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운명의 주주 총회(5)
태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뜻인지 다들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태수가 확보한 청일 지주 회사 지분이 무려 49%.
청일의 경영권이 위협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믿을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충격과 경악이 휩쓸고 지나간 회의장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너무 황당하면 외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태양 그룹 총수가 청일 그룹 대주주라니!’
‘아니, 그냥 대주주 정도가 아니라 최대 주주야!’
‘그럼 청일 그룹은……!’
한일권은 태수에게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너……! 너, 강태수……!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기분이었다.
“네가 청일 자동차 지분을 왜 이렇게 많이 갖고 있어! 거짓말하지 마!”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청일 자동차는 유독 지분이 분산된 계열사긴 하지. 하지만 주식 시장에 내놓은 지분을 전부 긁어 왔다고 하더라도 49%는 못 모아!”
정신이 나갔던 건 회의장에 모인 자들도 마찬가지였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
한일권을 물어뜯던 청일의 충견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청일은 재계 서열 13위 재벌 그룹이야! 그에 반해 태양은 고작 재계 서열 163위고!”
“그런 태양이 청일을 잡아먹겠다고?”
“주제를 알아야지! 차라리 태양이 청일에 먹힌다면 몰라도!
태수는 피식 웃었다.
“부정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김봉남이 이를 갈았다.
성북동 대운각에서 태수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한일권은 총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겁니다.
-청일 그룹 지주 회사를 청일 자동차로 옮기는 겁니다.
-제가 힘을 실어드리겠습니다.
“강태수, 네놈이 감히 나를 속여? 나를… 나를……!”
차기 총수로 밀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이문복에게서 얻어 낸 청일 자동차 주식 4%가 있다며!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네놈이 어떻게 청일 자동차 지분 49%를 확보했겠어? 뻔하지!”
김봉남의 말에 청일의 임원진 모두가 집중했다.
김봉남은 비릿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나를 한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계산했기에 나온 수치 아니겠나?”
김봉남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쏟아 냈다.
“청일 화학이 7%, 청일 유통이 5%, 청일 해운이 6%, 청일 전자가 6%, 청일 전기가 4%, 청일 식품이 3%, 청일 목재가 2%, 청일 창호가 2%, 청일 방직이 1%, 청일 패션이 2%, 청일 일보가 2%! 총 40%!”
김봉남이 차기 총수 자리를 노리면서 확보해 둔 아군들이다.
“네가 이문복을 통해 확보한 지분이 4%, 그렇게 44%야! 거기에 시중에서 은밀하게 사들인 지분이 5%라는 거 아니겠어?”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기막힌 일이 생길 수 있겠나.
그래서 김봉남은 자신 있게 웃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지.”
김봉남은 자신을 보고 있는 청일의 임원진들을 보며 말했다.
“한 회장 일가가 보유한 지분이 15%에 우리 청일 임원진의 주식 40%를 더한다면? 모두 55%!”
벌써 50%가 넘는다.
그 소리를 듣고 한일권이 크게 웃었다.
“클클클,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군.”
이제야 저 말도 안 되는 계산법의 실체가 드러났구나.
김봉남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아무리 내가 차기 총수 자리에 욕심을 낸다고 하더라도! 내 청춘, 내 인생을 모두 갈아 넣은 청일을 넘기면서까지 앉을 자리는 아니지!”
그 말에 청일 임원진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청일의 일은 청일이 알아서 한다. 그러니까 태양 그룹 총수는 꺼져라!”
“이제 보니 가증스러운 놈이었군. 남의 회사 집안싸움이나 부추긴 주제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라. 청일은 절대로 태양에 먹히지 않아!”
한일권이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봤나? 강태수! 청일은 결코 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청일이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었다.
태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태수가 품에서 서류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장수 은행, 한세 은행, 대홍 은행, 세광 은행, 토건 은행, 정일 은행, 미주 은행, 도경 은행, 광명 은행, 태상 은행, 목마 은행.”
장수 은행 빼고 전부 태수가 휘어잡고 있는 은행이었다.
태수가 인수한 외국 은행들이 투자하여 도산 직전의 국내 은행 여러 곳을 인수했다.
금산분리, 혹은 은산분리라 불리는 정책으로 인해 재벌 그룹이 은행을 직접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수는 이런 우회적인 방법으로 은행을 굴리고 있었다.
“내게 청일 자동차에 대한 의결권을 위임한 은행입니다.”
태수가 은행이란 이름 뒤에 숨어 청일 자동차 지분을 거둬들였다.
말 그대로 차명 주식.
그뿐만이 아니다.
“청일의 오너 일가가 소유한 주식이 과연 15%나 될 것 같습니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김봉남을 비롯해 청일 임원진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한청호 회장이 청일 호텔과 청일 아파트 건설 자금이 부족해 청일 자동차 주식 일부를 처분한 것을 모르나 보군요.”
“뭐라고?”
“초명 은행에 청일 자동차 지분 7%를 넘겼죠. 그것을 제가 인수했습니다.”
모두 놀란 눈으로 태수를 보았다.
한일권의 눈동자마저 지진이 날 듯 요동쳤다.
“거기에 따로 시중에서 청일 자동차 주식을 사들이고, 이번에 이문복을 통해서 4%를 추가 확보한 겁니다.”
태수가 하나씩 보여 주던 서류 봉투를 탁 소리 나도록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해서 모두 49%.”
회의장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11군데나 되는 은행이 강태수에게 위임장을…….’
‘이렇게 되면 진짜로 강태수가 청일 그룹을…….’
‘이렇게 청일이 사라지는 건가.’
청일의 임원진들이 체념한 표정으로 연신 한숨을 내쉰다.
김봉남은 악을 썼다.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김봉남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번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너 일가가 주식을 좀 처분했기로서니 우리가 크게 뒤지는 건 아닙니다!”
힘없는 눈동자가 김봉남에게 향했다.
김봉남만은 악으로 깡으로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청일 화학을 포함해 우리 청일 그룹 임원진의 주식이 40%입니다. 거기에 오너 일가의 주식이 8% 아닙니까? 고작 1% 차이란 말입니다!”
“1%? 그, 그렇게 되는군.”
“심지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다른 계열사 사장님들이 보유한 주식까지 전부 긁으면…….”
김봉남과 뜻을 같이하는 계열사 사장들만으로 40%를 만들었다.
다른 그룹 계열사들도 청일 자동차 주식을 보유하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득 김봉남은 위화감을 느꼈다.
‘계산이… 이상한데?’
김봉남은 뒷말을 잊지 못했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여유롭게 웃고 있는 태수.
김봉남은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마침내 깨달았다.
“강태수가 보유한 주식이 49%, 우리가 보유한 주식이 최소 48%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시중에 풀린 주식을 다 긁어도 3%밖에 안 될 리가 있나.
곧 잘못된 결론을 내린 원인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야? 대체 어디서 주식이 샌 거야?”
김봉남이 청일의 임원진들을 씹어 먹을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본다.
“누가 다른 그룹 총수에게 청일 자동차를 팔아먹었어? 너야? 아니면 너야?”
“거, 말이 심하시네!”
김봉남의 무례한 눈초리에 청일 계열사 사장들이 벌떡 일어났다.
바야흐로 청일의 충견끼리 개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전(前) 청일 그룹 총수도 가만히 있는 판에 네놈이 뭔데 나서서 비난이야?”
“지금 청일이 태양 그룹에 넘어가게 생긴 상황이야!”
“이미 청일 건설 적자 때문에 줄도산 나게 생겼다고 주장한 건 김봉남 네놈이 아닌가?”
“뭐? 네놈? 지금 말 다했어? 그래서 청일 자동차 주식 팔았어, 안 팔았어?”
“팔았다! 어쩔래?”
청일 계열사 사장들과 김봉남, 한일권이 서로를 향해 핏대를 세우며 욕설을 날리기 시작했다.
“청일 자동차 주식을 팔아? 왜 그런 중요한 일을 상의도 없이……!”
“흑자를 만들어 놔도 호텔과 아파트 짓는다고 그룹 본사에서 다 긁어 가고, 정작 보유 자금 없어서 부도 직전일 때는 나 몰라라 하고!”
“총수가 경영을 개판으로 해서 계열사만 타박하는데 어쩌라고? 직원들 월급은 챙겨 줘야 할 것 아냐!”
“그래서 지금 잘했다는 거야?”
“못한 건 또 뭔데? 청일 자동차 주식이 나한테만 있냐? 왜 나한테 지랄이야?”
* * *
와그작.
태양 그룹에서 나온 사람들은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이 상황을 지켜봤다.
어느새 안정우와 검찰 청장에게도 팝콘과 콜라 하나씩 내어놓는 김광록.
콜라를 마시며 안정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청일이 이 정도로 개판인 줄은 몰랐군.”
“예, 당선인께서 오시기 전에도 이렇게 싸우더군요.”
“청일의 충신들은 오너 일가 대신 감옥까지 들어갈 정도로 의리가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옛말이 됐나 봅니다. 지금은 자기들끼리 서로 잡아먹지 못해 이 난리니.”
안정우가 슬쩍 태수를 보았다.
‘이 친구도 참. 지금 이 꼴을 보려고 일부러 지분 49%를 들먹였군.’
태수에게 미리 언질 받은 안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다 싶다.
하지만 태수가 오래전부터 청일을 향해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을 안정우가 어찌 모르겠는가.
‘청일의 충견이 주인을 물어뜯게 한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정말로 그렇게 만들어 놓는군.’
안정우는 혀를 내 둘렀다.
태수가 공언해서 이뤄지지 않은 일이 없었다.
‘이렇게 재계 서열 13위 재벌 그룹을 통째로 먹어 치울 줄이야. 대체 강태수는 얼마나 오래전부터 지금 이 순간을 준비해 온 것일까.’
안정우는 꽤 오래전부터 강태수가 청일 자동차 주식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청일의 지주 회사인 청일 건설이 아니라 청일 자동차인지 몇 번이나 물었다.
그때마다 태수는 똑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난 청일 자동차를 빼앗아 올 생각입니다.
단순히 태양 그룹에 존재하지 않는 계열사를 하나 더 만들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
청일에 악감정이 많아서 청일 자동차를 공격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청일 자동차를 통해 청일 그룹 전체를 꿀꺽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생각할수록 감탄이 나온다.
알수록 철저하다.
‘강태수, 정말 대단한 놈이구나. 모두 이놈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어.’
내 사위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는데 말이야.
오래전부터 장말동은 태수를 사위로 들이자고 그리 침을 튀겨 댔다.
마음 같아서는 안정우 역시도 태수를 사위로 들이고 싶었다.
‘둘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영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욕심이 든다.
사랑하는 남자와 맺어지는 게 딸의 행복이기에 욕심을 참고 참는다.
그럴수록 강태수는 점점 더 손에 잡히지 않는 거물이 되어 가고 있다.
* * *
김봉남과 청일의 임원진들이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을 잡고, 몸싸움을 하며 바닥을 구른다.
태수는 청일의 개싸움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한일권이 싸움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태수를 노려봤다.
“강태수, 네놈이……!”
전부 강태수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 이 꼴이 된 것도, 청일의 충신들이 저리 서로 싸우는 것도.
강태수가 주주 총회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총수 자리에서 쫓겨나는 순간을 놓칠 수야 없지.
-네가 갖고 있는 것, 목숨처럼 소중한 것,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 난 그런 것들을 빼앗아 올 거야.
-너 역시 속수무책으로 내게 빼앗기게 될 거다.
한일권이 주먹을 쥐고 태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사이다와 쿠키를 먹고 있던 김광록이 슬쩍 한일권의 발을 걸었다.
쿠당탕탕.
한일권이 볼썽사납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소리에 청일의 충신들이 싸움을 멈추고 이쪽을 주시했다.
“주목.”
싸움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태수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기회? 무슨 기회?”
“제가 가진 지분이 49%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그것도 대부분 은행에서 위임받아 채워진 지분이지요.”
개싸움을 벌이던 자들이 솔깃했다.
‘은행이 등 돌리면 도로 빼앗아 올 수 있는 지분이구나.’
‘강태수의 경영권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강태수 역시 여차하면 뒤흔들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라는 소리군.’
정확한 사정을 알고 있는 안정우만이 속으로 실소를 지었다.
‘이런, 강태수가 오늘 작심했군. 대체 청일을 어디까지 부숴 놔야 만족할지 모르겠어.’
태수는 주식이 든 서류를 흔들었다.
“내게 충성을 맹세하며 청일 자동차 지분을 내어놓을 사람, 있습니까?”
캐스팅보트(Casting Vote).
단어는 합의체의 의결에서 가부가 동수일 경우 의장이 가지는 결정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보통 쌍방이 비등한 경우 소수의 제3세력에 의해 사안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겁니다.”
이 소리가 무슨 뜻이겠나.
‘청일을 배신하고…….’
‘충성을 팔아 목숨을 구걸하라는 뜻…….’
한일권이 보는 앞에서 청일의 배신하라는 엄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