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목표는 청일 건설(4)
인천항.
한겨울의 항구는 유독 어둠이 일찍 내려앉아 스산해지곤 했다.
인부들도 모두 일 끝나기 무섭게 술집으로, 집으로, 그렇게들 뿔뿔이 흩어졌다.
짠 내 가득한 칼바람이 항구를 휩쓸고 다닐 때.
컨테이너가 잔뜩 쌓인 인천항 구석 컨테이너 안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비명도 함께 새었다.
“아악!”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한차례 두들겨 맞은 후.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외쳤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네?”
깡패가 뭐라 말하는데 못 알아듣겠다.
일본어였다.
그때 왜소한 중년 남자가 한국어로 통역해 준다.
[왜 이러는지를 몰라? 이런 병신 새끼가.]
“히익!”
깡.
남자의 무릎 바로 앞에 오함마가 떨어졌다.
남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깡패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럴 때마다 통역이 뒤따랐다.
[너 경찰이지?]
“아니에요! 저 진짜 경찰 아니에요!”
[냄새는 어떻게 맡았어?]
억울했다.
“아니에요! 저 여기 삯 받고 일하는 인부예요! 하역 작업 돕고, 선적 작업 거들고. 아시잖아요?”
[그딴 건 모르겠고, 내가 아는 건 하나다. 지금 네놈이 시치미 떼고 있는 거.]
깡.
[선수끼리 왜 이러시나. 도가니 다 박살 난 다음에 다시 말할까?]
믿지를 않는다.
급기야 남자는 울먹였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진짜예요. 저 경찰 아니에요. 저한테 대체 왜 이러세요.”
남자를 잠시 내려다보던 깡패가 물었다.
[내 물건 내놔.]
“물건이라뇨?”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서, 설마… 파인애플이요?”
수입 과일이 잔뜩 실린 나무 궤짝을 나르다가 몰래 파인애플 하나를 빼돌렸다.
“아내와 자식들 먹일 생각에서였어요. 어린애들이 매일 그림까지 그려 가면서 바나나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그만…….”
수입 과일인 파인애플과 바나나가 유독 비싸던 시절이었다.
너무 비싸서 서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군침만 삼키던 때였다.
그런데 커다란 나무 궤짝 가득 줄줄이 실려 오던, 엄청난 양의 수입 과일을 나르게 된 것이다.
“비싼 과일을 보고 제가 잠깐 어떻게 됐나 봅니다. 맛만 보려고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고작 파인애플 때문에 이 사달이 나다니.
“제값 주고 사겠습니다. 얼마나 드리면 될지…….”
남자가 서둘러 주머니를 뒤졌다.
일당으로 받은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이 나왔다.
하루 종일 땀 흘려 짐을 나른 대가였다.
하지만 오함마를 들고 있는 깡패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깟 코 묻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병신아.]
“그렇게 비싸요?”
[암, 비싸지. 그게 어디 보통 물건인 줄 알아?]
다량의 마약 봉지를 숨겨 놓은 파인애플이 아니던가.
[단언컨대 네 목숨값보다 비싸다.]
결국 남자가 두 손 들고 항복했다.
세상에 목숨보다 귀중한 건 없으니까.
“짐 가방에 넣어서 저쪽 인부 컨테이너 의자 밑에 숨겨 뒀어요. 집에 돌아갈 때 가져가려고.”
[거짓말이면 죽는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검은색 가방이에요.”
깡패가 오함마를 거두며 뒤돌았다.
그가 저쪽 구석에 앉아 있는 건장한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영 모르는 것 같습니다.]
[회수해. 제대로 회수 못하면 네놈이 죽는다.]
백열등 불빛이 남자의 가슴까지만 온다.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옷 사이로 요란한 문신이 보일 뿐이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저 새끼 처리해.]
문신한 남자가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그때였다.
“물 건너온 깡패 새끼들이 어디서 행패를 부려?”
쿠당탕탕.
깡패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컨테이너 안으로 던져진다.
[뭐야?]
남자와 오함마를 든 깡패가 동시에 입구를 보았다.
2미터짜리 근육질 거한이 웃고 있었다.
“여기 대장이 누구냐?”
포항 철강 제련소 건설 기술 고문이었던 우시로다 타케시[後田武至]가 통역을 하다 말고 사색이 되었다.
“다, 당신은? 아니, 당신이 왜……!”
“니가 왜 여기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너 또 만나면 진짜 뒈진다고 했지?
김광록의 서슬 퍼런 말을 기억하고 있는 우시로다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때 오함마를 든 깡패가 버럭 외쳤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조무래기는 입 닥치고.”
부웅- 휘둘러지는 오함마를 가볍게 피한 김광록이 주먹을 날렸다.
갈비뼈에서 빠각 소리가 들려왔다.
[끅!]
“위험한 거 함부로 막 휘두르면 안 되지.”
순식간에 좌우 연타로 날아드는 주먹.
깡패는 오함마를 놓치고 말았다.
깡 소리와 함께 오함마가 컨테이너 바닥을 때렸다.
“다루지도 못하는 연장을 왜 갖고 다녀?”
오함마 자루를 대뜸 쥔 김광록이 아주 가볍게 오함마를 휘두른다.
그 무거운 오함마가 김광록 손에서 노는 꼴이 꼭 장도리처럼 보인다.
“이건 이렇게 쓰는 거다.”
순식간에 깡패의 정수리까지 다가온 오함마.
머리를 부술 기세로 돌진하는 오함마를 보고 질겁할 때 김광록은 가볍게 우뚝 멈춰 세웠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털썩.
어찌나 놀랐던지 깡패가 제풀에 놀라 무릎을 꿇었다.
이미 게거품을 물고 기절한 상태였다.
“주먹으로 먹고산다는 새끼가 뭐 이리 허약해? 슬쩍 건드렸다고 정신줄을 놓네?”
그때 한 무리의 깡패들이 김광록을 향해 내달았다.
손에 저마다 날카로운 회칼을 들고 있었다.
[으아아-!]
[죽인다!]
김광록은 가볍게 몸을 흔들며 칼끝을 피했다.
슉슉. 쉬익.
고개를 돌리고, 상체를 흔들거나 발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칼을 전부 피해 냈다.
“귀찮은 새끼들. 한꺼번에 들어와라.”
김광록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워서 까딱였다.
달려드는 깡패들을 향해 오함마를 휘둘렀다.
따다다당 소리와 함께 휘두르는 회칼을 정확히 쳐내는 오함마.
깡패들이 박살 난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뒤에서 들어오려던 깡패들 안색이 변한다.
[무슨 오함마를 장도리처럼 가볍게 써?]
[정확하게 칼 든 손만 노린다. 보통 놈이 아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일본 깡패들.
김광록이 깡패들의 대가리를 슬쩍 본다.
“이것만 들면 꼭 저기에 때려 박고 싶어진단 말이지.”
왕년에 김광록은 두더지 잡기 게임을 참 잘했더랬다.
참아야 한다.
오함마를 어깨 뒤로 냅다 집어 던지고 달려드는 김광록.
오함마가 우시로다의 관자놀이를 스치며 컨테이너 벽을 때렸다.
“히익!”
우시로다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가는데, 일본 깡패들과 김광록이 맞부딪쳤다.
다수를 상대하는 김광록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양 떼를 습격한 늑대 같았다.
일본 깡패들이 악을 쓰며 칼을 휘둘러도 김광록의 옷자락조차 스치지도 못한다.
김광록이 순식간에 빼앗은 칼을 들고 웃었다.
“칼은 그렇게 쓰는 거 아니다. 이것도 가르쳐 주랴?”
김광록은 칼을 움직일 때마다 정확하고 깔끔하게 살을 가른다.
일방적인 공격에 무력화되는 일본 깡패.
심지어 바깥에 포진한 깡패들을 전부 소탕한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속속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결국 문신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만!]
그와 동시에 일본 깡패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김광록을 잔뜩 경계하면서 문신의 남자 근처로 모여든다.
문신한 남자가 백열전구 아래에 얼굴을 드러냈다.
얼굴에 칼자국이 몇 개나 그어진, 험악한 인상의 남자였다.
[무슨 일로 찾아왔나?]
통역을 담당하고 있던 우시로다 역시 목소리가 떨려 왔다.
“무슨 용건으로…….”
[당신이 두목인가?]
태수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왔다.
태수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문신한 남자에게 말했다.
[한국에 약 들이는 건 그만하라고 경고했을 텐데.]
“그, 그건…….”
우시로다의 눈알이 데굴데굴 구른다.
아차 할 새도 없이 우시로다가 김광록의 손에 대뜸 멱살이 잡혔다.
우시로다는 다급하게 말했다.
“저기 저 문신, 일본 야쿠자 고위 간부예요!”
마침 잘됐다.
“제가 막을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암만 유통할 수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였어요! 가운데 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저도 죽겠습니다!”
엄청 억울해 보였다.
태수는 일본 야쿠자 고위 간부라는 남자를 보았다.
과연 지위가 높을수록 화려해지는 야쿠자 문신이 목덜미까지 올라온 남자였다.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이 새끼들, 전부 죽인다!]
태수가 말했다.
“쓰레기 청소부터 시작합시다.”
“예!”
김광록과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동시에 씩 웃었다.
“연장 써도 됩니까?”
당연히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문신한 야쿠자 고위 간부가 앉아 있던 자리엔 태수가 앉았다.
파인애플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남자가 매 맞던 자리엔 일본 야쿠자들이 널브러져 끙끙댔다.
태양 그룹 경호원들은 일본 깡패들을 일일이 포박하는데 반항이 제법 거셌다.
김광록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반항하면 뒈진다. 여태 많이 참았다.”
버둥대던 일본 깡패들이 통역 없이도 조용해진다.
주먹의 힘은 만국 공통어였다.
김광록은 우시로다를 질질 끌고 와 태수 앞에 섰다.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잡았다. 약도 확보했다. 근데 이 새끼들, 하필이면 왜 파인애플 속에 약봉지 집어넣고 다니는 걸까?”
그야 안 걸리려고.
전생에 태수도 전해 듣고 황당해하던 마약 운반 방법이었다.
파인애플 때문에 맞던 남자가 태수 옆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보았다.
“당신들은 대체 누굽니까?”
“태양 그룹에서 나왔습니다.”
태수가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태양 그룹 총수 강태수>
황당했다.
태수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유명 인사였다.
“재벌 기업 총수께서 이런 위험한 곳엔 대체 왜…….”
“그러는 당신은 왜 위험한 곳에 홀로 잠입한 겁니까?”
잠입이란 소리에 남자는 흠칫했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아버님이 아셨다면 크게 걱정하셨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우실 텐데요.”
그는 김종표를 따랐던 김차열 검찰총장의 아들이었다.
“서울 중앙지검 신입 검사 김무혁입니다.”
그가 품에서 검사 신분증을 꺼내 보인다.
마약 유통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인천항에 몰래 잠입했던 것이다.
“위에서 자꾸 뜯어말려서요. 고위층 인사들이 연루된 루트인지라…….”
“박정환, 김종표, 한청호 등이 만든 일본 밀수 루트라서 그럴 겁니다.”
그렇기에 한일권이 접촉하던 자들이었다.
권력이 눈감아 주는 것을 틈타 일본 야쿠자가 한국에 약을 들여오고 있었다.
‘한일권의 또 다른 숨은 힘을 완전히 박살 낼 수 있다면, 기꺼이 수고를 감수할 만하지.’
태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검찰총장 김차열은 아들이 세운 큰 공을 절대 덮지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김차열은 안정우에게 한 차례 찍힌 후다.
법무부 장관 자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그저 자리보전할 수 있기만 바라는 신세가 됐지 않은가.
박정환의 루트를 눈감아 줄 김종표도 거꾸러진 마당이다.
검찰총장 자리에서 쫓겨나기 전에 아들의 앞길을 열어 주려고 아주 제대로 조져 놓을 게 분명했다.
“제보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더라고요. 증거를 들고 가야 일망타진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신입 검사의 열정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그걸 탓하지 않았다.
‘그 제보, 내가 일부러 흘렸으니까.’
검찰총장까지 끌어들여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무식하게도 김무혁 혼자서 잠입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팀을 끌고 들이닥칠 거라 생각했었다.
“오늘 일은 용감한 게 아니라 무모한 거였습니다.”
“다들 증거 없이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 뜯어말리기에 울컥해서…….”
태수가 늦었다면 김무혁은 인천 앞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됐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전생의 빚은 이것으로 갚았다.’
김무혁은 열혈 검사였다.
수완도 좋고, 눈썰미도 좋고, 머리도 좋았다.
안기부의 송곳이라 불리던 한수와 친하게 지냈었다.
태수는 아직도 자신을 노려보던 김무혁이 잊히지 않았다.
-당신 동생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 정말 몰라?
-넌 청일의 개새끼야, 퉤!
-네가 안 나서면 내가 끝까지 파헤친다!
열혈 검사였던 그는 얼마 후에 변사체로 발견됐었다.
태수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거기서 육개장을 먹고 있던 한일권을 만났다.
-참 아까운 인재를 잃었어.
-그러게 적당히 나댔으면 좋았을 텐데. 보복 살인이라더라.
탄식하는 말과 달리 한일권의 눈빛이 참 묘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청일 병원 VIP룸에서 그 눈을 다시 마주하고서야 깨달았다.
당시 한일권은 살인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김차열 검찰총장님께 연락해 두었습니다. 곧 사람들이 이곳에 들이닥칠 겁니다.”
“네?”
“마약 유통 사범들을 혼자서 일망타진했잖습니까. 아버지께서 아주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검찰총장 김차열은 적당히 알아서 포장해 줄 것이다.
‘뭐? 혼자서 일망타진?’
김무혁은 태수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모든 공을 제게 넘겨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재벌 총수가 휘말려서 좋을 것 없는 일이잖습니까.”
태수가 일본 야쿠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제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일본 야쿠자를 소탕하고도 공을 탐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도 재벌 총수와 그룹 경호원들이 총동원돼서 잡는 대작전이었다.
‘한국에 유통하던 야쿠자 마약 사범들을 일망타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도 은밀한 일이라니.’
감히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신입 검사 김무혁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밀항하려는 도둑놈 잡는 일입니다.”
“네?”
황당했다.
그때 밖에서 뒷정리하던 태양 그룹 경호원 중 하나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놈이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이문복이 떴다.
태수가 김무혁을 보며 씩 웃었다.
“선물 하나 더 드리죠.”
일단 수금부터 한 다음에.
김광록이 우두둑 주먹을 다시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