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한일권의 몰락(1)
장내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청일의 충신들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한일권이냐, 강태수냐?’
‘굴복하면 사장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까?’
‘만일 은행과 한일권이 함께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려나?’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 자부하던 그들이 인생 최대의 속도로 머리를 굴려 댔다.
그 와중에 문제점을 발견했다.
‘청일 자동차 주식을 각각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서로 모르고 있네?’
‘한일권과 김봉남이 함께 손잡고 우리까지 전부 합세한다고 해도…….’
여태 싸우느라 아무것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일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합시다!”
“맞는 말입니다. 어느 계열사가 청일 자동차 지분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또 강태수 회장이 진짜로 청일 자동차 지분을 49%나 소유하고 있는지 확인부터 합시다.”
속셈이 뻔했다.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하겠다는 뜻.
그들 입장에서야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과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수에겐 개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봐요, 강 회장!”
“최소한 우리를 설득하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당황스러운 상황이란 거 아십니까? 억지로 밀어붙이기만 한다면 관계가 악화될 뿐이란 것을 왜 몰라요?”
태수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다.
“설득은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겁니다. 다시 묻죠.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모두 입을 다물었다.
태수는 현재 절대 우위에 서 있다.
정보, 지분, 영향력까지 모두 다.
탁.
하지만 태수는 서류 봉투를 들어 청일 그룹 임원들 앞에 내던졌다.
청일의 충신들이 달려들어 재빨리 서류 봉투를 뒤졌다.
“이럴 수가! 진짜 청일 자동차 지분을 49%나 확보했잖아?”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회의장이 경악성으로 가득 찼다.
전(前) 청일 중장비 사장이던 이창원, 그리고 전(前) 청일 정유 사장이던 노일국.
그들의 표정은 참으로 착잡해 보였다.
‘청일의 충신을 자처하는 자들의 민낯이 이리도 추악하다니.’
‘이런 놈들에게 그동안 오래도록 밀려 서러웠었는데.’
‘개 같은 놈들.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개싸움을 하는구나.’
‘똥통 같은 청일에서 나와 태양으로 가길 잘했다.’
태수가 손목시계를 보며 선언했다.
“1분 드리겠습니다. 결정하시죠.”
“자, 잠깐만! 우리도 생각할 시간이……!”
“40초 남았습니다.”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마음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자기 자리에 앉으세요.”
다들 멱살 잡고 서 있으니 구분이 안 된다.
청일의 임원진들이 재빨리 테이블에 놓인 제 명패를 확인했다.
지주회사였던 청일 건설 대주주들에게만 특별히 지급된 임시 명패였다.
“15초 남았습니다.”
후다닥.
너 나 할 것 없이 전력 질주한다.
안경이 떨어져도 주울 시간이 없다.
구두가 벗겨져도 고쳐 신을 시간이 없다.
어떻게든 쫓겨나지 않으려면 이것저것 잴 시간 따윈 없었다.
그저 본능대로 강자에게 붙는 것을 선택했다.
‘어차피 쫓겨날 거, 마지막 도박은 해 봐야지.’
‘청일에 충성해 봐야 알아주나? 충성도 떨어질 콩고물이 있을 때나 하는 거지.’
‘이 바닥에 의리가 어디 있어?’
회의장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모두 자리에 앉은 후, 남겨진 회의장에 서 있는 사람은 한일권과 김봉남뿐이었다.
한일권이 주먹을 꽉 쥐며 으르렁댔다.
“청일의 충신을 자처하는 놈들이! 한 번을 망설이지 않고 배신해?”
김봉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하니 정말로 전부 강태수한테 붙어 버릴 줄이야.’
둘이 합쳐 15%라면 대주주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경영권 간섭은 힘들다.
권토중래는 불가능해졌다.
“3, 2, 1. 시간 끝났습니다.”
태수가 손목시계에서 눈을 뗐다.
덩그러니 서 있는 한일권과 김봉남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두 분은 새롭게 청일 그룹의 지주 회사가 된 청일 자동차의 대주주이니 회의장 밖으로 쫓아내진 않겠습니다.”
퍽이나 너그러운 선언이었다.
그 뜻은 매우 분명했다.
-똑바로 지켜봐라. 네 눈앞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 줄 테니까.
도망가지 말고 끝까지 모든 것을 보라는 소리다.
한일권의 표정은 굴욕으로 더욱 크게 일그러졌다.
꽉 쥔 주먹에선 피가 흘렀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도 아픈 줄 몰랐다.
한일권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강태수, 네놈이 진짜로……!”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간다.
한일권이 앉았던 총수 자리를 태수가 차지했다.
태수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청일 그룹 차기 총수를 선출하겠습니다.”
“야, 강태수!”
“회의 시간이 많이 지체된 이유로 최대한 간단히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강태수! 네가 청일 그룹 차기 총수에 대해 논할 말이 어디 있어?”
한일권이 달려와 태수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태수는 탁 소리가 나도록 한일권의 팔을 후려쳤다.
한일권은 신음을 삼키며 팔뚝을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나타난 김광록이 한일권의 뒷덜미를 달랑 들고 질질 끌었기 때문이다.
“이거 놔! 안 놔?”
한일권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김광록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시죠.”
김광록이 잇몸까지 드러내며 씩 웃는다.
이쪽은 상관하지 말고 계속하라며 손짓으로 재촉한다.
태수는 회의를 속행했다.
“나 강태수가 차기 그룹 총수가 되길 바라시는 분은 거수.”
한일권이 김광록에게 잡혀 버둥대면서도 악을 썼다.
“다른 그룹 총수는 청일 그룹의 총수가 될 수 없어!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다!”
태수는 코웃음 쳤다.
“정관에 그런 조항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까지 일일이 정관 규약 사항으로 적어 놓겠냐고!”
“적어 놓지 그랬나. 난 법대로 해.”
태수는 한일권이 선언한 그대로 돌려줬다.
법대로.
참 편리한 말이 아닌가.
“강태수! 이건 아니지! 네놈이 어떻게 청일 그룹 총수 자리를 넘봐?”
한일권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청일의 충신들! 네놈들이 이런 걸 바라고 날 내쫓았나? 모두 한통속으로 청일을 팔아먹어? 이런 배신자 새끼들!”
침묵이 내려앉았다.
청일의 충신을 자처하던 자들이 일제히 한일권을 외면했다.
태수는 말했다.
“동의하는 분, 거수하십시오.”
청일의 임원진들은 누구도 손들지 않았다.
하지만 강태수와 이창원, 노일국만이 손들었다.
청일의 임원진들은 감히 태수는 건들지 못하고, 이창원과 노일국을 향해 노성을 터뜨렸다.
“네놈들이 왜 여기서 손들어?”
“청일에서 나갔으면 청일의 집안일에 끼어들 자격 없지!”
이창원과 노일국은 쌍둥이처럼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잊으셨나 본데.”
“우리도 청일 자동차 대주주입니다만.”
“청일 정유 사장으로 다닐 때 연봉 대신 청일 자동차 주식으로 퉁 쳤던 거 모르시나?”
“청일 중장비가 인수 합병되면서 청일 중장비가 보유했던 청일 자동차 주식까지 통째로 넘어간 거 잊으셨나?”
까먹었다.
그러고 보니까 저놈들도 청일 자동차 주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다 싶다.
그만큼 청일 자동차 지분은 계열사마다 골고루 뿌려졌으니까.
“그래서 네놈들은 얼마나 가지고 있어?”
“1% 갖고 있습니다.”
“저 역시 1%.”
그래서는 안 됐다.
청일의 임원진들의 눈이 격하게 요동쳤다.
‘강태수가 49%인데, 이놈들이 합세하면 51%잖아?’
강태수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51% 과반의 동의를 얻어 나 강태수가 차기 청일 그룹 총수가 되었음을 선언하겠습니다.”
이럴 수는 없다!
청일의 임원진들은 입을 떡 벌렸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김봉남은 허탈하게 웃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죽 쒀서 개 줬군. 하하하.”
조금 전까지 서로 물어뜯던 청일의 임원진들은 입을 다물었다.
김봉남의 심정이 딱 그들의 심정이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침통한 얼굴로 청일의 임원진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태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청일 건설 사장이었던 이문복이 해임되고, 청일 건설 사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군요.”
태수가 한일권을 보며 씩 웃었다.
“청일 건설 총수로서 청일 건설 차기 사장으로 한일권을 임명하겠습니다.”
김광록에게 제압당한 채 한일권이 소리를 질렀다.
“청일 건설 사장? 네 마음대로 날 임명해?”
“거부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청일 건설조차 내게 빼앗길 생각인가?”
“그, 그건……!”
한일권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청일 그룹에 매달린 썩은 포도알이라도 되어야 나중에 포도송이 전체를 썩게 할 수 있다. 손 놓고 있다가는 전부 빼앗기고 말아!’
태수가 어찌 한일권의 속셈을 모르겠나.
‘네 욕심이 너를 망하게 할 것이다.’
청일 건설은 반드시 부도날 테니까.
“한일권, 차기 청일 건설 사장에 동의하시는 분 거수.”
태수, 이창원, 노일국.
이렇게 태양 그룹 식구들 세 명만 손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로써 차기 청일 건설 사장은 한일권이 되었습니다.”
자, 어디 한번 제대로 시작해 볼까?
“이어서 청일 그룹 총수로서 청일 건설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겠습니다.”
“처분은 무슨 처분?”
고작 지분 8%인 한일권의 목소리는 당연히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주주 총회는 주식 많은 놈의 뜻대로 흘러가게 되는 법이다.
이런 결과가 싫었으면 애초에 진즉 주식 방어를 신경 써야 했다.
“그간 각 계열사가 청일 건설의 적자를 떠맡았던 부분, 청일 건설이 도로 책임지고 채무액을 가져가야 합니다. 동의하시는 분 거수.”
꽥꽥대는 한일권의 입을 김광록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번에도 세 사람만 손을 들었다.
“통과. 이번 주까지 청일 건설 적자는 청일 건설이 책임지십시오.”
각 계열사가 나누어 감당하던 막대한 적자가 청일 건설 어깨 위에 올려졌다.
청일의 임원진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청일 건설이 그 많은 적자를 다 어찌 감당하겠어. 청일 건설 부도는 피할 수 없게 됐군.’
‘애초에 지주 회사를 전환한 이유가 청일 건설 부도로 끝낼 작정이긴 했지만.’
‘남의 손에서 이렇게 회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을 보니 참 씁쓸하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주 회사를 통째로 빼앗겼다.
그룹 전체의 실권을 빼앗기고 떨어지는 처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저 모든 것이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또한 청일 그룹 총수로서 청일 건설 계열 분리를 안건으로 상정하겠습니다. 계열 분리에 동의하시는 분 거수.”
일사천리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것으로 청일 건설 계열 분리 안건은 통과되었습니다. 이번 주까지 청일 건설 계열 분리 작업을 끝내도록 합시다.”
한일권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럴 수는 없어!”
포도송이 전체를 썩게 할 썩은 포도알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강태수는 기어이 썩은 포도알만 잘라 버렸다.
‘안 돼! 이건 악몽이야!’
태수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태수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청일 그룹의 인수 합병에 관해 논의하겠습니다.”
“인수 합병이라니!”
“청일 그룹을 태양 그룹에 강제 합병할 생각입니다. 합병 이후 그룹 상호명은… 계속 태양 그룹이라 하겠습니다.”
청일 그룹이 재계 서열 13위, 태양 그룹이 재계 서열 163위다.
보통 이런 경우 브랜드 파워가 큰 청일 그룹 이름으로 통합되거나, 태청 그룹, 혹은 태양청일 그룹 등으로 이름을 각각 따와서 쓰기도 한다.
하지만 태수는 일방적으로 청일의 이름을 지워 버렸다.
“뭐라고? 태양 그룹? 청일을 태양 그룹으로 바꿔?”
한일권은 급기야 게거품을 물 수밖에 없었다.
태수는 씩 웃었다.
“한청호의 청, 한일권의 일. 내가 청일 그룹의 이름을 단 한 글자라도 남겨 놓을 것 같나?”
“강태수!”
“이제 꺼져. 네놈이 알아야 할 일은 전부 알려 줬으니까.”
말 끝나기가 무섭게 김광록이 한일권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간다.
한일권이 안간힘을 쓰며 버둥댔지만 김광록의 발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강태수! 두고 보자! 내 오늘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
한일권이 회의장 밖으로 끌려가고.
쾅.
회의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태수는 김봉남을 싸늘하게 보았다.
“청일 화학 사장 해임안도 의결할까?”
김봉남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 *
쿠당탕탕.
김광록은 한일권을 청일 그룹 회장실에 내동댕이쳤다.
“젠자아아앙-!”
한일권은 바닥을 요란하게 굴렀다.
김광록이 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책상 정리해.”
“뭐?”
“우리 회장님이 들어올 곳이니까 먼지 한 톨 남기지 말고.”
기가 찼다.
안 그래도 부글대는 속에 염장을 제대로 지르고 있다.
“네 물건 챙기자마자 이 건물에서 꺼져. 10분 준다.”
“하! 그렇게는 못하겠다면?”
한일권이 김광록을 매섭게 노려봤다.
김광록은 주먹을 우두둑 풀면서 씩 웃었다.
“1분에 한 대씩이다.”
참고로 김광록의 주먹 한 대 맞고 뼈마디 무사한 놈은 여태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