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215화 (215/230)

215화 목표는 청일 건설(3)

이문복이 서류 가방에서 물건을 꺼낸다.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청일의 주식들도 처분해야죠.”

장말동은 주먹을 꽉 쥐었다.

태수의 말 그대로였다.

-이문복은 청일 주식들을 처분하러 올 겁니다.

-그럴 때 다른 건 거들떠보지 마시고 한 종류 주식을 사들이십시오.

“청일 건설 주식입니다. 청일 건설이 청일 그룹 지주 회사인 건 은행장님께서도 잘 아시죠? 구하기 어려운 겁니다.”

청일은 다른 재벌 그룹들처럼 순환 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청일 건설 사장인 이문복 역시 차명으로 계열사 주식을 보유해 관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청일 건설이 보유한 계열사 차명 주식을 팔겠다고 내놓은 것이다.

‘청일 건설 주식은 얼마 없어.’

이문복을 청일 건설 자리에 앉히면서 한일권이 청일 건설 주식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

이문복이 허튼 생각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꽤 구했지. 이걸 보면 단번에 눈이 뒤집히겠지. 청일 그룹을 통째로 먹는 건데.’

아주 비싸게 팔아먹을 작정이었다.

이문복이 청일 그룹이 소유한 부동산을 싸게 내놓은 이유기도 하다.

청일 건설 주식을 매우 비싼 값에 처분하려면 분위기가 좋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장말동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난 청일 건설 주식에는 관심 없다.”

장말동이 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청일 자동차는 없나?”

“청일 자동차요?”

이문복이 두 눈을 끔뻑였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왜 하필 청일 자동차입니까? 청일 중장비를 잃어버린 이후로 시들시들해져서 주가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주식 가격이 참 싸다는 소리지?”

“그렇기야 그렇지요. 하지만…….”

“뭔 잡설이 이리 길어? 있어, 없어? 팔아, 안 팔아?”

“…있습니다. 팔겠습니다.”

이문복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제야 장말동은 만족스러워하며 웃었다.

“청일 자동차는 얼마나 가지고 있나?”

“4% 갖고 있습니다.”

“에잉, 명색이 청일 건설 사장이라는 자가 청일 자동차 주식은 왜 이리 쥐꼬리만 하게 갖고 있어?”

그야 월급쟁이 사장이니까요.

이문복은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삼켰다.

대신 다시 한번 청일 건설 주식을 들어 올렸다.

“그거보다도 청일 건설 주식이 훨씬 가치 있을 겁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시중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렵게 구했습니다. 청일 건설 2%, 어떠십니까?”

“일없다.”

“그럼 시중 가격에서 5% 깎아 드리겠습니다. 더는 안 됩니다.”

“일없다니까? 청일 자동차나 내놔라.”

장말동이 이문복의 손에서 서류 뭉치를 낚아챘다.

마구 뒤적이며 청일 자동차 주식에 관련된 서류를 찾아낸다.

이문복이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이참에 다른 계열사 주식들도…….”

“안 사.”

“청일 건설이 싫다면 청일 식품도 있고, 청일 해운이랑 청일 증권, 청일 보험도 있는데요.”

“안 산다니까.”

“왜 청일 자동차 하나만 그렇게…….”

그야 강태수는 청일 자동차를 원하니까.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청일 자동차 하나만 사라고 했으니까.

장말동 역시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삼켰다.

대신 은근하게 물어본다.

“주식은 이만하면 됐고, 다른 건 없나?”

“공장 말입니까?”

“응, 그거.”

이문복이 눈을 빛내며 서류 가방을 또 열었다.

한청호가 알았으면 뒷목을 잡았을 일이었건만 이문복은 거리낌이 없었다.

*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 구치소.

1908년 건축된 경성 감옥은 서대문 형무소란 이름을 거쳐 현재 서울 구치소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과거 일제 강점기 당시의 독립투사와 해방 이후 군사 독재 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를 가뒀던 곳이다.

이렇게 이름이 바뀌는 동안에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 등 정치 변혁에 따라 많은 시국 사범이 들어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영순 여사를 저격한 문세기가 이곳에서 사형됐고, 박정환 암살로 인한 김재국 또한 이곳에 수감되어 있다.

전생에서 김재국은 이곳에서 사형되어 생을 마쳤었다.

“수감 번호 4885. 면회다.”

한청호는 교도관을 따라나섰다.

접견실에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여길 다 찾아오는 날이 있구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아버지도 여전하시네요. 오랜만에 아들이 찾아왔으면 고마워해야지 구박부터 시작하세요? 이래서 내가 찾아오기 싫었다니까.”

한청호와 한일권이 유리창을 두고 마주 앉았다.

“그래, 어쩐 일이냐? 놀기 바쁜 네놈이 어지간한 일로는 날 찾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 돈이 좀 많이 필요해요. 꿍쳐 놓은 금고 같은 거 없어요?”

“청일 호텔과 청일 아파트 지으면서 탈탈 털어 썼다.”

“돈 나올 구석이 정말 없어요? 별장이라도 팔아야 되나.”

“너 대체 회사 경영을 어떻게 하기에 벌써부터 재산 팔아먹을 생각을 해?”

“아버지가 싸 놓은 똥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요.”

억울하다.

“대체 안정우랑 어떻게 얽혔기에 나더러 정부 돈을 죄다 토해 놓으라고 나와요?”

“안정우가? 왜?”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잖아요. 멱살이라도 잡고 싸웠어요?”

한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 얽혔어. 난 그놈 얼굴조차 제대로 본 적 없다. 모르는 놈이야.”

“그게 가능해요? 아버지가 차기 대통령이 될 정치인한테 눈도장 한 번을 안 찍었다니.”

“국회의원, 시의원 선거 한 번이라도 나온 놈이었다면 내가 다 알지.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정치판의 생리는 한청호가 빠삭하게 알고 있다.

“정치인들이 어디 보통 놈들이냐? 다들 제 분야에서 날고 기는 영악한 놈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패권을 다투는 곳이다. 돈, 힘, 명성, 영향력 전부 갖춘 놈들의 싸움이란 말이다.”

한 지역에서 명망 있고 돈 있는 자들이 시의원, 도의원, 국회의원에 도전한다.

거기에 더 나아가 대선 후보들은 그야말로 당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떼거리로 싸워서 결국 단 한 명에게 허락되는 자리.

그러니 오죽하면 대통령은 하늘이 내렸다는 소리가 나오겠는가.

“이 한청호가 이름 한 번 못 들어 본 놈이 대통령이 된다? 이건 밑바닥 노가다꾼이 한순간에 대한민국 1등 재벌이 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어요. 아무리 간접 선거를 통해서라고 하더라도 국민들의 지지율이 심상치 않아요. 다들 안정우를 떠받들고 있다고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덕분에 한청호의 특별 사면도 물 건너가고 말았다.

아쉽다.

“내 뇌물 장부를 가져가고도 김종표가 이리 허망하게 고꾸라질 줄이야.”

그의 수완을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청호가 뇌물 장부를 선뜻 내어 준 이유기도 했다.

“모략가 김종표와 대적할 만한 인물은 없었을 텐데.”

“모략가면 뭐해요? 박정환 암살 사건에 얽혀서 침몰해 버렸는데.”

“김종표는 박정환 암살 사건과 관련이 없어. 정치 싸움에서 패배했을 뿐이야. 대체 상대가 누구였느냐? 야당의 거물들도 아니라면…….”

“재벌들이요.”

이해할 수 없었다.

재벌들은 정치인들에게 줄을 서서 정치 자금을 헌납하는 자들이다.

대통령 권한 대행에게 맞설 이유가 없는 자들이란 뜻이다.

“재벌들이 왜 김종표와 얼굴을 붉혀?”

“왜긴 왜겠어요? 록펠러가 석유 공급 끊는다는 소리에 놀라서 김종표를 대신 밟아 댔죠.”

한일권이 그간 보고 들은 일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한청호가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 강태수가 안정우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뜻이구나. 게다가 석유 개발을 독차지하고 재벌들에게 국토 개발 이권을 나눠 줬다니. 영악한 놈.”

또 강태수다.

“강태수가 우리 청일을 아주 말아먹을 작정이로구나.”

한청호가 신음을 내었다.

“그래서 돈은 어찌 마련할 생각이냐?”

“유능한 놈 있잖아요. 이문복.”

“그놈은 못 믿는다. 내 사탕발림에 금산도 배신하고 나온 놈이야.”

“알아요. 하지만 한 달 동안은 내 대신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녀야죠. 클클클.”

한일권의 눈이 스산하게 번뜩였다.

“어디 한번 능력껏 박박 긁어 보라지. 그 새끼 배때기 불릴 돈이 아니라 그 새끼 배때기 가를 돈이 될 거예요.”

한일권이 비열하게 웃었다.

“사람들의 원성을 등에 업을 제물은 한 사람이면 족해요.”

한청호는 바로 알아들었다.

“이문복을 앞세워 일을 도모하고 뒤통수를 칠 생각이로구나.”

“이문복이 긁어낸 돈은 내가 가로채야죠. 이문복은 욕만 먹고 쫓겨날 거예요.”

한일권은 이문복이 돈을 긁어 오길 기다렸다.

원성이 자자한 그를 청일 그룹에서 내칠 생각이었으니까.

“두고 보세요, 아버지. 밥버러지 새끼의 말로는 정해져 있으니까요.”

한일권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한청호는 슬쩍 물었다.

“청일 건설 주식은 단단히 틀어쥐고 있겠지?”

“당연하죠. 이문복 그 새끼가 건설사를 손에 쥐고 회장 자리를 노리려는 걸 내가 모를까 봐요?”

청일 건설은 청일 그룹의 지주 회사다.

“지금껏 이문복이 주식 시장에서 청일 건설 주식을 사 모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이문복이?”

“한 2% 정도 모았을 거예요. 하지만 고작 2%예요.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요.”

한일권이 쥐고 있는 청일 건설 주식은 무려 17%다.

한청호가 가지고 있는 청일 건설 주식이 31%, 한일권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주식은 8%.

청일 그룹 지주 회사의 지분 과반수 이상을 확보했으니 두려울 게 없다.

한일권이 자신만만한 이유였다.

“이참에 이문복 손에서 청일 건설 주식도 한꺼번에 걷어 볼까요? 클클클.”

“그거 좋지, 큭큭큭.”

두 부자는 함께 웃었다.

이런 일에는 누구보다도 합이 찰떡같이 잘 맞는 부자였다.

그들은 태수가 은밀히 청일 자동차 주식을 모으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문복이 그들 생각보다 훨씬 행동력이 빠르다는 것도 몰랐다.

* * *

강남구 대치동 대로변에 위치한 27층 태양 빌딩.

태양 그룹 본사가 들어선 그곳 꼭대기 층엔 회장실이 있었다.

똑똑.

“회장님, 장수 은행장님입니다. 전화 받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태수가 허락하자 비서가 전화기를 건넸다.

“강태수입니다. 어르신, 안녕하셨습니까?”

-많이 기다렸지? 네 말마따나 이문복이 보따리를 풀었다.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아주 싸게 후려쳐서 박박 긁어 왔지. 전부 네가 부른 것들로만 추려서 반값에 사 왔다.

“청일 자동차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문복이가 4%를 내놓더라.

아쉽다.

솔직히 조금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청일 자동차 주식을 공략해 온 덕분에 꽤 많이 모았다.

4%면 판세를 뒤집기 충분하다.

“잘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에잉, 시끄럽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태수의 칭찬에 장말동이 질색한다.

말로는 저리 치를 떨지만 좋아 죽겠단 표정을 하고 있을 장말동이 눈에 선했다.

전화기를 내려놓는 태수.

태수는 회장실 소파에 앉아 있는 김광록을 보았다.

“한일권과 이문복 뒤는 제대로 밟고 있습니까?”

“물론이지. 명색이 중앙 정보부 애들이었는데 그거 하나 못할까.”

태수는 금산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이문복에게 사람을 덕지덕지 붙였다.

한일권보다 이문복을 집중 감시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놈 진짜 행동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더라.”

이문복이 다른 건 몰라도 배신에 관해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었다.

“벌써 자기 재산까지 전부 처분하고 청일 계열사부터 하청 업체를 싹 다 돌았어. 며칠이나 됐다고 아주 박박 긁어 갔더라.”

장말동에게 은행장들에게 즉시 전화를 돌리라고 지시한 이유였다.

장말동에게 헐값에 후려쳐 사들이라고 장담한 까닭이기도 했다.

“한일권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이문복이 배신할 거라는 건 대충 눈치챈 모양이던데, 이렇게 빨리 팔아먹고 튈 거란 예상까진 못하는 것 같더라.”

“그랬을 겁니다.”

태수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한일권의 그 음흉한 성미 때문이다.

아마 한 달 동안 이문복을 철저히 갖고 놀겠다고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문복은 요즘 밤마다 은밀하게 술집을 돌면서 브로커들을 수소문하고 있어. 밀항을 알아보고 있더라.”

지금은 비행기보다 배로 더 많이 다니던 시절이다.

공항에서는 단번에 잡히니까 몰래 배로 이동하겠다는 뜻이다.

김광록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문복을 밀항시켜 주겠다고 나선 브로커 말이다. 나도 아는 사람이더라.”

“누굽니까?”

“그 왜 있잖아, 인천항에서 잡아 온 그 일본 놈.”

포항 철강 제련소 건설 기술 고문이다.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태수가 김광록에게 말했다.

“그놈, 한 번 더 잡아야겠습니다.”

김광록이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맡겨만 둬.”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시다.”

수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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