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한국의 록펠러를 꿈꾸다(4)
태양 그룹 본사.
태수의 지휘 아래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태양 그룹이었다.
회장실 책상에 앉은 태수 앞에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산더미였다.
태수는 결재 서류를 확인하면서 비서 송창준에게 지시를 내렸다.
“홍보실 인원 확충하세요. 홍보실에 전화 연결이 안 돼서 태양 그룹 계열사까지 전화통이 빗발친다는군요. 전화 때문에 업무가 마비되어선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송소리 기획 조정실장은 유럽 정유 회사 인수에 대한 보고서를 언제까지 올린다고 합니까?”
“재촉하겠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벌써 열흘째 퇴짜를…….”
“쓸 만한 인수 회사를 찾아야죠. 죄다 쭉정이 같은 곳들만 골라 오니 퇴짜를 놓는 거 아닙니까. 기획 조정실 전 직원이 달라붙어 최우선 사항으로 처리하라고 전하십시오.”
이미 그러고 있는데요.
조건에 맞는 정유 회사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예요.
송창준은 한숨을 쉬어야만 했다.
똑똑.
“회장님,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태수가 비서 송창준을 돌아본다.
송창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인 것으로 보아 예정에 없는 방문자가 들이닥쳤다는 것을 알겠다.
예정 없이 바로 회장실 문을 두드릴 수 있다는 건?
상대가 굉장한 거물이라는 뜻이었다.
“들어 오십시오.”
[실례하겠어요. 급한 일이 있어서요.]
엘리스 록펠러였다.
그녀의 뒤로 최고급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외국인 노신사가 중절모를 쓴 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록펠러 가문의 총괄 집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돈 냄새가 진동하는 노신사였다.
* * *
차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70대 노신사는 태수를 찬찬히 살폈다.
표정, 눈빛, 차 마시는 태도, 자세, 사소한 버릇까지도.
‘나이에 맞지 않게 무척 노련해. 배짱도 보통이 아니야. 자세며 태도까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군.’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교양이 보통이 아니다.
반듯한 자세하며 여유로운 태도 하며 자신만만한 기세 하며.
‘가주님께서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더니, 과연 비범한 인물이군.’
록펠러 가문의 총괄 집사로서 그간 만나온 사람들이 어디 보통이던가.
유명한 권력자부터 한 나라의 왕실 사람들까지.
나름 그 나라에서 한가락 하는 인물들을 많이도 만나왔다.
더구나 초대 석유왕의 노년까지도 겪어 본 사람이기에 연륜과 더불어 눈썰미에도 관록이 붙었다.
달그락.
마침내 찻잔을 내려놓은 노신사가 입을 열었다.
[훌륭한 차를 대접받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번드르르한 인사치레는 생략하고, 본론으로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록펠러 가주께서 당신을 한번 뵙자고 하셨습니다.]
뜻밖이었다.
태수와 엘리스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저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번 해상 유전과 관련하여 긴히 대화를 나누길 바라십니다.]
엘리스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아버지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건 가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겁니다. 아가씨도 함께 가시지요.]
[저만 가도 충분하지 않겠어요? 굳이 이 사람까지…….]
[가주님의 뜻입니다.]
엘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록펠러 가문에서 가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태수를 보는 엘리스의 눈동자에 미안함이 스쳤다.
그 모습을 총괄 집사가 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스 님이?’
남자에게 저런 눈빛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어떤 남자에게나 언제나 차가운 눈빛으로 경계하곤 했던 엘리스가 아닌가.
[아마 저 때문일 거예요. 제가 돌아가서 아버지께 잘 말씀드릴 테니 당신은 신경 쓰지 말아요.]
[나쁜 일로 부르시는 게 아닐 겁니다.]
[네?]
엘리스의 눈이 동그래진다.
태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록펠러의 가주님께서 어떤 제안을 준비하셨습니까?]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나쁜 일이었다면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대화를 시작하셨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험악해질 일이었다면 응당 그리했을 겁니다. 이 늙은이 뼈마디가 허약해서 말입니다.]
노신사는 웃었다.
[가주님께서는 엘리스 님의 소식에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한국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정유 회사 인수를 위해 유럽으로 향할 것이라는 말에 저를 보내신 겁니다.]
[아버지께서요?]
[왜 멀리서 찾으십니까? 알짜배기 정유 회사는 록펠러 가문에 있는데.]
그 은근한 말에 엘리스는 태수를 보았다.
[우린 석유를 발견했어요. 그러니 굴착 장비와 시설, 전문가와 회사까지 한 번에 마련하려면 도산 직전의 회사라면 충분하니까요.]
[도산 직전의 회사에 남는 게 있겠습니까? 이미 알짜는 전부 뒤로 빼돌리고 빚만 잔뜩 남았을 겁니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획 조정실장 송소리가 유럽 정유 회사 인수에 매달리는데도 번번이 퇴짜를 맞는 이유였다.
‘인수 후보로 고른 회사인데 죄다 돈 냄새가 안 나. 썩은 내만 진동하니 원.’
이미 쓰레기 신세인 회사를 인수해서 뭐하겠나.
차라리 새로 세우느니만 못하다.
하지만 정유 회사를 하나부터 열까지 세우기엔 시간과 기술이 부족하다.
[엘리스 아가씨, 가주님께 부탁드려 보는 게 어떻습니까?]
[아버지께?]
[또 압니까? 가주님께 따로 마련해 놓으신 비상의 한 수가 있을지.]
엘리스는 솔깃했다.
안 그래도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가 걱정되었던 엘리스가 아닌가.
‘아무래도 한번 집에 다녀오긴 해야겠다. 아버지를 만나 봐야겠어.’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버지께 물어보겠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가주님께서 벌써 오랫동안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셨으니까요. 아가씨가 돌아가시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노신사는 태수에게 말했다.
[가주께서 미스터 강께 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뭡니까?]
[일본 도쿄에서 이틀 후에 한일 대륙붕에 관한 2차 회담이 열릴 텐데 깽판 놓을 생각은 없나? …라고 하셨습니다. 미스터 강의 대답에 따라 전할 말이 다릅니다.]
태수가 생각했던 바로 그대로였다.
[깽판 칠 생각이 있다면?]
[미국으로 오게. 내가 친히 판을 깔아 주지. 약속한다. …라고 전하셨습니다.]
마음에 든다.
[록펠러 가주께서 친히 깔아 주는 깽판은 어떤 것일지 무척 기대가 되는군요.]
태수도 준비하고 있는 게이트가 하나 있다.
그런데 록펠러 가주가 도와주는 깽판이라니.
구미가 당긴다.
[좋습니다. 함께 갑시다.]
[공항에 록펠러 가문의 전용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따로 미스터 강이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시간만 내어 주십시오.]
그렇게 태수와 엘리스, 록펠러 가문의 총괄 집사는 미국으로 향했다.
* * *
땅덩이가 넓은 미국의 부자들은 호화로운 대저택에 산다고 알려지곤 한다.
록펠러의 저택은 말 그대로 성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부르릉.
10미터가 넘는 철제 대문이 좌우로 열리면 차가 마당으로 진입한다.
차가 진입하는 마당은 이미 마당이라 부를 수 없었다.
이 정도 스케일이면 정원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숲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곳곳에 정자와 분수가 있고, 색색의 꽃으로 이뤄진 화단이 있다.
심지어 마당 안에 호수까지 있다.
‘대단하군.’
차로 10분 이상 달려 도착한 대저택은 규모부터가 달랐다.
사우디 칼리드의 저택 이상으로 웅장한 곳이었다.
[바로 가주님을 뵈러 갑시다.]
저택 입구에 내리자마자 고용인들이 일렬로 서서 엘리스를 맞이했다.
총괄 집사는 고용인들에게 가볍게 지시를 내리고 엘리스의 뒤를 따랐다.
‘이제 보니 정말로 엄청난 가문의 아가씨였군.’
록펠러 가문의 명성이 쩌렁쩌렁했지만 실제로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전생에서도 록펠러 가문 사람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똑똑.
본관 3층에 마련된 가주의 집무실, 그리고 이어진 록펠러 가주의 병실.
엘리스가 달려가 록펠러 가주의 메마른 손을 잡았다.
[아버지.]
생명 유지 장치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록펠러 가주는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링거와 항생제도 몇 종류나 맞고 있고, 산소 호흡기와 심장 박동기가 숫자를 표시한다.
엘리스가 달려와 그의 손을 매만지며 엎드릴 때 그녀의 머리 위에서 탁하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왔느냐……?]
록펠러 가주가 힘겹게 눈을 떴다.
엘리스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였다.
[고작 한두 달 못 본 새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오랜만이구나…….]
록펠러 가주가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고생했다…….]
두 달 동안 엘리스가 어찌 살아왔는지 다 안다는 뜻이었다.
엘리스는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없이 아버지의 메마른 손에 볼을 비빈다.
그의 손등은 엘리스의 눈물로 젖어 간다.
[자네가 미스터 강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강태수라고 합니다.]
태수와 눈이 마주친 록펠러 가주.
태수의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던 총괄 집사와 다르다.
록펠러 가주는 태수의 눈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는다.
사람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 하지 않던가.
한참이나 태수의 눈을 말없이 보던 록펠러 가주.
태수와 록펠러 가주는 서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응시한다.
‘확실히 거물이로군. 죽기 직전인 모양인데도 이 정도 기세와 정신력이라니, 통찰력이 뛰어난 자는 눈빛부터 다르지.’
록펠러 가주도 마침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래, 독심(毒心)이 없으면 남자가 아니지……. 좋다…….]
대뜸 록펠러 가주가 손을 들었다.
인사말 대신 본론으로 직행한다.
[약속을 지키지……. 한일 조약은 제대로 끝맺지 못… 쿨럭!]
[아버지!]
엘리스가 깜짝 놀라 외쳤다.
총괄 집사가 재빨리 흰 수건으로 록펠러 가주의 입가를 닦았다.
검붉은 피를 꼼꼼히 닦아 내고서야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자네의 깽판… 어떻게 도와주랴……?]
[이번에 열리는 미국 상원 외교 위원회, 다국적 기업 소위원회의 공청회에서 게이트를 하나 터뜨리려고 합니다.]
[물론 일본 전역을 뒤흔들 규모겠지…….]
[그렇습니다. 일본 사상 초유, 최악, 최대의 정치 자금 스캔들이 될 겁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미국까지 날아왔다.
태수가 준비해 온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총괄 집사가 서류를 받아다가 록펠러 가주 옆에 선다.
총괄 집사는 서류를 검토하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이, 이, 이건……!]
파라락. 촤악. 파라라락.
총괄 집사가 서류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고, 거칠어지고, 과감해진다.
순식간에 두터운 서류를 재빨리 넘겨 훑어보는 총괄 집사.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런 걸 다 조사했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넋이 반쯤 나간 두 눈에는 경악밖에 안 남았다.
[제정신입니까? 이, 이런 엄청난 스케일의 게이트를 준비했다고요?]
[없는 일을 만든 게 아닙니다. 있는 일을 파헤친 것뿐입니다.]
[대체 이 일에 얽힌 나라가 몇 개 국가인지 아십니까? 일본이 뒤집히는 건 물론이고 서독, 네덜란드, 이탈리아,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총괄 집사가 크게 흥분하여 이마를 짚었다.
[이걸 진짜로 터트리겠다고요? 그랬다간 진짜로 이 나라 대통령들 전부 옷 벗어야 할 정도예요! 그냥 덮을 수 있는 규모의 스캔들이 아닌데 어떻게 이걸……!]
대체 얼마나 큰일을 터뜨리려고 하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가.
언제나 차분하고 논리 정연하던 총괄 집사답지 않게 횡설수설한다.
총괄 집사를 잘 알고 있는 엘리스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태수와 집사를 번갈아 본다.
그녀의 머리 위에 꼭 물음표(?)가 떠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반면 록펠러 가주는 그만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하, 하하…….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하…….]
아주 만족한 표정이었다.
[가주님, 이거 진짜로 파장이 일파만파 퍼질 겁니다! 보통 게이트가 아닙니다! 이런 일에 우리 록펠러가 휘말릴 순 없……!]
[진행해…….]
록펠러 가주는 총괄 집사의 말을 잘랐다.
록펠러 가주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는 총괄 집사.
그가 직접 태수가 준비한 서류를 다시 한번 파라락 넘기면서 외쳤다.
[가주님, 이걸 좀 보십시오! 이걸 보고 나면 진행하란 소리가 안 나와요! 이 정신 나간 또라이가 대체 몇 나라에 폭탄을……!]
이런 정치 스캔들에 록펠러가 끼어들어선 안 된다.
총괄 집사가 태수의 계획을 요약해서 알려 주려고 할 때였다.
록펠러 가주는 손을 들었다.
[그대로… 진행한다…….]
[가주님!]
록펠러 가주는 부들대는 입술로 억지로 씩 웃었다.
[약속했다…….]
록펠러 가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제야 총괄 집사는 기억했다.
록펠러 가주가 태수를 데려오라고 제안했을 때 그에게 어떤 약속을 해 주었는지.
-깽판 칠 생각이 있다면 미국으로 오게. 내가 친히 판을 깔아 주지. 약속한다.
[가주님, 이미 절 보낼 때 이런 상황을 짐작하시고…….]
[그 공청회 의원들… 전부 불러들여…….]
록펠러 가주는 태수의 눈을 응시한다.
[판을 깔아 줄 테니… 어디 마음껏… 날뛰어 봐.]
딸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