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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찍고 건설 재벌-226화 (226/230)

226화 한일권의 몰락(3)

청일 그룹 본사 11층에 위치한 회장실.

홀로 남은 태수는 말없이 책상을 손으로 쓸었다.

감회가 남달랐다.

‘오랜만이군.’

옛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전생에서 태수는 무려 25년 동안이나 이 책상에서 그룹 총수 업무를 보았다.

신입 비서로 입사한 이래 청일 그룹 본사 회장실을 40년 넘도록 드나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명패의 주인은 한 씨 성을 갖고 있었다.

<청일 그룹 회장 한일권>

과거의 것과 똑같은 명패였다.

한일권은 명패마저 챙기지 못하고 질질 끌려 나갔으니까.

태수는 명패를 들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대신 미리 준비한 새 명패를 꺼냈다.

<태양 그룹 회장 강태수>

태양 빌딩 본사에 올린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제야 태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번 생에선 내 명패를 올리게 됐군.’

만족스러웠다.

태수는 흐뭇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한청호는 사용하던 의자까지 태수에게 빼앗겼다.

‘한청호, 당신이 30년 넘도록 일군 회사는 내가 잘 써 주지. 또한 당신이 지금껏 청일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모든 것 전부.’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실 한쪽 벽에 위치한 책장을 밀었다.

책장 뒤에 숨겨진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띵-

지하층 정보 보관실에 드나드는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청일 그룹 본사 지하층에 위치한 정보 보관실.

한청호가 담당 공무원 위아래로 광범위하게 뿌린 뇌물로 쌓은 기밀 서류다.

전생에 태수가 가장 공들여 관리하던 곳이기도 했다.

‘말단부터 고위직까지, 전부 요긴하게 써 주지.’

* * *

며칠 동안 대한민국 전역이 청일 때문에 시끄러웠다.

신문과 방송들은 연달아 보도 자료를 내보냈다.

<태양 그룹-청일 그룹의 강제 합병! 한국 재계 서열이 발칵 뒤집혔다>

<32년 역사를 가진 청일 그룹,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석유를 손에 쥔 태양 그룹, 어디까지 도약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뭐? 청일 그룹이 사라져?”

“어쩌다가?”

무려 재계 서열 13위에 이름을 올린 굴지의 그룹이다.

한국 전쟁 후 불타 버린 도시를 재건하면서 청일이란 이름을 알리지 않았던가.

또한 한국사에 획을 그었던 굵직한 사건마다 청일의 이름이 함께 들려오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넘어갈 정도로 문제가 큰 회사였을 줄이야.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쑥덕거렸다.

“요즘 청일에 망조가 들긴 했었지.”

“한청호가 박정환 대통령 암살 모의를 주도했다며?”

“한청호 아들까지 마약 수사에 연루됐잖아.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에 힘입어 김차열 검찰 총장이 직접 마약 수사 중간 브리핑을 했다.

-청일 그룹 전(前) 총수 한일권이 마약 유통에 연루되었음을 확인했으며.

-한일권은 한국 조직 폭력배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고, 일본 야쿠자와 마약 거래 밀수에 적극 참여한 바.

-이에 대해 검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체포, 조사 중에 있습니다.

무려 청일 그룹 2대 총수가 마약 유통에 관련되었단다.

청일 건설 사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분노해 외쳤다.

“마약 사범들은 절대로 사회에 돌려보내면 안 된다!”

“사형해라! 본보기를 보여라!”

“돈 있다고 봐주지 마라! 대통령이 직접 공언한 일이다!”

“검찰 잘한다! 이참에 뿌리까지 파헤쳐 응징해라!”

사람들이 청일에 등을 돌렸다.

시위대가 꾸려져 청일 그룹 본사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에 마약이 웬 말이냐!”

“웬 말이냐!”

“마약 전문 기업을 처벌하라!”

“처벌하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문과 방송사에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제보를 해 왔다.

<충격! 마약과 범죄로 얼룩진 끔찍한 재벌 2세의 민낯. 조직 폭력배들의 뒷배는 청일?>

<그룹 차원에서 벌어진 입막음. 피해자는 아직도 떨고 있다>

<낙태 전문 산부인과가 필요해서 청일 병원을 운영했나?>

<인생이 쉽지? 묻지 마 폭행의 끝은 돈다발과 협박이었다>

당연하게도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애비는 뇌물 전문가, 아들은 범죄 전문가!”

“꼴좋다! 범죄 소굴 청일은 진즉 망해 버려야 했다!”

청일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평소라면 신문 귀퉁이에 작게 실렸을 기사까지도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났다.

<청일 건설 부도나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한 전(前) 청일 지주 그룹이 사라지다>

<대한민국 비리와 부정축재의 상징, 청일 건설의 부도가 던진 파문>

청일 그룹 본사 앞에서 시위하던 자들이 어느새 검찰청 앞에서 시위하고 있었다.

태양 그룹 본사로 이전하면서 청일 그룹 본사가 텅텅 비었기 때문이다.

태양 그룹 본사 회의실에서는 기자 회견이 열렸다.

태수가 입을 열었다.

“우리 태양 그룹은 청일 그룹의 줄도산을 막기 위해 인수 합병이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촤촤촤촤촤촤촤촤.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태수는 입을 열었다.

“만일 태양 그룹이 부담을 떠안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청일발 연쇄 부도 사태에 직면했을 겁니다.”

무려 대한민국 재계 서열 13위 그룹이 줄도산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한국 경제에 타격이 무척 컸을 것이다.

전생에서 IMF가 재벌 18위 그룹의 줄도산으로 시작되지 않았던가.

“따라서 경영상 문제가 심각했던 청일의 지주 회사인 건설을 계열 분리했습니다.”

촤촤촤촤촤.

“또한 다른 계열사 역시 도산 직전까지 경영 상태가 악화된 만큼 대규모 감사 및 구조 조정에 착수하였습니다.”

촤촤촤촤촤촤촤촤.

“이에 따라 부실 경영의 책임을 물어 전(前) 청일 그룹 임원진들을 대규모 해임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임원진 해임은 주주 총회의 결정입니까?”

“그렇습니다.”

“전(前) 청일 그룹 임원진들이 해임과 동시에 검찰에 소환되었다고 하던데요. 혹시 뇌물 비리 사건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청일 그룹을 인수 합병하면서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되지 않았습니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일개 계열사 인수 자금을 마련하는 데도 회사 기둥뿌리가 흔들린다.

그런데 청일의 경우 무려 재계 13위인 재벌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자는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청일 그룹의 부채로 인해 태양 그룹까지 줄도산이 이어질까 두렵진 않으십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태수는 테이블 위에 올렸던 서류 뭉치를 들어 올렸다.

“우리 태양 그룹에서는 현재 석유 개발에 본격 착수했고, 석유 굴착 시설 및 송유관 건설이 한창입니다.”

촤촤촤촤촤.

“내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석유 판매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촤촤촤촤촤촤.

“청일 그룹 인수로 인해 발생한 적자를 상쇄하고도 남을 겁니다.”

사실 청일 그룹 인수로 인한 적자 따윈 없다.

청일 자동차는 경영 악화로 인해 주식 시세가 똥값이었다.

또한 청일 건설과 달리 계열사 사장들이 제일 먼저 팔아 치웠을 만큼 괄시당하는 종목이었다.

그래서 태수는 푼돈에 청일 그룹을 날름 삼켰다.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자랑해서야 되겠는가.

청일 그룹에 비난 여론이 쏟아지고 있는 만큼 태수는 더욱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태양 그룹은 다방면으로 미래를 향해 도약할 겁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많은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촤촤촤촤촤촤촤.

태수가 마이크를 내려놓으려고 할 때였다.

기자 한 명이 크게 외쳤다.

“이번 그룹 합병으로 인해 명실공히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에 오르셨습니다. 소감은 어떠십니까?”

재계 서열 13위인 청일 그룹과 재계 서열 163위인 태양 그룹이 합쳐졌다.

아슬아슬하게 삼청 그룹을 제치고 현재 재계 서열 1위로 우뚝 올라섰다.

태수는 씩 웃었다.

“대한민국으로 만족해서야 되겠습니까? 태양 그룹의 미래는 세계에서 찾게 될 겁니다.”

당당한 포부였다.

조금 전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엄청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 회견장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란 환호성도 뒤따랐다.

태수는 환호성을 뒤로하고 기자 회견장을 벗어났다.

“태양 그룹 임원진들은 모두 27층 총수 회의실로 모이십시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 송창준이 태수의 뒤를 따랐다.

김광록을 비롯한 태양 그룹 경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 태양 그룹 계열사 사장단들이 합세했다.

저벅저벅.

태수를 필두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태양 그룹 임원진들.

그 기세가 사뭇 대단하여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재빨리 길을 비켜 주었다.

홍해 갈라지듯 사람들이 갈라지고,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태양 그룹 사장단들이 걸어간다.

27층에 위치한 총수 회의실까지.

* * *

태양 그룹 본사 총수 회의실.

태수가 제일 먼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계열사 사장단들이 뒤따라 착석했다.

태수의 테이블 위에는 명패가 번쩍였다.

<태양 그룹 총수 회장 강태수>

T자 구조로 된 회의실이다.

태수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 2열 종대로 태양 그룹 계열사 사장단들이 늘어섰다.

태수가 입을 열었다.

“계열사별로 청일 그룹이 보유했던 재산과 자금 출처 등은 전부 파악했습니까?”

“예!”

“청일 그룹의 직원과 업무, 거래처와 하청 업체들까지 전부 제대로 인수인계 받았습니까?”

“예!”

“계열사별로 청일 소속 직원들 재교육 및 인사이동은 완료되었습니까?”

“예!”

“태양 그룹이 본격적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데 지장을 주지 않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좋습니다.”

만족스러웠다.

태수가 눈을 돌렸다.

“태양 정유 노일국 사장.”

“예, 말씀하십시오.”

“내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석유 판매가 시작될 겁니다. 수출 이전에 국내 내수용 원유 판매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진행 상황 보고하십시오.”

“송유관 건설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태양 정유의 원유 정제 및 저장 시설을 확충할 예정입니다.”

“주유소는 어떻습니까?”

“태양 정유는 도심 및 고속 도로 요지에 주유소 부지를 충분히 확보했습니다.”

“좋습니다.”

태수가 태양 건설 사장 박철완을 보았다.

현재 태양 그룹에서 가장 많은 일을 떠안고 있는 사람을 꼽자면 태수를 제외하고 단연 박철완이 으뜸이었다.

석유 채굴과 관련된 모든 건설 및 토목 공사를 도맡아 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태양 아파트 건설과 제주도 산업항 및 강남 개발을 동시 진행하고 있다.

‘보고할 사항이 너무 많다. 족히 20분 이상 걸리겠는데?’

하지만 태수가 제일 먼저 물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청일 건설은 현재 어디까지 부도 진행되었습니까?”

“현재 1차 부도 상황입니다. 혹시 회장님께서는 청일 건설을 인수하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원하는 건 청일 건설이 아닙니다.”

청일 건설을 원했다면 한일권에게 넘겨주지도 않았다.

“그럼 회장님께선 무엇을 원하십니까?”

태수는 다른 것을 원했다.

청일 건설이 쫄딱 망할 때 반드시 회수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나는 청일 아파트를 허물고 그곳에 태양 랜드를 만들 생각입니다.”

어차피 청일 아파트는 부실 공사의 대명사가 되어서 제대로 분양되지도 않을 터.

차라리 부숴서 다른 것을 짓는 게 나을 것이다.

‘박정환이 꺾었던 꿈을 다시 펼쳐야지.’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주는 대규모 유원지가 도심에 들어선다.

이곳은 향후 태양 그룹의 마르지 않는 현금 창출구가 될 것이다.

“또한 을지로 청일 호텔을 리모델링하여 근처에 대규모 쇼핑센터를 건립할 겁니다.”

과거 일개 제과 기업이었던 샤를롯이 재벌 기업으로 도약하게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목 좋은 곳에 위치한 호텔 샤를롯 서울과 면세점과 명품관이 늘어선 샤를롯 쇼핑 타운 덕분이었다.

이번 생에서 그 모든 것이 태수의 몫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박철완의 안색은 희게 질렸다.

‘또… 또… 틈만 나면 일거리가 엄청나게 늘어…….’

오랫동안 혹사당한 탓에 이대로라면 과로사 확정이다.

박철완이 고혈압으로 쓰러지기 전에 태수가 나섰다.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마치고 귀국한 김우진 실장이 태양 건설에 합류하여 일을 도울 겁니다.”

임원진 말석에 앉았던 인물이 벌떡 일어났다.

“김우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운 건설만으로 재벌 그룹을 꿈꿨던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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