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록펠러가 깔아 준 깽판(3)
정작 말을 꺼낸 김종표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설마 하고 던져 본 말이었으나 내심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부정하고 싶었다.
‘록히드 게이트라니! 그런 엄청난 일을 이런 애송이가……!’
록히드 게이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졌던가.
결국 미국 상원 의원까지 매수하여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아무리 록펠러 가문과 끈이 닿아 있다고 해도 안 되는 일이었다.
‘록펠러의 가주를 제 입맛대로 움직이지 않고서는……!’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김종표의 안색이 변한 이유였다.
“…아니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그럼 운이 좋아서 한국에서만 록히드 게이트가 비켜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 김종표가 잘 안다.
국방비 지출이 많은 한국이다.
록히드 회사의 로비 리스트에 안 올랐을 리가 없다.
‘누군가 일부러 틀어막지 않고서는……!’
김종표는 눈을 부릅떴다.
태수는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다들 무척 고마워하더군요.”
태수가 일부러 덮어 줬다는 뜻이다.
‘맙소사!’
김종표는 신음을 흘렸다.
‘대체 난 어떤 폭탄을 건드린 것인가. 록히드 게이트를 마음대로 터뜨리고 덮을 수 있는 놈을 상대하고 있었다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런 수완이 있는데, 왜 굳이 덮어 둔 건가?”
“이유를 짐작하고 계실 텐데요.”
태수가 오히려 김종표를 시험하고 있었다.
박정환의 지낭이라는 자가 어디까지 머리가 굴러가는지를 가늠하고 있다.
김종표는 소름이 끼쳤다.
“그래, 한국 역시 다른 나라들처럼 록히드 게이트에 연루되었다면 이로 인해 곤욕을 치러야 했을 사람들은 전부 고위 공직자가 아니면 영향력이 막강한 유명 인사들이었겠지.”
계속해 보라는 저 눈빛.
윗사람이 아랫사람 내려다보는 듯이 여유로운 저 눈빛.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한없이 깊고 날카로운 저 눈빛.
애송이의 눈빛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다른 나라들처럼 록히드 게이트가 터졌다면 한국 정부는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많은 이들이 휘말렸을 터. 바꿔 말하면 그 많은 자를 모두 자네 수중에 넣었다는 뜻이고.”
태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제대로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김종표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자네는 록히드 게이트를 덮어 주는 대가로 이들을 포섭했겠군. 그들의 약점을 잡은 거야.”
공화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재벌과 고위공직자 중앙 정보부, 군대까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김종표를 밀어내고 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럼 목표는 무엇이겠나.
“왜 하필이면 나인가? 태양 아파트 때문에 자네 심기를 거슬려서?”
틀렸다.
김종표는 애초에 태수의 목표가 아니었다.
태수의 엄중한 눈빛을 읽은 김종표는 부르르 떨었다.
“설마 내가 목표가 아니었나?”
김종표는 고개를 들었다.
혼란스러운 김종표와 달리 태수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감정이 전혀 비치지 않는 눈이었다.
김종표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애초에 나는 자네 상대조차 아니었다는 소린가? 그렇다면 왜 날 이렇게까지…….”
문득 떠오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강태수가 유일하게 적대적인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던 자.
“한청호.”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한청호와 오랫동안 깊이 얽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군.”
김종표는 박정환의 지낭으로서 경제 개발 계획을 주도했던 자다.
실무만큼 권한을 주지 않았지만 국토 개발이며 나라 발전 계획을 세우는 데 이권이 빠질 리 있겠는가.
더구나 박정환의 견제를 강하게 받는 처지라 모두 겉으로 얽히기 꺼려 했던 김종표가 아닌가.
한청호가 뒤로 얼마나 공을 들이며 뇌물을 썼겠는가.
“내가 청일에 이권을 몰아줬지. 재벌 총수치고는 경영보다 로비에 더 출중한 한청호가 재벌 총수로 클 수 있었던 데엔 내 경제 개발 계획이 절대적이었어.”
일부러 목 좋은 곳을 골라 청일에 내어 주었다.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가 유독 입지 좋은 곳에 위치한 이유였다.
경제 개발 계획을 짤 때부터 청일이 득을 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
청일이 가진 땅을 가로질러 길을 내주고, 중장비 공업 육성책을 짤 때는 최우선적으로 지원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한청호를 찾아가 특별 사면까지 약속했지. 그러니 자네의 눈 밖에 난 것은 당연했겠어. 하하, 하하하.”
김종표는 맥이 탁 풀렸다.
한청호의 몰락을 떠올림과 동시에 또 하나 떠오르는 가설이 있었다.
김종표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설마… 박정환과 전두호를 그래서 치워 버렸나? 한청호 때문에?”
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무언의 긍정이라는 걸 알 것 같다.
소름이 돋았다.
“제정신이 아니군. 한청호 한 명을 몰락시키자고 한청호의 방패막이가 될 것 같은 거물들을 한꺼번에 제거해 버렸다고?”
김종표가 입을 떡 벌렸다.
태수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혹시……. 같은 이유로 이번에는 내 방패막이가 될 것 같은 일본을……?”
유독 일본에 록히드 게이트를 크게 터뜨린 이유가 무엇이겠나.
김종표는 바로 답을 도출할 수 있었다.
“겸사겸사 내 뒷배를 치우고, 또한 자네의 석유 개발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손을 쓴 거야. 일본이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못하도록!”
김종표는 못 믿겠다는 듯 태수를 보았다.
“스케일이 황당할 정도로 크군. 고작 그런 일로 국가가 마비될 정도로 커다란 사건을 연달아 터뜨리다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다.
어째서 김종표를 박정환의 지낭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태수는 시계를 보았다.
1분 남았다.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용건?”
김종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태수를 만난 후 용건이 바뀌었다.
사실 이곳엔 태수 때문에 잘못 꼬인 정치 인생을 바로잡고 싶어서 찾아왔다.
강태수를 잘 어르고 달래면 정치 총공세도 잠잠해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살려 주게.”
상대는 어르고 달랠 수 있는 순진한 애송이가 아니라, 이 나라를 뒤흔들 수 있는 막강한 거물이었다.
이미 고위 공직자들을 전부 포섭했고, 국회의 과반을 넘는 공화당 의원들의 약점을 틀어쥔 남자.
박정환의 밀약서를 가지고 있으며 록히드 게이트를 터뜨린 인물.
그런 인물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만 봐줘.”
김종표는 깔끔하게 체념했다.
이미 중앙 정보부를 중심으로 김종표의 4대 의혹 수사가 숨통을 죄어 오고 있었다.
김종표의 최측근들은 하나둘씩 전부 중앙 정보부에 끌려갔다.
김종표에게 정치 자금을 대주던 자들도 자취를 감췄다.
김종표와 함께 일을 도모했던 자들은 전부 등을 돌렸다.
심지어 일본까지 록히드 게이트로 김종표를 내다보지 않는다.
“애초에 자네를 찾아온 건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어.”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왔다고?
그랬다면 애초에 그리 고개 뻣뻣하게 들고 있진 않았겠지.
제안이랍시고 개소리를 지껄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쭙지 않게 협박을 하면서 이죽대지도 못했을 것이다.
“늦었습니다.”
김종표는 예감했다.
자신의 정치 인생이 끝나는 정도로 마무리되지 않을 것이다.
필경 눈앞의 이 남자라면 독하게 끝낼 것이다.
털썩.
마침내 김종표는 태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 따위는 목숨에 비하면 하잘것없다.
“자네의 개가 되겠네. 자네 앞길을 막는 놈들을 내가 죄다 물어뜯겠어. 충성을 다하지!”
“개?”
태수가 눈썹을 올렸다.
청일의 개 취급받던 태수가 아니던가.
청일을 재계 서열 1위에 올려놓자 사냥개 삶아지듯 죽임을 당했던 태수다.
“스스로 개를 자처하는 자를, 나더러 거두어 키우라는 소립니까?”
“짖으라면 짖겠네. 그러니 살려만 주게!”
왈왈대며 짖는 김종표를 보자 태수는 기가 찼다.
김종표는 악착같이 무릎걸음으로 기어 온다.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거네. 나는 박정환의 지낭으로 이 나라의 발전 계획을 세운 사람이야. 앞으로 자네를 위해 내 쓸모를 증명하겠어.”
“필요 없습니다.”
태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저런 자들을 숱하게 봐 왔다.
시커먼 속으로 간사하게 혀를 놀리고, 뒤에서 잔머리를 굴리는 자들.
그들과 얽혀서 좋을 일이 없었다.
“청일!”
결국 한청호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면 한청호를 팔아서라도 살아남아야겠다.
“내가 청일을 완전히 뭉개겠어! 내가 재벌들에게 했던 공세의 화살을 청일에 집중하겠네!”
“시간 다 됐습니다.”
태수는 손을 올렸다.
김종표는 눈앞이 깜깜했다.
재빨리 태수의 바짓가랑이를 덥석 잡았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이대로 내쳐진다면 미래는 뻔하다.
‘한청호 꼴이 날 거야! 그렇게 될 수는 없어!’
한청호가 어떤 일을 당했던가.
중앙 정보부에 끌려가서 오래도록 고문을 당했다.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감옥으로 보내졌다.
감옥에서도 죄질 나쁜 놈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란 것은 김종표가 잘 안다.
‘나까지 그리될 수는 없어!’
김종표는 제 쓸모를 구구절절이 나열하며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태수의 웃음은 차가웠다.
“김종표, 당신은 제2의 박정환을 꿈꾸었지.”
“그래, 자네 앞길을 막는 놈들을 죄다 쳐 죽이겠다고 맹세하지! 박정환 이상으로 잘 해낼 자신이 있네!”
“당신은 절대로 박정환이 될 수 없습니다.”
“왜? 내가 박정환보다 더 유능하고 똑똑해! 나는 박정환이 할 수 있는 일뿐만이 아니라 그가 못했던 일도 처리할 수 있어!”
억울했다.
김종표는 정말로 잘 해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이번 위기만 어떻게 넘기면……! 이 수모는 반드시 훗날 제대로 갚아 줄 날이 돌아올 것이다!’
김종표는 원한을 절대 잊지 않는 자다.
그걸 태수가 모르겠는가.
“왜냐고?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묻습니까?”
태수는 등을 돌려 책상으로 걸어간다.
저벅저벅.
회장실 안에는 태수의 발소리만 난다.
“당신은 신의가 없어.”
박정환은 의심이 많았지만 최고 통수권자의 위엄만큼은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오죽하면 스스로 자신보다 자신의 말을 더 믿으라고 했겠나.
박정환은 한 번 내뱉은 말을 목숨처럼 지키려고 했다.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감수하고서.
태수가 박정환의 라이터를 들고 다녔을 때 사람들이 한 수 접어준 이유였다.
“당신의 충성 맹세는 박정환의 라이터보다도 싸구려야.”
김종표는 앞말과 뒷말이 달랐다.
약속을 한 번도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
틈만 나면 남의 뒤통수 칠 생각이나 하는 자였다.
그랬기에 모략가란 별명이 붙었다.
“한 번만 믿어 주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스스로의 말조차 지키지 못하는 자를 내가 왜 믿어야 하지?”
“박정환이 나를 믿지 못하면서도 중하게 쓸 수밖에 없던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그만큼 내가 유능하다는 소리야. 인재를 고작 그런 일로 버릴 생각인가?”
태수는 자리에 앉았다.
김종표는 바닥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왕좌에 앉은 것처럼 위엄이 흘러넘쳤다.
“쓰레기는 버려야지.”
아무리 비싸고 값진 것이었다고 해도 쓰레기는 결국 쓰레기다.
그건 마치 사형선고와 같았기에 김종표는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똑똑똑.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였다.
그 옆에는 이세후 육군 참모 총장이자 합동 수사 본부장도 함께였다.
“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김종표는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가 입을 열었다.
“김종표, 선택권을 주지. 제 발로 날 따라올 텐가, 아니면 끌려갈 텐가?”
“나는 현 대통령 권한 대행이야! 감히 중앙 정보부 따위가 나를 어찌 조사할 수 있단 말이냐!”
이세후 합동 수사 본부장이 대신 대답했다.
“아직 박정환 대통령 암살 사건은 종결되지 않았거든.”
“난 결백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조금도 연루되지 않았어!”
“그거야 엮기 나름이지.”
이번엔 신지수 중앙 정보부 부장이 대신 대답했다.
“김종표, 이건 당신이 제일 잘 써먹던 수법이잖아. 권력 싸움에서 진 패자의 말로는 정해진 것 아니던가?”
신지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론마저 등 돌린 마당인데 당신 잡아가는 게 뭐가 무서울까?”
“하, 하하하. 여론이 아니라 강태수가 내게 등 돌렸기 때문이잖나!”
김종표는 크게 웃었다.
중앙 정보부 부장과 육군 참모 총장이 지금 이 자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겠나.
이미 태수가 진즉에 불렀다는 뜻이었다.
그건 김종표가 청와대에서 태양 빌딩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어찌 허탈한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나는 지금껏 강태수 네놈 손바닥 위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었구나.”
김종표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내 발로 가겠다.”
사라지는 김종표를 보면서 비서 송창준이 말했다.
“제7 광구 해상 유전 개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석유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김종표의 허탈한 웃음은 미치광이의 광소로 변해야만 했다.
“완패구나. 하하하하!”
이제 누가 있어 강태수의 석유 사업을 막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