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목표는 청일 건설(1)
한일권은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돈을 도로 토해 놓으라고요?”
“자네 아버지가 수완이 참 좋았던 모양이야.”
안정우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 많은 돈을 담보도 없이, 무이자로 빌린 데다, 상환 기한까지 훌쩍 넘겼음에도 여태껏 별 탈이 없다니. 보통이 아니잖나.”
“당선인!”
“자네도 봤으니 알겠지? 이 나라 100대 그룹 재벌들에게 줄줄이 국토 개발 공사를 나눠 준 참이야. 그걸 다 무슨 돈으로 추진하겠나?”
재벌 기업들이 미쳤다고 국토 개발을 공짜로 하겠나?
떨어지는 콩고물 때문에 저리 달려드는 게 아닌가.
“국토 개발한답시고 대통령이 되자마자 세금부터 올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내 공약은 알고 있겠지?”
안정우는 국민들에게 세율 낮춘다고 공약했다.
의료 보험도 확대하고, 고등학교까지 무상 교육을 해 준다고 하지 않던가.
그것만으로도 국고가 텅텅 빌 참이다.
“빚이라도 내서 일해야 할 상황이야. 그런데 해묵은 빚을 받아 낼 곳이 있네? 내가 마다할 필요 있겠나?”
“그래서 청일에 빚을 받아 내겠다는 겁니까?”
“그럼 이대로 정부 돈을 꿀꺽할 셈이었나?”
청일 호텔을 짓고, 전두호에게 군자금을 내놓고, 그 와중에 청일 아파트를 짓고.
없는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겠나.
하지만 돈 내놓으라는 사람이 차기 대통령이라면?
어떻게든 만들어 바쳐야 하는 법이다.
“아버지를 특별 사면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 돈, 도로 토해 놓겠습니다.”
“내가 왜 그런 일로 자네와 실랑이해야 하지?”
안정우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어.”
뒤에 생략된 말은 한일권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일권이 즐겨 쓰던 협박이었으니까.
-다음에는 말로 끝나지 않아.
-감당할 수 있겠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한일권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을… 주십시오.”
“상환 기일은 애초에 지났어. 하지만 한두 푼도 아니니까 내가 사정을 한 번만 더 봐주지.”
안정우가 딱 잘라 말한다.
“내 대통령 취임식 날까지, 무조건 가져와.”
안정우의 대통령 취임식까지는 고작 한 달밖에 안 남았다.
* * *
한일권을 쫓아낸 후.
금산 호텔 7층 VIP룸에는 여전히 태수와 안정우가 남았다.
안정우는 태수의 잔 가득 술을 따라 주었다.
“자네 말대로 한일권이란 놈, 쓰레기 냄새가 풀풀 풍기는 친구구만.”
태수는 술을 마셨다.
한일권의 일그러지던 표정이 생각난다.
독한 양주마저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진다.
“청일이 한 달 내에 어떻게 돈을 마련해 올지 궁금하군. 돈 나올 구석이 그리 많지 않던데 말이야.”
청일의 자금 상황을 손바닥 보듯 보고 있다.
“계열사 한두 개 파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그것도 헐값에 팔아 치워야 겨우 한 달이란 시간을 맞출 수 있겠지.”
창백하게 질리던 한일권의 안색이 떠올랐다.
태수는 술이 달아서 한입에 털어 넣었다.
“자네가 시키는 대로 했지만 도통 알 수가 없군. 대체 어쩔 생각인가?”
“청일 건설을 부도시킬 생각입니다.”
“청일 건설을?”
왜 하필 청일 건설인지는 안정우도 잘 안다.
“청일의 지주 회사를 건드릴 생각이군. 지주 회사가 무너지면 청일 그룹 전체가 도미노처럼 쓰러질 테니까.”
한청호는 건설에서 시작해 재벌이 된 사람이다.
한일권을 차기 그룹 총수로 염두에 두고 한 일이 바로 청일 건설 사장으로 앉힌 것이다.
‘건설은 정부의 이권을 따내기 가장 좋은 분야다. 또한 검은돈을 세탁하기에도 안성맞춤이지.’
땅 아래 파묻는 토목 공사에 얼마가 들어가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위층의 돈을 세탁하고, 뒤처리를 도맡아 하고, 그들과 이권을 나누고.
그렇게 회사가 크고, 인맥이 늘고, 로비가 시작된다.
“반대로 말하면 청일 건설이 무너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텐데. 지주 회사는 어떻게든 지키려고 들 것 아닌가.”
“청일 건설은 반드시 무너질 겁니다.”
태수는 확신하고 있었다.
안정우는 반신반의했다.
“다른 계열사를 헐값에 정리해서라도 그룹 전체가 공중 분해되는 것만큼은 필사적으로 막을 텐데?”
“보통은 그렇게 나오겠죠.”
태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양주를 마셨다.
“하지만 지금 청일 회장은 한청호가 아니고, 청일 건설에는 이문복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직도 안정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문복은 금산의 장준용이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아닌가.
금산 건설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낸 유능한 인재였다.
그런 자가 청일 건설에 있으니 더욱 망하기 어려울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태수는 자신만만했다.
“두고 보십시오. 청일 건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태수의 말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은 적?
없다.
안정우는 더 이상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되겠지.”
태수가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 것이란 것을 안다.
* * *
거하게 취한 안정우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내가 자네 덕을 톡톡히 보는군. 하하하, 내가 대통령이 되다니.”
안정우가 소파에 몸을 깊이 묻으면서 크게 웃었다.
주량이 상당한 안정우가 취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재벌들이 안정우의 눈에 들고 싶어서 저마다 축하주를 올렸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적극 협조한다고 약속했어. 그리 오랫동안 추진해 왔던 국토 개발과 나라 발전이 이리도 쉽게 이뤄질 일이었나 싶다.”
안정우는 오랫동안 음지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해 왔다.
하지만 매번 친일파 놈들에게 번번이 막혔다.
그들은 기득권 세력이었고, 권력과 돈과 영향력이 있었으니까.
오히려 몸을 숨기고, 세력을 숨기고, 정체를 숨겨야 하는 건 안정우였다.
그 서러움이 얼마나 뿌리 깊고 오래됐던가.
“나는 친일파 잔당들을 척결해야 해.”
안정우의 오랜 꿈이자 안정우 가문의 숙원이었다.
광복이 된 이후 지금까지도 안정우가 힘써 왔던 모든 것이었다.
“부끄러운 과거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미래도 없어.”
안정우가 태수를 돌아보았다.
“큰 뜻을 펼쳐 볼 생각이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자네 덕분이지.”
안정우가 중도에 포기하고, 좌절하고, 체념했을 때.
그를 일으켜 세워 줬던 자가 누구인지 안다.
장애물을 누가 전부 치워 줬는지 안정우가 왜 모르겠는가.
“고맙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까지 전부 치워 준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
안정우가 태수의 어깨를 토닥인다.
“이번에는 내가 자네의 앞길을 열어 주지.”
안정우는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보았다.
박철완이 고심하여 그려 냈던 지도였다.
재벌들에게 국토 개발의 이권을 떼어 주던 표시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남 개발은 자네 손으로 해야지.”
태수의 꿈을 안정우가 알고 있다.
술 취한 안정우가 비틀대며 지도 앞에 선다.
펜을 꺼내어 강남 부분을 탁탁 친다.
“강북과 강남을 잇는 다리, 한강 변에 만드는 산책로와 공원, 전부 자네가 맡아.”
안정우는 일부러 강남 쪽은 재벌들에게 떼어 주지 않았다.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아직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강남 3구는 태수의 몫이었다.
“자네는 이곳에 커다란 종합 병원을 짓겠다고 했었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학교와 도서관 역시 잘 부탁하네.”
안정우가 슥슥 빗금을 친다.
병원과 학교, 도서관이 들어갈 자리였다.
“으음, 또 뭐가 더 있더라. 아!”
안정우가 펜을 입에 물고 한참이나 고심하더니 크게 원을 그린다.
서울 전역을 빙 두르는 커다란 원이었다.
“지하철도 자네가 맡아.”
김종표가 했던 제안은 그저 위기를 넘기기 위한 사탕발림이었다.
태수에게 정말로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정우는 진심이었다.
“청일 호텔도 지었는데, 태양 호텔도 지어야지. 호텔은 어디에 지을 텐가?”
“강남 3구에 하나씩 짓겠습니다.”
“좋아! 그러고 보니 아파트도 있었지! 대치동으로 끝나서야 되겠나? 한강 변을 따라 이렇게…….”
안정우가 한강 변에 동그라미를 치고 있다.
“한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목 좋은 곳에 아파트를 짓는 거지. 태양 아파트는 강남 아파트를 대표하는 최고급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가 될 거야.”
안정우는 동그라미를 친 부분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본다.
“어떤가?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듭니다.”
태수는 안정우가 덧그리는 강남 지도를 보았다.
‘강남, 아직 개발되지 않은 황금의 땅은 이제 내가 만든다.’
과거 청일 그룹이 차지했던 땅이었다.
정부를 통해 이권이란 이권은 전부 따낸 한청호의 업적이었다.
그로 인해 청일은 대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청일 아파트가 들어서야 했던 곳에는 태양 아파트가 들어섰다.’
강남 대치동에 들어서는 최대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
대한민국 교육의 메카가 되는 그곳은 태양 아파트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청일이 차지했던 영광을 모조리 가져올 것이다.
* * *
청일 그룹 본사.
어둠이 깔린 지금 이 시간에도 청일 빌딩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지금 시각은 9시 20분.
청일 직원들은 연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야근으로 바빴다.
“어떻게 된 게 다들 하는 연말 회식도, 망년회도, 보너스도 없네요.”
“매일 철야 근무를 요구하면서 월급은 삭감되고. 휴우-”
“이번에 그룹 차원에서 한 대규모 구조 조정 때문에 반 이상이 해고됐잖아요.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처지가 됐으니.”
“나 잘리면 우리 가족 길바닥에 나앉아야 돼. 더러워도 참아야지 어쩌겠어.”
석유 파동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청일 그룹이다.
청일의 호랑이라 불리며 임원 장악력을 행사하던 한청호마저 감옥에 가고 말았다.
알짜배기였던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도 넘어가고, 청일 호텔은 개장 직후에 문 닫았다.
거기에 목돈이 들어오기로 예정되었던 청일 아파트는 분양 실패.
청일은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 나도 태양 그룹으로 이직하고 싶다.”
“태양 그룹? 왜 하필 태양 그룹이야? 석유 팔려고?”
“모르세요? 우리 회사에 유능한 직원들 전부 태양 그룹에서 빼 갔잖아요.”
“어? 거기가 태양 그룹이었어?”
“청일의 계열사마다 임원진 구멍이 숭숭 난 것도, 날고 기는 유망주들이 전부 이직한 것도, 전부 태양 그룹 스카웃 팀에서 데려갔다던데요.”
청일의 힘은 든든한 인재에서 비롯되었다.
한청호 회장은 로비를 통해 굵직한 일감을 따오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경영을 잘하는 임원진들이 알아서 청일을 굴렸다.
덕분에 청일이 여기까지 클 수 있었다.
그런데 청일의 인재들만 쏙쏙 빼 가는 태양 그룹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청일은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변화는 직원들이 제일 체감하고 있었다.
“요즘 회사 전체가 엉망진창이야.”
“유능한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가니까 일은 제대로 되지 않고, 매일 죽도록 철야해도 성과는 나오지 않고, 죽겠네요.”
그때 살벌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닥쳐.”
수군대던 직원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한일권이 눈알을 번뜩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직원들은 후다닥 도망갔다.
“저 새끼들 전부 잘라.”
장 비서는 난처했다.
“입을 함부로 놀린 죄로 해고하는 것은 좀…….”
“잘리기 싫었으면 입조심을 했어야지. 잘라. 두 번은 안 말해. 너부터 잘라 줘?”
“…알겠습니다.”
인재를 박박 긁어모으던 한청호와는 너무도 다르다.
한일권은 사람 아낄 줄을 몰랐다.
한일권이 지나가는 길에는 찬바람만 쌩쌩 불었다.
* * *
청일 그룹 본사 청일 건설 사장실.
이문복도 철야 근무 중이다.
청일 건설 사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야? 노크도 없이!”
“나다.”
“회, 회장님 오셨습니까?”
이문복이 벌떡 일어났다.
한일권은 신경질적으로 상석 소파에 앉았다.
이문복은 어쩔 수 없이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그 곁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한경련 모임에 다녀오신다더니.”
“거기서 안정우 당선인을 만났어.”
“당선인을요?”
생전 오지도 않던 그룹 본사에 얼굴을 비춘 이유로군.
그것도 9시가 넘어서.
‘기쁜 소식이 아니라면 지금 시각에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문복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린다.
한청호가 얼마나 로비를 잘해 왔는지 금산 건설에 있던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한 회장님이 무명 정치인까지 후원해 주셨나 봅니다. 그래서 혹시 괜찮은 이권을 약속받았다거나…….”
“아버지가 정부에 빌렸던 돈을 도로 토해 놓으라더군.”
“네?”
“대통령 취임식 전까지, 무조건.”
“네에? 그 엄청난 돈을 전부요?”
대통령 취임식 전까지 이제 한 달 남았다.
“무리입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때까지 돈을 마련할 수 없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해야 해. 대통령이 못 박은 일이야.”
“계열사를 몇 개나 제값에 팔아 치워도 불가능한 일을…….”
“방법을 찾아. 똑똑한 놈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네?”
이문복은 깨달았다.
어째서 한일권이 지금 이 시각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불가능한 임무를 강제로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이문복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머리를 굴렸다.
‘튀자!’
금산 건설도 배신하고 나왔다.
청일 건설엔 미련도 없다.
‘내가 빈손으로는 못 나가지.’
이문복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