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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찍고 건설 재벌-218화 (218/230)

218화 목표는 청일 건설(6)

장지문을 잡은 김봉남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청일 그룹 총수를 바꾼다고?”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설마 나를 부른 이유가…….’

태수는 찻잔을 내려놨다.

“들어올 겁니까, 돌아갈 겁니까?”

“…그런 말을 듣고 돌아갈 수 있겠나?”

김봉남은 방 안으로 들어와 태수 맞은편에 앉았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자네 의도가 뭐야?”

태수는 대답 대신 품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중 서류 한 부를 김봉남 앞쪽으로 툭 던진다.

<청일 건설 자산 및 부채 현황 분석>

김봉남이 굵은 글씨로 뽑힌 서류 제목을 읽자마자 태수가 또 한 부를 던진다.

<청일 그룹이 안정우 정부에 상환해야 할 부채 목록>

툭.

<청일 그룹 부도 위험성에 관한 보고서>

툭.

<청일 그룹 지도부의 자산 처분 목록>

김봉남의 눈이 요동쳤다.

“이, 이게 대체… 아니, 왜 태양 그룹 총수인 당신이 이런 서류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김봉남은 서류를 휙휙 넘겨 봤다.

서류를 넘기면 넘길수록 경악밖에 안 나온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럴 수는 없다.

“총수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회사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볼수록 기가 차다.

“이러다가 진짜 청일 그룹이 부도나게 생겼군.”

청일 화학 사장 김봉남이 신음을 흘렸다.

안색은 어두워지고, 얼굴은 일그러진다.

태수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청일 건설 사장 이문복이 검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은 들으셨겠죠?”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야.”

“이문복은 마약 밀수로 잡혀갔습니다. 이게 개인적인 일로 끝날 것 같습니까?”

“그룹 차원에서 조치가 내려질 거야. 태양 그룹 총수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지.”

김봉남이 선을 그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태수의 말.

“이문복이 청일 그룹의 재산을 처분한 것을 들고 일본으로 밀항하려다 잡혀갔다면?”

“뭐?”

태수가 김봉남이 들고 있는 서류 중 <청일 그룹 지도부의 자산 처분 목록>을 가리켰다.

“아직도 이문복 개인적인 문제로 보입니까?”

“설마…….”

“청일 그룹이 얼마나 개판으로 돌아가는지 계속 외면하실 생각입니까?”

“으음.”

한참이나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김봉남은 고개를 들었다.

태수는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자네는 청일 그룹에 유감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많다 뿐인가.

“그런데 왜 내게 이런 사실을 알려 주나?”

태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에선 힘이 느껴졌다.

“청일 그룹 총수, 바꾸자고 했잖습니까.”

김봉남은 헛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보게. 원하는 게 뭐야?”

“청일 건설이 부도나길 바랍니다.”

“개소리!”

김봉남은 부서져라 찻잔을 내려놨다.

“청일 건설은 청일 그룹의 지주 회사야. 청일 건설이 부도나는 날엔 청일 그룹 줄도산이 난다. 자네가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모를 리가 있나.

“내게 청일 그룹의 위험을 경고해 주는 것이라면… 그래, 그건 참 고맙다. 하지만 청일 그룹 부도는 아니지!”

김봉남은 정색했다.

“내 청춘을 다 바쳐서 일궈 낸 그룹이야. 내 비록 월급쟁이 사장이지만 청일에 그 정도 의리는 있어!”

김봉남은 청일 그룹의 충신이었다.

전쟁 직후 한청호와 만나 지금까지 함께 청일을 키워 왔다.

청일은 김봉남의 분신이자 꿈이자 자부심이자 유산이기도 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난 절대 청일 그룹 부도에 공조할 수는 없어!”

“청일 그룹 부도가 아닙니다. 청일 건설 부도지.”

태수는 말을 정정했다.

하지만 김봉남은 콧방귀를 뀌었다.

“말장난은 그만하지. 같은 말 다시 반복해야 하나?”

“지주 회사가 청일 건설이 아니면 되잖습니까?”

“뭐?”

태수가 서류 중에서 <청일 건설 자산 및 부채 현황 분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김봉남 앞에 펄럭펄럭 흔들었다.

“청일 호텔, 청일 아파트가 연이어 실패하면서 청일 건설은 빚더미에 앉았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청일 건설에서 시작된 빚은 지금 청일 그룹 계열사 전체의 부담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태수가 <청일 그룹 부도 위험성에 관한 보고서>를 들고 흔들었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이문복이 청일 화학에 쳐들어와서 박박 긁어 갔다. 현금은 물론 어음과 채권, 주식까지 전부 다. 다른 계열사는 더 심하게 뜯겼다고 들었고.’

김봉남이 한숨을 내쉰다.

태수가 <청일 그룹이 안정우 정부에 상환해야 할 부채 목록>을 들고 흔들었다.

“청일 건설의 적자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상환해야 할 빚은 더 늘었군요.”

막대한 액수였다.

안정우는 과거 한청호가 박정환에게 무이자로 빌렸던 정부 채무를 당장 상환하라고 압박한다.

그것도 상환 예정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계열사 몇 개를 팔아도 감당할 수 없는 빚이었다.

“이대로 청일 건설을 도려내지 않으면 청일 그룹 다른 계열사까지 줄도산이 날 겁니다.”

태수가 <청일 그룹 지도부의 자산 처분 목록>을 흔들었다.

청일 건설에서 시작된 부채를 갚을 길이 없다.

“알다시피 계열사를 인수하겠다는 회사도 없고, 은행은 대출을 거부했고, 주식은 팔아 치웠고, 그 밖에 남은 재산까지 전부 이문복이 처분했습니다.”

“으음.”

“다시 묻겠습니다. 청일 건설을 부도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없다.

“청일 그룹을 살리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지요. 지주 회사를 바꾸고 청일 건설을 도려내지 않으면 회생 불가능할 겁니다.”

김봉남은 급기야 눈을 질끈 감았다.

-청일 건설을 버려라.

태수의 말이 맞기에 속이 쓰렸다.

‘한 회장과 내가 청춘을 다 바쳐 키운 첫 회사가 청일 건설이었지.’

주마등처럼 옛 기억이 쏟아졌다.

젊은 시절 한청호와 김봉남은 건설 현장에서 함께 굵은 땀을 흘렸다.

전후 폭격을 맞아 사라진 도시를 재건하며 청일 건설도 함께 컸다.

이후 굵직한 정부 공사를 맡게 되면서 청일 건설에서 청일 시멘트, 청일 중석, 청일 목재, 청일 창호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런 내 손으로 청일 건설을 버리라니.’

김봉남은 태수의 말이 너무나도 잔인하게 들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청일 건설을 버리지 않으면 청일 그룹을 버려야 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김봉남의 고민이 깊어졌다.

태수는 그런 김봉남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고민해야지. 그리고 당신이 앞장서서 청일의 충견을 모아 청일 건설을 물어뜯어야지.’

청일의 충견.

골수까지 충성심으로 무장한 청일의 일등 공신들이다.

그때 생사 고난을 함께했던 그들은 청일의 공신이 되었고, 다들 계열사 사장 자리 하나씩은 꿰어 차 그룹 사장단이 되었다.

‘청일 공신들은 한청호 대신 감옥에 들어가길 자처할 만큼 의리가 두텁지. 특히 김봉남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한일권 대신 그의 아들인 김재학을 감옥에 보내도 반발하지 않았을 정도다.

눈앞의 김봉남만 하더라도 한청호 대신 감옥살이를 두 번 했던가, 세 번 했던가.

그만큼 김봉남이 청일 그룹에 충성한 공이 컸다.

이에 한청호는 망나니 사고뭉치 동생 김정남이 골치를 썩여도 부사장 자리를 회수하지 않았다.

또한 김봉남에게 청일 화학 사장 자리를 쥐여 주고, 청일 계열사 차명 주식을 가장 많이 맡겼다.

‘한청호가 죽은 이후에도 서로 똘똘 뭉쳐 한일권을 떠받들던 청일의 공신들. 이번엔 당신들이 선택해야 할 거야.’

여전히 청일 화학 사장으로 건재함을 뽐내는 파워는 충성심에서 나왔다.

과거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맡던 사장들의 앞길을 막는 청일의 순혈(純血)들이다.

태수는 그들이 앞장서서 청일 그룹을 쪼개 놓길 바란다.

그들이 먼저 한일권에게서 등 돌리기를 바란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는 기분, 한일권 너도 느껴 봐야지.’

태수가 굳이 청일 제일의 충견을 자처하는 김봉남을 들쑤시는 이유였다.

긴 고민 끝에 김봉남은 감았던 눈을 떴다.

“지주 회사를 바꾸는 건 큰일이야. 오늘부로 계열사 사장단들을 모아 이에 대해 의논해 보겠네.”

“의논해 보겠다는 두루뭉술한 약속 따윈 받지 않겠습니다.”

태수가 서류 뭉치를 흔들었다.

“임시 주주 총회를 여십시오. 거기서 지주 회사를 전환하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 주길 바랍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어.”

김봉남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청일 건설 주식은 대부분 한 회장 가족들이 가지고 있어. 아무리 우리가 목소리를 높인다고 하더라도 경영권은…….”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한일권은 총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겁니다.”

무슨 수로?

김봉남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태수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강태수에겐 방법이 있는 게 확실해.’

태수는 말했다.

“지주 회사가 바뀌면 청일 건설 주식은 힘을 잃습니다. 청일 건설 부도는 정해진 수순입니다.”

태수가 품에서 주식 증권을 꺼내 들었다.

모두 청일 자동차 주식이었다.

“청일 자동차 주식 4%입니다. 이번에 이문복이 팔아 치운 주식을 운 좋게 손에 넣었습니다.”

“이문복이…….”

“듣자 하니 유독 청일 자동차만큼은 골고루 지분이 뿌려졌다고 하더군요.”

한청호 일가는 지주 회사인 청일 건설 지분을 독점하다시피 차지했다.

반면 청일 자동차는 계열사 사장단들이 지분을 일정 수준 골고루 보유하고 있었다.

“청일 그룹 지주 회사를 청일 자동차로 옮기는 겁니다.”

“으음.”

“다른 곳보다 계열사 사장들을 설득하는 일이 수월할 것 같습니다만.”

김봉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골고루 분산되어 너도나도 차명 주식을 가지고 있는 청일 자동차라면 다들 동의할 것이다.’

새삼스럽게 태수가 다시 보인다.

‘치밀한 자군. 문제 해결 방법까지 확실하게 제시하니 거부할 수가 없어.’

청일 그룹 내부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아는 것 같다.

각 계열사 사장단들이 보유한 주식 상황을 알 리도 없지 않나.

대체 어떻게 청일 자동차를 골랐을까.

당장 김봉남부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유일한 계열사였다.

태수는 씩 웃었다.

“청일 화학에서도 청일 자동차 주식을 보유하고 있겠죠?”

“그룹 내에서도 많이 보유한 편에 속하지.”

청일 화학에서는 청일 자동차 주식을 7% 가지고 있다.

“그리고 차기 총수는…….”

태수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김봉남을 본다.

그 뜻을 눈치 빠른 김봉남이 어찌 모르겠는가.

김봉남은 마른침을 삼켰다.

‘나더러 차기 총수를……?’

뜻밖의 제안이었다.

생각해 보지도 않은 기회라고 생각하니 김봉남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감정이 일렁인다.

김봉남에게도 야망은 있었다.

태수가 그 야망의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제가 힘을 실어 드리겠습니다.”

태수는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김봉남의 눈앞에서 흔들다가 도로 품에 넣었다.

김봉남의 눈에는 탐욕이 일렁였다.

‘강태수가 보유한 주식 4%에 청일 화학이 가지고 있는 주식 7%.’

모두 11%나 된다.

‘반면 한청호 일가가 가진 주식은 15% 정도. 한 회장님이 아니라 한일권을 상대로 하는 일이니 그 정도면 한번 해볼 만한데?’

다른 계열사들이 청일 자동차 주식을 모두 2~5% 정도씩 나눠 가지고 있다.

‘내 쪽에서 나와 힘을 합칠 계열사 사장들의 주식을 확보한다면…….’

가능성이 있다!

김봉남 머릿속에 회유 가능한 사장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아주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청일 자동차의 부실 경영을 핑계 삼아 임시 주주 총회를 얼어야겠군.”

탁탁탁.

태수는 김봉남에게 보여 줬던 서류를 한데 모아 정리한다.

그리고 그걸 김봉남의 손에 쥐여 주면서 웃었다.

“이게 무기가 될 겁니다. 가지고 가십시오.”

김봉남은 손에 든 청일의 서류를 보자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는 김봉남.

태수는 김봉남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총에서 봅시다.”

드르륵, 탁.

태수가 떠나고 홀로 남은 김봉남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내린 이후였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 한잔해야겠어.”

태수가 떠난 대운각 룸에선 다기 세트가 나갔다.

대신 술상이 들어왔다.

김봉남의 연락을 받고 청일 계열사 사장들이 대운각으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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