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목표는 청일 건설(2)
결심은 섰다.
그제야 이문복은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스물일곱 살짜리 철부지 애송이 다루는 건 일도 아니지.’
재벌 집 도련님으로 귀하게 자라 와서 세상물정을 알겠나.
회사가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니까 만사 내팽개치고 출근도 안 하는 것이겠지.
그러니 세상인심 야박한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참에 왕창 뜯어낸다. 그것도 이 자식이 그동안 괴롭혀왔던 것에 이자까지 듬뿍 얹어서.’
긴장하니까 괜히 입안과 입술이 말랐다.
이문복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적셨다.
거짓말도 입에 침을 바르고 하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이제부터 사탕발림과 회유를 시작해야 한다.
“방법을 찾아야죠. 시급을 다투는 일이 되겠군요.”
긍정적인 반응에 한일권의 표정이 조금 풀린다.
“어쩔 생각이야?”
“정석대로 가야죠. 긁어낼 수 있는 돈은 전부 긁어 와야 합니다.”
“긁어내? 어디서? 누구에게?”
“은행도 좋고, 사채업자도 좋고, 정치인도 좋고.”
한청호가 위아래로 뿌린 돈이 얼마던가.
이제 와서 그들이 입을 싹 닫아서야 되겠나.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죠. 돈값을 못하면 도로 토해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한일권은 코웃음 쳤다.
“은행은 전부 등 돌렸고, 사채업은 8.3 사채동결조치 이후 쪼그라들었고, 정치인? 그놈들에게 돌려받을 돈이 있겠어?”
“회장님이 하셔야 할 일입니다. 한청호 전 회장님께서도 그런 일을 하셨고요.”
“지금 나더러 수금하러 돌아다니란 말이야?”
“하셔야죠. 아니면 회사가 망하는데.”
힘 있는 자들을 함부로 건들면 뒤가 좋지 못하다.
이문복은 한일권을 벼랑 끝에 밀어 넣고 싶었기에 일부러 더 권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일권은 비열하게 웃었다.
“그래, 해야지. 회사가 망하게 생겼는데. 당장 내일부터 수금하러 다녀.”
“네?”
“돈값 해야지.”
“지금 저더러 그들에게 돈을 받아오란 말씀이십니까?”
“그럼 내가 하리?”
아뿔싸.
‘이 새끼는 틈만 나면 제 일을 내게 떠넘기는구나. 그건 안 되지.’
이문복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힘 있는 놈들은 귀찮다.
여차하면 뒤통수 두들겨 맞을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힘없는 놈들은 쉽다.
“위로도 긁어야지만 아래로도 긁어야 합니다. 청일의 계열사, 거래처와 하청업자까지 전부 긁어내야죠.”
“같이 해. 위아래 전부 다.”
“…….”
“네놈 월급이 얼만지나 알지? 왜? 싫어? 그럼 그 돈 도로 토하던가.”
“…….”
“내일부터 은행, 사채업자, 정치인, 계열사, 거래처와 하청업자까지. 전부 돌아다니면서 수금해. 알았어?
제 말에 제 목을 죄어온다.
이문복은 억지로 웃었다.
“…그래야죠. 맡겨 주십시오.”
뒤탈이 날 벌집은 건들기 싫다.
그러니 계열사, 거래처, 하청업자를 만나 돈을 뜯어내야겠다.
그 돈으로 제 주머니를 채우면 된다.
‘오히려 잘됐다. 이젠 내가 계열사 돈을 박박 긁어내고, 거래처와 하청업자에게 거액을 받아내더라도 의심조차 못하겠군. 후후후.’
밑밥은 깔아뒀다.
이문복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팔 수 있는 것도 다 팔아야죠. 그 돈을 마련하려면.”
“팔아? 뭐를?”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물건도 팔고, 사람도 팔고, 계열사도 팔아야죠.”
한일권은 코웃음 쳤다.
“너 말 참 쉽게 한다? 그게 쉬웠다면 청일이 자금난에 시달릴 일은 없었어.”
한청호가 청일 호텔과 청일 아파트를 한꺼번에 지으면서 전두호의 군자금을 대던 시절.
자금이 부족해서 계열사를 팔려고 해도 사겠다고 나서는 회사가 없었다.
“제값에 팔려니까 그런 거죠. 계열사를 싼 값에 처분해보세요. 사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걸요?”
“그래서 계열사를 헐값에 처분하라고?”
“공짜면 양잿물도 들이마시는 게 사람이에요. 싼 값이면 너도나도 달려들 겁니다.”
못마땅하다.
한일권의 눈이 죽 찢어질 때였다.
“대통령 손에 공중분해 당하는 것보다 나을 텐데요.”
“재벌 그룹의 힘은 계열사에서 나와. 그런데도 헐값에 팔아치우겠다는 소리가 나와?”
한일권이 눈알을 부라려도 이문복은 꿈쩍도 안 한다.
‘어차피 내 회사도 아닌데. 내가 알 게 뭐야?’
속내를 감추고 이문복은 웃었다.
“한 달 내로 돈을 마련하라면서요? 인수합병이 어디 한 달 내로 끝난답니까? 계약금과 중도금이랍시고 돈을 받아서 일단 대통령에게 건네고 그다음은……. 후후후.”
“그다음엔?”
“입 닦는 거죠. 계약서에 장난을 좀 쳐놓겠습니다.”
돈은 꿀꺽하고, 계열사는 안 넘기겠다는 뜻이다.
이문복의 비열한 웃음에 한일권도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건 좀 마음에 드는데.”
“대통령 눈 밖에만 안 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민사소송? 하라고 하세요. 소송 하는 동안에 일은 다 끝나 있을 겁니다. 계약 중간에 엎어지는 거야 일도 아니고.”
“좋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일이 아닌데도 넘어간다.
이문복은 쾌재를 불렀다.
‘애송이는 어쩔 수 없다니까.’
기업 간 인수합병 절차를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보고 있었다.
그런 일이 했다간 끝이 결코 좋지 않으리란 것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럴수록 이문복의 미소가 진해졌다.
“청일이 만들어내는 제품을 특가 할인을 해서라도 전부 팔겠습니다.”
“할인? 얼마나?”
“반값? 아니, 70% 가격으로?”
“공장 돌린 인건비도 안 나오겠군.”
“급전을 마련하면서, 재고를 처리하고, 또 시장 점유율까지 늘리는 거죠. 일석삼조입니다. 작은 이득에 너무 연연하면 안 됩니다.”
한일권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회사를 아주 거덜을 내겠다는 소리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급전을 마련할 수 있는 겁니다.”
돈이 문제다.
대통령이 돈 내놓으란 소리는 사채업자의 압박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쪽이 마음먹으면 그룹 박살 나는 건 일도 아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어차피 한일권은 출근도 안 한다.
이문복이 대리 결제한지도 벌써 석 달째다.
“부회장 권한을 적극 활용하겠습니다.”
“좋아.”
한일권과 이문복이 악수했다.
꿍꿍이가 완전히 다른 둘이건만 지금은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 * *
다음날 명동의 장수 은행 본점.
이문복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은행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이문복은 장수 은행 간판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세주 은행에서는 청일과 관련된 일에는 절대 끼어들 생각 없다고 못 박았지. 통인 은행도, 제휼 은행도 마찬가지였어.’
벌써 몇 군데 안면이 있는 은행을 돌았던 이문복이다.
하지만 돌아온 건 난감하다는 얼굴로 내놓는 퇴짜뿐이다.
서류를 꺼낼 시간도 없이 거절하더니, 슬쩍 뒷사정을 말해준다.
‘은행 연합회장의 전화가 왔었다지? 거기다 안정우 당선인 쪽에서도 이 일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연락까지 내려왔다고?’
차기 대통령 쪽에서 은행장들에게 전화를 돌린 것이다.
청일 그룹에는 돈을 마련하라면서 정작 은행에는 돈을 내어주지 말라고 하다니.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나.
‘안정우는 청일을 완전히 망가뜨릴 생각이야. 내가 그걸 알면서 청일에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알면 알수록 튀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마지막이다. 장수 은행에서 담판을 짓는다.’
장말동이 돈 냄새를 맡은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다른 은행장들이 입맛만 다시면서 고개를 저을까.
그들의 얼굴에는 아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문복 자신이라도 탐냈을 물건이지 않은가.
‘장수 은행에서도 처분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외국으로 가지고 갈 수밖에.’
이문복은 옷차림을 바로 했다.
결전의 시간이다.
딸랑.
“은행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청일 건설 사장 이문복입니다.”
“은행장님께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송진구가 반갑게 웃으며 이문복을 은행장실로 데려간다.
장말동이 은행장실에서 이문복을 맞았다.
“그래, 청일 건설 사장님께서 우리 은행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
“좋은 제안을 건네려고 왔습니다.”
“청일 건설이 요즘 많이 힘들다며? 돈 빌려달라는 소리를 좋은 제안이라고 번드르르 하게 포장하는 건 아니겠지?”
“돈 빌려달란 소리는 안 할 겁니다. 대신 뭘 좀 팔려고 왔습니다.”
“팔아?”
“아시면서. 그래서 전화 돌리신 거 아닙니까?”
이문복이 푹신한 소파에 앉는다.
장말동이 황급히 송진구에게 외쳤다.
“귀한 손님 오셨다! 건너 다방 가서 마실 것 좀 사와! 난 쌍화차. 이 사장은?”
“저도 같은 것으로 하죠.”
“쌍화차 둘!”
송진구가 쌍화차를 사오기도 전이다.
이문복이 서류 가방을 열었다.
“청일 호텔입니다.”
“어디 보자.”
장말동이 안경을 쓰고 서류를 들여다본다.
“비싸. 누가 이 금액에 사겠나?”
처음부터 어깃장이다.
‘청일 호텔을 노리고서 전화 돌린 것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이문복은 억지로 웃었다.
물건을 팔 때는 자존심도 함께 팔아야 하는 법이다.
“을지로 대로변에 위치한 청일 호텔입니다. 그곳 상권이 얼마나 잘 발달했습니까? 그런 요충지에 이 정도 규모 땅이 쉽게 나오겠습니까?”
박정환이 국립도서관을 강제로 남산으로 옮기고, 잘 나가던 반도 호텔까지 밀어냈다.
청일에 넘겨준 땅은 노른자 중에서도 노른자였다.
그리고 바로 그 옆 땅 3,200평은 태수의 땅이기도 했다.
“게다가 무려 38층의 1,500여 개의 객실을 보유한 최고급 호텔입니다. 급하게 처분하지 않았더라면 최소 두 배 가격은 더 받았을 호텔입니다.”
“두 배 같은 소리하네. 지금 이 금액에서 반값이면 모를까.”
장말동은 코웃음 쳤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청일 호텔이야. 사들여봤자 언제 다시 문을 열지 기약도 없지 않나. 한 마디로 돈이 안 된다는 소리지.”
청일 호텔 참변으로 박정환과 전두호, 차기범 뿐만이 아니라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그걸 조사하느라 청일 호텔은 통째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게다가 청일 호텔 참변 때 일어난 화재로 7층까지 타버렸지. 그걸 다시 새로 단장하려면 돈이 오죽 많이 들겠나?”
장말동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반값으로 하자고. 우리 장수 은행 아니면 사줄 곳이 없다는 건 자네도 잘 알 텐데.”
“끄응.”
“못 믿겠나? 어디 자네 앞에서 은행장들한테 전화 한 번 더 돌려?”
장말동은 대한 은행 연합회 회장이었다.
전국 은행 연합회의 우두머리란 소리였고, 은행장들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위치라는 소리였다.
‘이럴 줄 알았다. 날도둑놈 같으니라고. 청일 호텔 부지 값도 안 되는 돈으로 그걸 홀랑 처먹겠다고.’
이문복은 청일 호텔 매각에 관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아까웠다.
장말동은 딱 잘라 말했다.
“싫으면 말아. 반값 이상으로는 어림도 없으니까. 어디 제 값 받고 팔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지금 현금을 제일 많이 보유한 은행은 단연 장수은행이었다.
장말동은 과거 대한민국 최대의 사채업자로 이름을 날리던 명동 큰손이었다.
이문복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내 호텔도 아닌데 뭐. 빨리 팔아서 한 몫 단단히 챙겨서 튀자.’
한 달 내에 재산을 처분하고 튀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그럽시다.”
“좋아. 청일 호텔을 인수하지.”
“청일 호텔 말고 청일 건설에서 보유하고 있는 땅이 좀 더 있습니다.”
“그것도 싸게 넘길 텐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이문복이 은근하게 말했다.
“매각 금액은 여기에 넣어주십시오.”
“이건 차명 계좌가 아닌가?”
“청일 건설 계좌로 돈 넣지 말란 소립니다.”
세무조사 나오면 빼도 박도 못 할 테니까.
지금은 금융실명제가 시행되지 않은 때였다.
다들 차명계좌 이용해 뒷거래 하는 게 성행했다.
‘회사 돈을 박박 긁겠다고 큰소리치긴 했지만, 그래도 흔적이 안 남는 게 더 좋지.’
한일권은 절대로 찾아내지 못할 계좌로 돈을 빼돌리겠다는 뜻이었다.
장말동은 속으로 감탄했다.
‘강태수, 그 또라이 놈이 말한 그대로 흘러가는구나.’
어제 강태수의 전화를 받았다.
-즉시 은행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청일 그룹과 관련된 어떤 거래도 불허하라고 연락해주십시오.
그래서 전화를 돌렸다.
-그러면 이문복이 어르신을 만나자고 제 발로 찾아갈 겁니다.
-청일 그룹이 보유한 부동산과 재산들을 처분할 겁니다.
-매각 금액을 차명 계좌로 넣어달라고 청탁하겠죠.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강태수, 이 귀신같은 놈은 참 신통하기도 하지. 전화 몇 통으로 청일 그룹의 부동산을 아주 헐값에 후려쳐 가져가는구나.’
청일 호텔은 바로 태수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장말동은 태수가 일러준 대로 말했다.
“좋아. 차명 계좌로 넣어주지.”
-차명 계좌로 넣어주십시오. 그래야 일이 더 쉽습니다.
-왜? 그거 찾는 거 생각보다 힘들다. 경찰 수사에도 잡히지 않고…….
-청일 건설 계좌로 넣는 것보다 더 쉽게 빼앗아 수 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런데 자네가 가져온 게 부동산이 전부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이문복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서류 가방을 열었다.
장말동이 눈을 빛냈다.
‘옳지! 강태수 고 녀석이 노리는 것이 드디어 나왔구나!’
한청호나 한일권이라면 절대로 팔지 않았을 물건이 이문복의 손에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