.
그게 못내 흐뭇하고 대견했다.
“너와 강태수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갈 것이다. 벌써부터 삼청의 앞날이 기대되는구나.”
이병춘은 세상을 다 가진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한 아버지가 옆에 서 있었다.
장준용이었다.
‘설마 우리 태수가 나 말고 안정우를 대통령으로 밀던 이유가… 여자 때문이었나? 그럼 우리 서연이는?’
장준용은 소리 없이 아우성 쳤다.
장준용의 막내딸 사랑을 누가 모르랴.
김 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지나간 버스예요. 차라리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게 더 낫습니다. 회장님께서 차기 대통령이 되면 되잖습니까?”
그럼 저쪽은 전직 대통령 딸, 서연 아가씨는 현직 대통령 딸.
김비서는 장준용의 팔을 잡아끌고 만찬장으로 향한다.
김 비서는 씁쓸한 눈으로 태수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러니까 몰리브덴 광산 굴리던 때에 잡으라고 잔소리 했잖습니까. 이젠 우리가 청탁해야 할 위치라고요.’
기회는 올 때 잡았어야 했다.
* * *
청와대 만찬장은 평소보다도 훨씬 화려했다.
정재계 인사들과 각 부처 장관급 인사들만의 파티였다.
또한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각국의 대사들까지 모였다.
사우디 대사는 안정우에게 왕실의 선물과 서신을 전달한 후, 태수 앞에 섰다.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강. 이건 라흐만님께서 따로 보내신 서한입니다.]
사우디 대사가 주는 편지를 열어보았다.
라흐만의 멋들어진 필체가 돋보이는 글이었다.
<진짜로 유전이 터졌다며? 축하한다. 이제 대한민국도 OPEC 가입 해야지. 사우디로 한 번 놀러와. 이번엔 아버지가 직접 OPEC 친구들을 소개하시겠다고 벼르고 계신다.
PS. 엘리스 록펠러도 데려오겠다면 내가 전용기 띄운다.>
태수는 피식 웃으며 사우디 대사에게 말했다.
[조만간 한 번 만나자고 전해주십시오.]
그때였다.
청와대 만찬장이 크게 웅성대기 시작했다.
“미국 대사와 함께 입장한 사람들 말이야. 혹시 록펠러 가문 사람들인가?”
“그때 금산 호텔에서 강태수 회장과 같이 있던 여자가 확실하군.”
“저 젊은 외국인 남자는 누구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돈 냄새 봐라.’
거리가 이렇게 먼 데도 코를 찌르는 돈 냄새.
독한 향수 원액을 드럼통으로 쏟아 부어도 이정도로 짙은 냄새는 안 나겠지.
대체 누가 이렇게 돈 냄새 마구 쏟아내면서 다닐까 궁금해졌다.
남자가 태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크리스 록펠러입니다. 여기 엘리스의 큰 오라비 됩니다.]
[반갑습니다. 강태수입니다.]
크리스 록펠러라면 태수도 들어본 이름이다.
‘전생에서 록펠러 가주였던 자로군. 주식 투자에 밝아 워랜 버프와 함께 세계 주식시장을 장악했다고 일컬어졌지.’
그러니 이렇게 질식할 것처럼 돈 냄새를 흘리고 다니지.
태수는 크리스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차기 록펠러 가주에 가장 유력한 사람입니다. 엘리스 대신 저와 거래하시죠.]
돈 냄새가 태풍처럼 몰아쳤다.
엘리스가 사색이 되어 크리스의 팔을 잡았다.
[오빠!]
[엘리스가 무엇을 약속했던 간에 제가 그 열 배를 지불하겠습니다.]
돈을 들이 붓는구나.
태수는 숨통이 막히고 어지러워 잠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때 엘리스가 와락 태수의 손을 잡았다.
[난 크리스 오빠가 절대로 내어줄 수 없는 것을 주겠어요.]
뭐지?
지금껏 맡지 못했던 돈 냄새가 엘리스에게서 풍겨 나왔다.
심지어 크리스조차 지금 엘리스가 내뿜는 돈 냄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