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록펠러가 깔아준 깽판(1)
4박 5일 일정이었던 한일 정상회담은 마무리만 남았다.
일본 도쿄 중심가 중에서도 목 좋은 곳에 위치한 열도 호텔.
오늘도 사방에서 몰려든 취재진들로 회담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
엄청난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두 정상은 웃었다.
일본 총리와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 대행 김종표가 카메라 앞에서 악수를 하고, 함께 손을 흔들었다.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보좌관 및 회담 실무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을 비롯해 한국까지 중계하기로 예정된 뉴스였다.
생방송용 카메라를 앞에 두고 리포터들이 저마다 입을 열었다.
[한일 대륙붕 조약에 관한 2차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양국은 대륙붕에 관한 공동 연구와 공동 탐사를 골자로 하여…….]
촤촤촤촤촤촤촤촤촤.
마침내 일본 쪽 행사 요원이 손을 높이 들어 엑스(X) 자로 교차했다.
[취재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철수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은 카메라를 내렸다.
방송용 카메라 역시 마찬가지였고, 마이크도 껐다.
회장 안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졌다.
회담을 이끌던 양국의 대표들은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 * *
열도 호텔 스위트 룸.
일본 총리는 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과 엉덩이에 착 감기는 기분 좋은 쿠션에 몸이 절로 늘어진다.
그제야 경련이 일 것 같은 웃음을 지운다.
[청렴하고 유능한 총리 이미지를 유지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턱 끝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는 일본 총리.
김종표는 어쩔 수 없이 일본 총리의 지시에 따라 앉았다.
일본 총리의 싸늘한 눈빛 속에 질책이 깃들었다.
[내가 자네를 이젠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일본 총리에 비해 김종표는 군인의 정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대화는 당연하다는 듯이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자네가 주도한 밀약이 어그러지게 생겼어. 박정환이 죽었다고 약속을 안 지키겠다는 건 아니겠지?]
[밀약은 계속될 겁니다.]
김종표는 웃었다.
[제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말입니다.]
[차기 대통령? 자네가?]
[밀어주십시오. 총리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안정우란 자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던데. 되겠어?]
비웃음이었다.
일본 총리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그놈이 내뱉는 허황된 공약! 그건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겁니다. 석유? 우리가 지금 그걸 막기 위해서 회담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김종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이미 막다른 길에 몰렸기에 필사적으로 어필한다.
[공화당 의원들의 대다수를 매수했습니다. 통일주체 국민 회의 대의원들을 우리가 선출합니다. 제가 아주 유리한 상황이죠.]
[아, 박정환이 차기 집권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간접선거를 채택했었지.]
[맞습니다. 고작 2,500명 남짓한 선거인단만 매수하면 제가 대통령이 됩니다.]
그럴수록 일본 총리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진해진다.
[고작 2,500명을 매수하는 일에 내가 힘을 보태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대의원들을 자네 쪽에서 뽑으면서?]
무능하다는 소리를 잘도 하는군.
김종표는 입술을 깨물었다.
[포퓰리즘이 왜 포퓰리즘입니까? 인기를 얻기 위해 막말을 내뱉는데, 저도 맞불 놓을까요? 석유 팔아서 다 해준다고 큰소리 뻥뻥 칠까요?]
그건 안 될 말이다.
일본 총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제 처지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전 일본과 한 밀약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족쇄를 찬 겁니다. 이 점은 고려해주셔야지요.]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처지가 비참하다.
‘한청호가 중앙 정부에 잡혀 들어간 게 너무 뼈아프다.’
현 정부의 굵직한 돈줄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능한 로비스트인 한청호가 아니던가.
한청호가 건넨 뇌물 장부로 공화당 의원들을 협박하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저쪽 화력이 더 세다.
‘한청호를 통해 받던 정치 자금이 끊기고, 한청호 인맥으로 매수한 공화당 의원들마저 줄줄이 약점이 잡혀서 등을 돌렸다. 일본이 도와주지 않으면 난 이대로 끝이야.’
김종표가 직접 일본까지 날아온 이유였다.
일본 총리는 일부러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지금 곤란한 처지는 자신이 아니라 김종표일 테니까.
[엄살은 적당히 부려. 그 정도는 스스로 극복해야지. 정치는 남이 떠먹여주는 게 아니란 걸 알 텐데.]
[그렇다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죠. 세력과 세력의 대결. 그게 정치 싸움 아닙니까? 도와주십시오.]
[내가 왜?]
[상대 쪽에서 박정환의 밀약서를 입수했습니다.]
[뭐?]
일본 총리가 눈을 크게 떴다.
예정에 없는 소식에 당황스러웠다.
[밀약서를 입수했다고? 그걸 눈 뜨고 고스란히 빼앗겼다는 말이야? 그게 터진다면 내 정치적 입지가……!]
[그래서 총리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제가 그 입을 다물게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김종표는 재빨리 덧붙였다.
[한국은 지금 대통령 암살로 인한 비상계엄 체제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고 있죠. 언론을 전부 통제하고 있습니다.]
록펠러가 들쑤신 이후, 삼청을 비롯해 한경련에서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김종표는 절대로 차기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재벌들이 똘똘 뭉쳐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김종표는 가장 강력한 수를 썼다.
-비상계엄을 이유로 한 언론과 정보 통제!
-국세청과 검찰을 동원한 압력!
-세관 통제와 은행 대출 금지 조치!
하지만 김종표는 박정환이 아니었다.
재벌들의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몸을 사리는 검찰과 건성으로 일을 처리하는 국세청.
세관도 이미 매수된 상태였는지, 밀수가 성행하고 있다.
은행도 대출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김종표는 재벌들을 박정환만큼 옥죄지 못했다.
[그런데도 밀리고 있다는 소리야?]
[안정우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 정치인입니다. 더구나 밀약서가 그 손에 들어갔기 때문에…….]
[건들었다간 내 쪽까지 불똥이 튈까 봐 참았다는 소리를 몇 번을 해? 자꾸 날 이렇게 몰아세울 텐가?]
[몰아세우기는요. 이렇게 총리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도와주십시오.]
마음에 안 든다.
그렇지만 도와주지 않으면 이쪽이 곤란하다.
‘안 그래도 영유권 선포가 한국보다 늦었다고 일본 국민들의 원성을 샀는데. 그곳에서 석유가 펑펑 나왔다는 게 알려지면 난 역적 취급을 받으면서 끌어내려질 거야.’
일본 총리가 사색이 되어 부랴부랴 제2차 회담을 주도한 이유였다.
오죽했으면 실무자 회담으로도 족할 사안을 양국 정상회담으로 바꾸었겠나.
그만큼 일본 총리 역시 한국에서 석유를 개발하길 원치 않는다는 소리다.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나?]
그렇게 둘은 같은 배를 탔다.
태양 그룹의 석유 개발을 막겠다는 목표가 똑같았으니까.
* * *
미상원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소위원회 공청회.
미국 상원 의원 프랭크 처치는 마이크를 잡았다.
[미국의 방위산업체인 록히드 회사가 항공기 판매 공작 자금으로 각국 정부에 엄청난 뇌물을 살포하였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았습니다.]
사실 익명의 제보는 아니었다.
록펠러 가문의 수석 비서가 보내온 서류는 벌써 여러 명의 상원 의원에게 전달되었으니까.
[미국 정부는 71년 록히드 회장에 보석을 선고하였고, 이후 회사에서 받은 은행 대출 약 1억 9,500만 달러의 지급을 미국 정부가 보증하였습니다.]
갑자기 왜 이곳에서 록히드 회장의 보석 얘기가 나오는 것일까.
[우리 연방 긴급 대출 자문 위원회는 이 과정을 파고들었습니다. 록히드가 미국 정부로부터 해외 지불에 대해 얼마나 숨기고 있는지 조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프랭크 처치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그 결과 록히드에서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항공기를 팔기 위해 여러 나라 고위 관료들에게 전 방위로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웅성웅성.
수군수군.
프랭크 처치로부터 시작된 파문은 공청회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전직 록히드 로비스트 에르네스트 하우저가 지금 이곳에 왔습니다. 이에 대해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벅저벅.
한 남자가 공청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록히드 로비스트로 활동할 때 작성했던 뇌물 장부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일명 ‘록히드 게이트’가 터진 것이다.
* * *
미상원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소위원회 공청회에서 시작된 사건은 일파만파 커지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록히드 게이트는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해외 뇌물법(Foreign Corrupt Practices Act)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 * *
서독.
신문과 방송은 연일 록히드 게이트에 대해 떠들어댔다.
<국방부 장관 프란츠 요세프 스트라우스 및 소속 정당은 모든 것을 전면 부인!>
<서독의 F-104G 스타파이터 900대를 구매한 대가로 최소 1천만 달러를 받았다는 록히드 로비스트의 주장은 거짓?>
<국방부 장관 스트라우스가 록히드 로비스트 고소!>
<록히드 문서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웬일? 문서가 딱!>
국방부 장관부터 독일 하원 의원까지 줄줄이 얽힌 초대형 뇌물 비리 게이트였다.
연일 논쟁이 계속될 때, 익명의 출처에서 ‘록히드 문서’가 언론에 유출되면서 서독은 발칵 뒤집혔다.
독일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은 일제히 불명예 사직을 해야만 했다.
* * *
네덜란드.
네덜란드 공군이 미라주5 대신 록히드 F-104를 구입할 수 있도록 베른하르트 공에게 1,100만 달러를 뇌물로 지불하였다.
베른하르트 공은 세계 300여 개의 회사의 이사회에서 근무하였고, 네덜란드 경제를 이끌어가는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았기에 그 충격은 무척 컸다.
네덜란드 총리 요프 덴 아윌은 이 사건을 조사했다.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남편인 베른하르트 공이 구속되면서 율리아나 여왕은 퇴진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 * *
사우디아라비아.
1970년부터 75년까지 록히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무기 거래상에게 1억 6백만 달러에 대한 수수료 15%를 지불했다.
이 일은 위조지폐 유통 혐의로 국외 추방당한 사우디 재경부 장관이 얽힌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 인간은 가지가지 해먹었네!
-위조지폐 유통도 뇌물 받아먹다가 밝혀졌다며?
-이젠 놀랍지도 않다! 국외추방 잘했다!
-사우디 국왕의 선견지명이 신의 한 수였다!
사우디 국왕 칼리드는 철저한 수사를 명했다.
그 일로 사우디 국왕 칼리드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왕실에 대한 신뢰가 급증하게 되었다.
혹자는 그 돈이 재경부 장관의 사재 금고에 있었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재경부 장관의 추방 당시 금고는 텅 비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그 돈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을 밝힐 수 없어 사건은 종결되었다.
* * *
이탈리아.
이탈리아 공군의 C-130 허큘리스 수송기 구매와 관련하여 록히드의 로비스트가 정치인에 뇌물을 지불했다는 소식으로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전직 내각 의원 루이지 구이, 마리오 타나시, 전직 통리 마리아노 루모르, 전직 대통령 조반니 레오네가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조반니 레오네 대통령은 여론의 직격탄을 맞고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 * *
일본.
이 록히드 게이트가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곳은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57년 일본 자위대가 록히드 사의 F-104를 도입하면서 뇌물을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 이후 일본 해상 자위대의 초계기 도입에도 록히드의 뇌물 살포가 있었다.
전일본공수가 대당 500만 달러로 록히드의 L-1011을 주문했다는 게 주요 쟁점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덮을 거야!]
일본 총리는 화가 나서 신문을 집어 던졌다.
[왜 우리 일본만 못 잡아먹어서 난리야! 다른 나라에 비해 일본의 뇌물 살포만 유독 자세하게 조사했어! 아주 악의적이라고!]
상대적으로 일본만 아주 세세하게 조사되었다.
억울하다.
다른 나라 수장들도 이 정도는 다 받아먹지 않았던가.
그런데 일본은 로비 과정부터 뇌물 수수 금액까지 너무나 자세하여 반박하기도 힘들 정도다.
총리 보좌관이 바닥에서 신문을 집어 올렸다.
<마루베니 상사를 통해 건네진 뇌물이 무려 24억 엔!>
<다나카 총리가 5억 엔을 꿀꺽 했다?>
<일본 재경부 장관이 주도한 뇌물 살포!>
<일본 고위 관료 전체가 록히드의 뇌물에 헤롱헤롱!>
일본 총리는 참지 못하고 집무실을 서성대야 했다.
이 일로 일본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여당인 자유민주당을 물어뜯기 위해 야당이 총출동했다.
일본사회당, 일본공산당, 민주사회당, 공명당 등.
총리 관저 밖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비리 총리는 사퇴하라!]
[뇌물 자유민주당은 사죄하라!]
[썩은 관료들은 사직하라!]
언론인들은 총리 관저 입구에서 노숙을 감수하면서 진을 치고 있다.
마치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는 하이에나들처럼 말이다.
일본 총리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현직 일본 수상이 뇌물 혐의로 구속되게 생겼어! 이런 불명예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일본 총리 다나카는 소학교 졸업이란 짧은 학력을 극복하고 수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신화를 쓰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무려 5억 엔이란 거액의 뇌물 사건에 얽히고 말았다.
[극우파 의원 고다마 요시오를 통해 고위 관료 전체가 뇌물을 받아 처먹었어! 이걸 캐면 줄줄이 구속이야! 당장 일본 정부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위아래로 뇌물 안 받아 먹은 관료가 없었다.
일본 총리부터가 뇌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데, 아랫사람들이 눈치 보며 뇌물을 먹었을 리 없지 않나.
총리 보좌관이 한숨을 쉬었다.
[한국의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이 도움을 요청…….]
도저히 못 참겠다!
일본 총리는 급기야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당장 일본 정부가 발칵 뒤집어졌는데, 지금 그놈 내다볼 정신이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