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219화 (219/230)

219화 운명의 주주 총회(1)

서울 중앙 지방 검찰청.

차장 검사 한 명이 길 안내를 자처하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청일 장학 재단에서 후원했던 검사가 어느덧 차장 검사 자리까지 올랐다.

아버지 한청호가 뿌려 둔 씨앗은 착실하게 커서 열매를 맺었다.

그걸 한일권이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취조실 문 앞에서 검사는 말했다.

“검찰총장께서 예의 주시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제 능력으로는 10분 정도밖에 시간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거면 충분해. 오프 더 레코드, 아시죠?”

“물론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일권이 취조실 안으로 들어갔다.

취조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수그린 남자가 보인다.

“이것 참 유감이야. 그치?”

한일권의 서늘한 목소리에 이문복이 고개를 들었다.

초췌해진 안색이었다.

“회, 회장님!”

“뻔뻔하게 아직도 회장 소리가 나와?”

그래도 이문복이 매달릴 사람은 한일권밖에 없었다.

“도와주십시오!”

“돈은?”

“제가 여기서 나가면……!”

“돈!”

이곳을 찾은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잃어버렸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 그건…….”

“아니지?”

“…….”

“아니어야 할 거야.”

한일권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이문복의 눈동자가 맹렬하게 굴러다녔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끈 떨어진 신세가 되면 안 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힘 있고 돈 있는 자는 큰 죄도 무마할 수 있다.

그게 권력이고, 그게 세상의 이치다.

“아닙니다! 돈 안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잘 숨겨 뒀습니다.”

“불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저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 여기서 빼 주시면…….”

“쯧쯧, 틀렸어. 협상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한일권이 혀를 찬다.

“배임, 횡령죄까지 추가한다. 거기에 하나 더, 청일 법무부 불러서 네 인생 제대로 조져 준다.”

한일권이 눈을 반달로 휘며 웃었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줄까? 물론 네 가족까지 전부 다. 일본에 있다지?”

“회장님!”

“왜? 내가 못할 것 같아?”

“사, 살려 주십시오!”

한일권이 책상 위에 구둣발을 올렸다.

“불어. 내 돈, 어디에 숨겼어?”

이문복은 마른침을 삼켰다.

* * *

서울 중앙 지검을 나와 차에 오르는 한일권.

장 비서까지 조수석에 앉자 차가 출발한다.

장 비서는 뒷좌석에 앉은 한일권의 기색을 힐끔대며 살폈다.

한일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덩치가 꼭 태양 그룹 경호실장 같다고? 설마 강태수가…….’

찝찝하다.

‘일본 야쿠자가 연루된 루트야. 그 일본 놈이 특별히 덩치 크고 실력 좋은 야쿠자를 구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왜 이리 불안하단 말인가.

‘이문복 꼬리에 사람을 붙여 놨는데도 밀항하려던 건 몰랐다. 그런 일을 강태수가 어떻게 알고?’

아닐 것이다.

그놈 수완이 아무리 좋아도 불가능해.

한일권은 고개를 저었다.

‘강태수……!’

강태수 생각만 하면 이가 갈렸다.

첫 대면부터 재수가 없었고, 만날 때마다 염장을 지르는 새끼.

‘나 한일권이 어디 가서 기세로 밀린 적이 없었는데.’

한경련 재벌 총수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대거리를 하던 한일권이다.

나이 따위 안중에도 없고, 성별 역시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세상은 약육강식이고, 한일권은 강자였으니까.

그런 한일권이 강태수 앞에서만큼은 쪽을 못 쓰고 있다.

한경련에서 강태수의 위상을 똑똑히 확인했으니 더 밉다.

다시 생각해도 쪽팔리고, 생각할수록 분하다.

“어디로 갈까요?”

“성북동의 대운각으로 가자.”

아버지가 즐겨 이용하던 고급 요정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은행장들 전부 불러.”

아버지가 공들여 뿌린 씨앗을 거둬들일 때다.

장 비서는 한숨을 쉬었다.

“한 회장님이 불러들였을 때도 갖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간 은행장들입니다. 어떤 일로 부르는지 짐작할 텐데, 그들이 순순히 오겠습니까?”

“안 그러면 개 같은 일들이 청일 일보를 통해 알려지게 될 거라고 전해.”

한일권은 눈을 번뜩였다.

아버지가 뿌린 씨앗을 수확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거둬들이면 그만이다.

“내가 어떤 손속을 지녔는지 똑똑히 확인하고 싶지 않으면 모여야 할 거야.”

한일권의 방식은 아버지에 비해 훨씬 더 포악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 * *

성북동 대운각.

태수와 만났던 그 룸에서 김봉남은 청일 친구들을 만나고 있었다.

술 한잔하면서, 태수가 남긴 서류를 돌려보면서.

“심각하군.”

“청일이 언제 부도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상황이 이 지경인데 대체 총수란 자가 뭘 했느냔 말이야.”

보면 볼수록 기가 찬다.

김봉남은 청일의 충신들을 살펴보며 태수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러자 그 말은 놀랍도록 잘 먹혔다.

처음 청일 건설을 부도내자고 제안했을 때 펄쩍 뛰던 자들이 마지막에 와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청일 건설만 떼어 내 버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지주 회사는 청일 자동차가 제격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청일 그룹이 이대로 무너지는 꼴을 볼 수는 없으니.”

모두 김봉남의 전철을 밟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들과 김봉남은 조금 달랐다.

‘청일 자동차라고? 하필이면 그것만 차명 주식 대부분을 처분했는데.’

‘한 회장님께서 끌려간 후 본사 지원이 없어서 청일 자동차 주식 넘긴 걸로 부도 위기 한 번 넘기느라.’

‘다른 계열사들이 잘 간수하고 있겠지, 뭐.’

계열사 골고루 나눈 청일 자동차 지분이 아닌가.

어차피 시중에도 뿌려지고, 계열사에도 뿌려지고, 한청호 일가가 가진 지분도 쥐꼬리만 하고.

석유 파동 이후 연이어 계열사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보유 자금은 동난 지 오래다.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현금 유동성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보고를 올릴 한청호마저 감옥에 들어갔고, 한일권은 계열사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 피치 못해 내린 결정이었다.

-다들 골고루 주식을 나눠 가졌으니까.

-나 하나 정도야.

-고작 내가 보유한 주식 처분한다고 청일이 흔들릴 일은 없겠지.

김봉남은 계열사 사장들을 보며 웃었다.

“다들 힘을 보태 줄 거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러지요.”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김봉남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일 유통이 5%, 청일 해운이 6%, 청일 전자가 6%, 청일 전기가 4%.’

머릿속에서는 주판알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청일 식품이 3%, 청일 목재가 2%, 청일 창호가 2%, 청일 방직이 1%, 청일 패션이 2%, 청일 일보가 2% 가지고 있기로 했었지?’

이들이 모두 김봉남의 뜻에 동조했다.

‘이들이 가진 주식이 33%, 나와 강태수까지 힘을 합치면 44%다.’

과반수는 안 되지만 어차피 청일 자동차는 과반수를 모으기 힘든 구조다.

‘한청호 일가의 15% 정도로는 내게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차기 청일 그룹 총수는 바로 내가 될 것이다!

김봉남의 눈에 야망이 활활 불타올랐다.

* * *

성북동 대운각을 빠져나오는 길.

청일 계열사 사장단과 한일권이 대운각 마당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회장님이 여긴 어쩐 일로…….”

“은행장들 만나 지원 좀 받아 볼까 해서.”

한일권이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물었다.

“청일 계열사 사장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무슨 작당들을 하고 있었을까?”

“작당이라뇨, 저희는 그저…….”

“그저? 뭐?”

“이문복이 계열사들을 휘젓고 다녀서 그것에 대해 서로 의논을 좀…….”

수상하다.

한일권이 지금 이 자리에서 모인 면면을 뜯어 본다.

김봉남이 한 발 앞에 나서서 말했다.

“안 그래도 회장님과도 이 일에 대해 담판 지으려고 했습니다.”

“담판? 무슨 일로?”

“지주 회사를 옮기고 청일 건설을 부도 처리 하는 게 어떤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지주 회사를 옮겨?

청일 건설을 부도 처리해?

한청호 일가가 과반의 지분을 확보한 튼튼한 동아줄을 그만 놓으라고?

“이제 보니 반역 모의를 하고 있었네?”

“안정우가 직접 거액의 정부 채무를 당장 상환하라고 통보했다죠? 맞습니까?”

맞다.

“어째서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까? 계열사 한두 개 팔아서는 충당할 수 없는 거액을 어떻게 마련하려고 하셨습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은행장들 만나러 다니는 거잖아.”

“은행들이 청일에 대출을 거부한다는 걸 우리가 모를 것 같습니까?”

“그럼 다른 방법 있어? 청일 건설 부도 같은 헛소리는 제외하고.”

“애송이 티는 거기까지.”

김봉남이 작정하고 한일권을 노려보았다.

“억지는 적당히 부리시죠. 그룹 경영이 장난처럼 보입니까?”

“야, 김 사장!”

“임시 주주 총회를 열겠습니다. 거기서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로 하죠.”

“주총?”

주주 총회는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정기 주주 총회와 상법 365조 제2항에 따라 수시로 시행하는 임시 주주 총회가 있다.

일반적으로 주식회사의 경영진이 주주 총회를 열게 되며 주식 3% 이상을 보유한 일반 주주들도 주주 총회를 소집할 수 있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논의는 무슨 논의! 지금 날 못 믿겠다는 뜻이야?”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건 회장님이십니다.”

김봉남뿐만이 아니다.

유통, 해운, 전자 전기, 식품, 목재, 창호, 방직, 패션, 일보까지.

모두 11명의 계열사 사장이 같은 눈으로 한일권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청일의 뿌리 깊은 충신이자 한청호의 든든한 기둥들이다.

그들이 한일권에게 정면으로 반하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그럼 주총에서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자마자 김봉남이 한일권을 스쳐 간다.

나머지 계열사 사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일권을 지나치면서 혀 차는 소리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일권은 울컥했다.

“야! 거기 안 서? 야!”

한일권이 버럭 외쳐도 누구 한 명 뒤돌아보는 자가 없다.

“이 새끼들이……!”

한일권이 청일 계열사 사장단을 붙잡으려고 할 때였다.

장 비서가 한 발 먼저 한일권의 팔을 붙들었다.

“은행장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회장님께서 안 오시면 당장 되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젠장!”

한일권은 등을 돌렸다.

지금 계열사 사장단들을 붙들고 실랑이 벌일 때가 아니다.

은행장들이 어렵사리 모인 만큼 그들과 일을 도모해야 할 때였다.

은행장들 역시 찝찝하게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 모인 것이지, 다음에 다시 이런 일에 응하지 않을 터였다.

천금과 같은 기회였다.

‘청일에 대출과 투자를 하도록 설득한다.’

원래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뇌물 장부와 한일권이 만들어 놓은 은행장 자식들의 치부책을 가져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또한 은행이 보유한 청일 주식에 대한 의결권. 이들을 반드시 내 편에 서도록 해야 한다.’

한일권의 눈이 빛났다.

“가자.”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일은 다음이다.

일단 내 것을 지키고, 그다음에 보복을 해야지.

한일권은 찬바람 쌩쌩 날리며 걸어갔다.

드르륵. 탁.

한일권이 대운각 장지문을 열었다.

* * *

청일 그룹 본사에서 열리는 임시 주주 총회가 바로 오늘이다.

태양 그룹 본사 회장실에서 업무를 보던 태수가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청일 그룹 전체를 뒤흔들 운명의 주주 총회가 되겠군요.”

태수는 청일 자동차 주식과 관련된 서류를 잘 챙겨 품에 넣었다.

동시에 후덕한 몸집과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하게 된 송 비서 역시 일어섰다.

“회장님, 장수 은행 쪽에서는 이미 출발했단 연락이 왔습니다.”

태수가 양복을 펄럭이며 회장실 문을 열었다.

태수의 옆에는 비서 송창준이 따라붙는다.

그 뒤에는 김광록이, 송 비서가 따랐다.

태수가 복도에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사장이 서류 가방을 고쳐 쥔다.

“청일 본사에서 마음껏 날뛰는 날이 왔군요.”

전(前) 청일 중장비 사장 이창원과 전(前) 청일 정유 사장 노일국이었다.

전생에서는 청일의 폭주하는 쌍두마차로 불리던 두 사장이 아니던가.

‘청일 순혈 충신들에 밀려 더러운 꼴 참 많이 봤었지.’

‘오늘 청일 순혈 충견들과 한청호 일가가 서로 물고 뜯는 싸움 구경 좀 해야겠다.’

그들이 주식을 단단히 챙겨 들고 업무까지 뒤로 미뤄가며 태수를 따라 나온 이유였다.

“갑시다.”

“예!”

태수가 이끄는 태양 그룹 사람들이 청일 그룹으로 출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