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아버지는 안녕하신가 (1)
미국 록펠러 가주의 집무실 왼쪽 방문 앞.
록펠러 가주의 총괄 집사는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똑똑똑.
총괄 집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들이 재빨리 인사한다.
[자네들은 잠시 나가 있게. 가주님과 독대해야겠으니.]
손짓으로 의료진들을 물린 총괄 집사.
생명 유지 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록펠러 가주가 눈을 돌렸다.
근래 들어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은 가주였으나, 오늘은 다행히도 깨어 있었다.
[엘리스 아가씨께서 보내오신 기쁜 소식입니다.]
아픈 손가락인 막내딸이 기쁜 소식을 보내왔다고 한다.
록펠러 가주의 눈빛에 기력이 돌아온다.
[대한민국 앞바다에서 석유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석유가……?]
[예. 막대한 양입니다.]
[예상 추정량은……?]
[현재 추정량은 약 600억 배럴 정도입니다. 하지만 최대 1,000억 배럴까지 예상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록펠러 가주의 눈이 커다래진다.
주인의 얼굴에 기쁨과 놀라움이 번지자, 총괄 집사 역시 신나서 보고를 이었다.
[현재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의 석유 가채 매장량이 약 2,700억 배럴입니다. 체감이 되십니까?]
총괄 집사가 록펠러 가주와 독대를 결심한 이유였다.
[우리 엘리스 아가씨께서 참여하신 해상 유전에서 대박이 터진 겁니다.]
록펠러 가주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아가씨께서 이 모든 공을 홀로 독차지할 수 있을 겁니다. 록펠러 가문 사람들 중에 가장 독보적인 실적을 증명하셨어요.]
평소 차분한 총괄 집사답지 않다.
매우 흥분한 총괄 집사의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했다.
[투자 실적만으로도 이미 형제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셨죠. 그런데 이번에는 석유까지! 누구도 아가씨의 능력을 폄하하진 못할 겁니다.]
엘리스는 사생아에다 여자라는 핸디캡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모친까지 일찍 작고했으니 지켜 줄 뒷배가 없었다.
그러니 뛰어난 능력과 명철한 두뇌를 가지고서도 가문에서 배재되었다.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을 표방하는 가문답게 록펠러 가주는 알면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회는 더욱 냉정하고 잔혹하기에.
어리광쟁이보다는 악바리가 낫다고 여기며 일부러 눈을 감고 내버려 두었다.
[다행이군…….]
딸은 그 모든 것을 이겨 내고 훌륭하게 홀로서기를 해내고 있었다.
기특했다.
[운이 좋았어…….]
[운이 아니고 능력이 좋으신 겁니다. 엘리스 아가씨가 얼마나 영특하고 똑 부러지는 분인지는 가주님께서도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자를 만났다… 그게 운이다…….]
록펠러 가주는 태수를 떠올렸다.
‘보통 비범한 놈이 아니었지. 내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어. 오히려 날 꿰뚫어 보던 그 눈빛은 애송이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눈은 많은 것을 알려 준다.
태수의 눈엔 지혜와 노련함, 배짱과 독심이 함께하고 있었다.
‘능히 한 시대를 호령할 인물이야.’
그런 자가 엘리스 곁에 붙어 있다.
그러니 일이 이렇게 쉽고 빠르게 진척된 것이리라.
‘엘리스가 똑똑하다고 하나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는 그릇은 아니지. 분명 그자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을 터.’
록펠러 가주는 태수의 행보가 궁금했다.
[강태수는 이번 일로 한국을 한 손에 틀어쥔 모양입니다.]
놀라웠다.
[석유는 아직…….]
[석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터뜨린 록히드 게이트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말고.
그가 내민 서류를 보고 총괄 집사가 경악하던 표정까지 똑똑히 기억한다.
아주 유쾌하고 즐거운 순간이었다.
[한국에서는 록히드 게이트가 터지지 않았습니다.]
록펠러 가주는 바로 알아들었다.
태수가 일부러 한국의 록히드 게이트를 덮어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그 이유까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노련해… 영악하게도…….]
록히드 게이트와 맞바꿔서 한국 고위 공직자와 유력 인사들을 포섭한 것이다.
그 선택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독불장군은 결국 뭇매를 맞고 몰락하는 법이니까.
[일본 전역을 들쑤셔 정치권 물갈이하느라 정신없도록, 석유 사업에 손대지 못하도록 수를 쓴 겁니다. 심지어 그 와중에 교란책까지 쓰다니. 정말 대단한 책략가입니다.]
일부러 세계 전역을 뒤흔들 엄청난 스캔들로 판을 키워 버렸다는 말이다.
‘내가 엘리스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시간을 벌어 주는 것뿐이겠지.’
록펠러 가주가 악착같이 목숨 줄을 붙들어 매는 이유였다.
어린 막내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차기 가주가 되기 위해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아이이건만, 그걸 증명해 낼 시간이 아쉬울 뿐이다.
[아낌없이 지원하도록…….]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늙은 아비는 돈으로, 힘으로, 인맥으로.
모든 수완을 다 동원할 것이다.
딸을 위해 아낌없이 꽃을 공수해 줄 작정이다.
그러면 딸이 걸어갈 꽃길은 강태수 그자가 깔아 줄 것이다.
‘이왕이면 내 딸이 차기 가주가 될 마지막 조건까지 강태수가 채워 주면 좋으련만.’
자식 중에 가장 뛰어난 딸.
지금까지 본 젊은이 중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인 강태수.
‘그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얼마나 대단한 놈이 나올까. 내가 그 아이까지 보고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을.’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해 보는 록펠러 가주였다.
* * *
한국은 발칵 뒤집혔다.
<제주 앞바닥에서 석유가 콸콸콸.>
<선거 유세장에 모여든 국민들의 폭발적인 반응.>
<안정우를 차기 대통령으로! 민심이 하늘을 찌르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발표한 석유 소식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날마다 제주 남해상의 석유 시추 장면을 띄웠다.
거리에서도 온통 석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나 태양 그룹 주식 샀다. 너도 얼른 사.”
“태양 그룹이 뭐 하는 기업이야? 난 처음 듣는데.”
태양 그룹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태양 그룹이 단독으로 석유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태양 그룹 홍보실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리는 이유였다.
* * *
금산 호텔 7층 홀.
오늘은 한경련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이번에 김종표와 박 터지게 싸웠는데, 결국 우리가 이겼군요.”
“석유 터졌단 발표가 나온 시점에서 이미 게임은 끝났지.”
“김종표가 박정환 암살 사건으로 끌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는데, 아무도 그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군요.”
“정치 인생 끝난 퇴물에게 누가 관심을 기울인단 말인가?”
무려 대통령 권한 대행이던 자가 전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대체 김종표는 왜 재벌들 심기를 건드린 겁니까? 재벌들도 평소와 달리 왜 정부와 전면전을 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금산 호텔에서 김종표와 재벌들이 맞붙은 일에 대해 듣지 못했나?”
“허어. 김종표와 재벌 싸움이 거기서 시작됐습니까?”
록펠러.
재벌들을 말 몇 마디로 부리던 록펠러의 위세가 정말로 대단하지 않던가.
김종표가 록펠러 눈 밖에 난 순간부터 예고된 말로였다.
“록펠러가 진즉 석유 냄새를 맡은 게 확실해.”
“제주도까지 개발한다더군요.”
요즘 재벌들의 관심은 온통 석유와 제주도 개발에 쏠렸다.
“우리도 개발 과정에서 한자리 얻었으면 좋겠는데요.”
“석유 산업항이라는 게 한두 푼 드는 일도 아니고. 자리는 빌 거야.”
“전 제주도 호텔과 리조트 사업에 뛰어들 생각입니다.”
“제주 공항은 확장 공사는 안 하려나? 난 그쪽에 더 관심이 많은데.”
“그것보다야 쇼핑 센터와 물류 센터가 더 흥미롭지 않습니까?”
제7광구의 송유관이 필연적으로 거쳐 가야 하는 곳은 제주도다.
그러니 다들 눈이 벌게져서 제주도 개발 사업에 한 발 걸치고 싶어 했다.
사업 얘기에 흥분한 사람들과 달리, 한일권은 불편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 난리야? 그냥 운이 좋았던 거잖아.’
한국 재계 서열 13위인 청일 그룹의 새로운 총수 한일권.
아버지인 한청호가 감옥에 간 이후 처음으로 한경련 모임에 나왔다.
그런데 모두 강태수 얘기만 하는 게 아닌가.
‘강태수는 고작해야 재계 서열 163위! 나는 재계 서열 13위 청일 그룹 총수!’
그런데 그 누구도 한일권에게는 관심 한 조각 비치지 않는다.
‘하다못해 아버지의 안부조차 묻지 않다니. 이런 철면피 똥파리 새끼들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연히 한일권의 표정은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일권은 시계를 보았다.
‘다들 잡담만 하면서 회의할 생각조차 하지 않네. 이럴 거면 대체 왜 모인 거야?’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태양 그룹 강태수 회장이다!”
시선이 일제히 한곳에 몰렸다.
저벅저벅.
태수가 7층 홀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수 뒤를 따르던 김광록과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복도에서 걸음을 멈춘다.
비서와 보좌진들은 태수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곤 아래층 홀로 내려간다.
태수만이 7층 홀 안으로 들어선다.
“강 회장, 이쪽이야.”
금산 그룹 총수이자 한경련 회장인 장준용이 벌떡 일어나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삼청 그룹 이병춘 회장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회의를 시작하지.”
이병춘이 직접 옆자리 의자를 빼며 태수에게 자리를 권한다.
우아하고 칼 같이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저 자리가 강태수 자리였군.’
‘이병춘이 일부러 옆자리를 챙겨 주다니. 이제 보니 생각보다 거물이었어.’
눈치 빠른 사람이 벌떡 일어나 갑자기 기립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태수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석유 개발 성공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체면보다는 이득이 먼저였다.
그러자 권력과 돈 냄새를 맡은 똥파리들이 한꺼번에 합세했다.
다들 너 나 할 것 없이 기립 박수를 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합니다, 강 회장님.”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강 회장님.”
모두 석유 의존도가 높은 회사를 가지고 있는 재벌들이다.
괜히 작은 일로 태수의 눈 밖에 나서 곤란한 일을 겪기 싫었다.
태수의 눈에 들어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받아먹고 싶었다.
‘이렇게 환영받을 일은 아닌데. 당황스럽군.’
평소의 태수라면 손사래 치며 겸양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일권을 본 순간 태수는 입을 다물었다.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는데, 한일권 혼자 자리에 앉아 태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권.’
태수는 말없이 한일권을 내려다봤다.
태수와 한일권의 거리는 20미터 정도.
한일권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뭘 꼬나봐?”
금산 호텔 7층 홀이 조용해진다.
사람들은 당황하여 막말을 지껄인 한일권을 봤다.
태수는 여전히 말없이 자리에 서서 한일권을 내려다본다.
한일권은 혼자 자리에 앉아서 태수를 노려보았다.
옆 사람이 한일권의 등을 툭 쳤다.
“자네 지금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분위기 파악? 바나나 떨어지길 바라는 미친 원숭이처럼 박수 쳐 대는 거? 그게 한경련 분위기인 줄은 몰랐네?”
좌중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싸했다.
“다들 쪽팔리지도 않나? 무슨 대단한 사람 나오셨다고 이 난리야?”
“어허, 이 사람이!”
“강태수, 네 입으로 말해 봐. 너 그렇게 대단한 놈이야?”
태수는 차갑게 웃었다.
“아버지는 안녕하신가?”
한일권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지금껏 한 사람도 묻지 않던 아버지의 안부를 태수가 물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