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한국의 록펠러를 꿈꾸다(3)
조간신문에서 쏟아진 기사들은 석간신문까지 도배했다.
뿐만 아니라 방송을 트는 족족 같은 소리가 나온다.
-특종! 안정우 공화당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석유 개발에 대해 발표!
-한국도 이제 산유국이 되나?
-석유 재벌 록펠러와 태양 그룹의 합작! 해상 유전 개발 초읽기!
충격적인 기사였다.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니, 한국에서 석유가 나온다고?”
“그럼 우리도 산유국 되는 거야?”
“석유도 없는데 록펠러가 올 리가 없잖아!”
“석유 나오나 보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대한민국 산유국’에 대해 침을 튀겼다.
신문과 방송에서 나오는 안정우의 대선 공약은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다.
“석유 팔면 그걸로 고등학교까지 전액 국가에서 책임진다고?”
“의료 보험 체계를 뜯어고쳐서 국민 부담금을 낮추겠다니.”
“세율을 낮출 거래. 임금도 올려 준대.”
전형적인 포퓰리즘 공약이었다.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형태.
대중을 동원하여 권력을 유지하려는 얕은 수작이라고 불리지만 그만큼 효과가 좋다.
그런데 이게 허황된 공약이 아니었으니 파장이 큰 거다.
-우리나라도 석유 팔아 잘살아 보세!
-한국 앞바닥에서 석유가 펑펑!
안정우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던져 주고 있었다.
-복지와 경제 성장!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바로 석유가 있다면!
안정우의 말에 모두가 환호성을 울렸다.
한국 전쟁 이후로 국민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참고 살아야만 했다.
박정환을 비롯해 수뇌부들이 내걸었던 목표 때문이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복지와 경제 성장은 결코 함께 갈 수 없다!
-최빈국의 작은 파이를 똑같이 갈라 먹지 말고, 파이부터 크게 키운 후에 배불리 나눠 먹자!
-그러니 먼저 경제 성장을 이루고, 그다음에 소득을 분배해야지!
그렇게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했다.
최빈국으로서 외국의 원조에 의지하던 나라였기에 국민 모두가 이를 악물고 경제 성장에 올인했다.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
-기업 중심의 경제 발전!
자본과 기술이 없으니 값싼 가격을 내세워 수출 경쟁력을 확보해야만 했다.
원재료를 싼값에 가져올 수 없으니 생산 비용이라도 줄여야 했다.
그렇게 노동자들의 임금은 최저치로 고정되고, 노동 시간과 업무 강도는 터무니없이 높게 요구되었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낮은 만큼 기본 생활을 위해 농수산물의 가격도 최저치로 동결.
모든 국민이 20년 넘도록 참고 또 참아서 국가경제발전에만 몰두했다.
-한강의 기적!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세계가주목하다!
고작 20여 년 만에 한국은 성장했다.
모두 국민의 희생을 담보한 경제 성장이었다.
하지만 일방적인 희생을 오래도록 강요한 결과, 참는 데 한계가 왔다.
바로 불공정한 소득 분배 때문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우리만 참아야 하는가!
-파이는 충분히 커졌다! 재벌과 정치인들만 먹는 파이, 우리에게도 나눠 달라!
-빈익빈 부익부! 무전유죄 유전무죄!
곪은 상처들이 터진 게 바로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이었다.
-우리도 사람이다! 노동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개선해라!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해 줘라! 돈 없으면 치료도 못 받나!
-지하자원 없으면 인적 자원이라도 키워야지! 돈 없어서 학교를 못 보낸다!
박정환은 국민의 불만 어린 목소리를 독재의 힘으로 짓밟고 막아 내고 있을 때.
안정우의 대선 공약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안정우! 안정우!”
“안정우가 대통령이 되어야 나라가 산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모두 안정우가 차기 대통령이 되길 바랐다.
* * *
일본 내각 대신 총리 관저.
일본 총리는 보고서를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국 앞바다에서 석유를 채굴하다니! 한일 대륙붕 조약을 무시하겠다는 건가?]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급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서성여 댔지만 화가 풀리지 않는다.
[박정환이 죽었다고 모두 없던 일로 슬쩍 넘어가려는 모양인데, 그럴 수는 없지.]
[뭘 어쩌시려고요? 타국에 대놓고 간섭이라도 하시게요?]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총리 보좌관이 말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형국이었다.
불같이 노한 일본 총리는 이를 갈았다.
[저들이 먼저 양국 간의 조약을 어겼어!]
[한일 대륙붕 조약은 현재 협상 진행 중인 상태입니다.]
[협상은 이미 끝났어.]
[78년에 발효하기로 했죠. 그 말은 결국 현재 협상 진행 중이란 뜻이죠. 마무리되지 않은 협상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습니다.]
78년에 발효하기로 했던 것이 문제가 됐다.
[그거야 5년에 나누어 10억 달러를 지급해야 했으니까.]
[그건 밀약 내용이었죠. 공식적인 회담 결과는 아닙니다. 그러니 일본은 국제적으로 제소하거나 항의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곳은 이미 죽은 박정환이 먼저 영유권을 선포했으니까요.]
[박정환!]
쾅.
일본 총리는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벽을 쳤다.
이 모든 게 박정환 때문이다.
[박정환과 따로 밀약을 맺지 않았더라면!]
한일 대륙붕 협정은 공식적인 눈가림이었다.
진정한 회담의 목적은 밀약이었다.
[고작 10억 달러에 그곳을 일본의 완전한 소유로 인정하기로 약속했는데! 이렇게 중간에 죽어 버리다니!]
운이 나빴다.
이미 박정환에게 지급한 2억 달러를 되돌려 달라고 반환 청구도 못한다.
하지만 이대로 얼간이처럼 당하기만 해서야 되겠나.
[아직 김종표가 살아 있어. 그리고 그놈은 현재 대통령 권한 대행이지.]
밀약의 당사자인 박정환이 죽었다면 밀약의 초안자인 김종표를 끌어들이면 된다.
[김종표에게 연락해. 이 일을 그놈 선에서 알아서 수습하라고.]
박정환이 죽고, 김종표가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대통령 권한을 틀어쥐었다.
그러니 이런 분란 정도는 간단하게 수습할 수 있으리라.
더구나 김종표는 뛰어난 모략가이자 협박의 대가가 아니던가.
[다시 한번 내 귀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그놈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거라고 전해.]
[안 그래도 김종표에게서 전보가 왔습니다.]
[전보?]
일본 총리 보좌관이 한국에서 온 전보를 내밀었다.
<상황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한일 대륙붕 조약 2차 회담을 최대한 빨리 열기를 부탁드립니다.>
김종표가 보내는 SOS였다.
일본 총리는 전보를 와락 구겼다.
[이 썩을 놈이 그깟 일도 혼자 수습 못해? 무능한 새끼!]
어쩔 수 없다.
수수방관하다가 일본이 손해를 입을 수는 없지 않은가.
[청와대에 전보 보내. 2차 회담 열자고.]
제대로 못을 박을 것이다.
[조약 발효를 서둘러야겠어. 한국에서 먼저 대륙붕에 빨대 꽂기 전에.]
국제적 명분만 충분하다면 한국 따윈 일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정치 싸움에는 국내고 국외고 가릴 것 없이 명분만큼 중요한 게 없다.
[자네도 준비해. 서둘러야 할 거야.]
한일 양국의 제2차 대륙붕 조약에 관한 회담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 * *
미국 록펠러 대저택.
록펠러 가주의 집무실에는 3면의 문이 있었다.
가장 큰 정면 문은 복도에서 진입할 수 있어 사람들이 드나드는 기본적인 문이다.
집무실 오른쪽 문은 록펠러 가주의 개인적인 공간으로 이어진 문이다.
하지만 왼쪽 문은?
똑똑.
집무실 왼쪽 문을 두드리는 자는 록펠러 가주의 수석 비서였다.
들어오라는 허락도 없는데, 수석 비서가 집무실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간다.
[가주님, 정신은 좀 드셨습니까?]
록펠러 가주가 병상에 누워 있는 곳이다.
각종 전자기기가 사방을 둘러싸서 록펠러 가주의 몸을 체크하고 있었다.
종류별로 링거를 줄줄이 매달아 팔뚝에 꽂아 넣고, 코에는 산소 호흡기까지 달려 있다.
수석 비서가 가까이 다가오자 24시간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들이 뒤로 물러난다.
[자네들은 나가 있게. 가주님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보통 수석 비서가 오자마자 의료진들에게 가주의 상태를 보고받는다.
그런데 오늘은 보고조차 뒤로하고 밀담을 나누겠다고 한다.
그만큼 중요한 얘기가 오고 갈 것이라는 뜻.
의료진들은 말없이 반대편 문을 열고 나갔다.
[엘리스 아가씨께서 소식을 보내오셨습니다.]
엘리스란 말을 듣자 록펠러 가주가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들었다.
퀭한 눈에 초점이 잡힌다.
관심이 무척 크다는 뜻이다.
수석 비서는 보고를 이어 갔다.
[대한민국에서 태양 그룹과 함께 해상 유전을 함께 개발할 준비를 모두 끝냈다고 합니다.]
[해상 유전을……?]
록펠러 가주의 목소리는 탁하고 거칠었다.
[분명… 일본이 석유는 없다고… 쿨럭!]
[분명 일본 정부는 그렇게 말했었죠. 하지만 엘리스 아가씨께서 비밀리에 석유 탐사 및 시추를 진행해 해상 유전을 직접 확인하셨습니다.]
[엘리스가……?]
기쁜 소식이었다.
[일본은 일본 총리의 지휘 아래 제2차 한일 대륙붕 조약 회담을 연다고 난리가 아니랍니다. 이틀 후면 2차 회담이 열릴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나.
록펠러 가주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일본 놈들이 여태 거짓말을……!]
록펠러가 숟가락을 얹지 못하도록 거짓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일본의 기만책을 엘리스 아가씨께서 꿰뚫어 보신 모양입니다. 진즉에 한국에서 독점적인 석유 채굴 개발권을 따냈다고 합니다. 그에 맞춰 개발 회사를 세우고, 포항 철강이라는 철강 회사와 접촉해 필요한 시설을 생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녀석, 제법이구나.
기특함과 함께 씁쓸함이 밀려온다.
‘체력이 떨어지면 판단력과 인내심도 흐려지는 법이라더니, 나도 갈 때가 되었어.’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다 보니 날카롭던 판단력조차 무뎌지고 말았다.
일본의 기만책에 당했다.
한일 대륙붕 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을 보고 섣불리 판단했다.
-석유는 없다!
만일 그곳에 석유가 있었다면 한국이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을 것이다.
일본은 국민의 원성과 비난을 감당하지 못해 조약을 맺어 두는 척 제스처를 취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제대로 된 석유 탐사 움직임조차 없었기 때문에 결론을 단정 짓고 말았다.
엘리스가 허점을 파악하고 재빨리 주도권을 틀어잡은 모양이다.
[엘리스 아가씨와 함께 석유 개발을 하는 자는 매우 비범한 인물입니다.]
수석 비서는 태수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엘리스가 뒷조사한 것보다 훨씬 자세한 보고가 이어졌다.
그럴수록 록펠러 가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제안한 투자안에 따라 아가씨가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서고 계십니다. 벌써 두 달 만에 투자 수익률이 40%를 넘겼다고 합니다.]
[뭐……?]
두 달 만에?
오일 쇼크로 인해 경기가 이렇게 나쁜 상황에서?
[요즘 미국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신생 투자 회사인 쉐도우 인베스트먼트와 손을 잡으셨습니다. 영화, 부동산, 주식, 은행까지. 큰 투자 수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하, 하하하…….]
대체 얼마 만에 들어 보는 록펠러 가주의 웃음소리던가.
[언제 돌아온다고……?]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아무래도 기약이 없어서 그러신 듯합니다.]
[왜?]
[한국에서 일을 진행한 후에 유럽으로 향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딸은 밖으로 도느라 시간이 없는 모양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아비는 초조했다.
[유럽에서 오일 쇼크 이후 도산 직전인 정유 회사를 인수하고자 하신다고 합니다.]
중동 전쟁 이후 내쫓긴 유럽 정유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뜻이 무엇이겠나.
바로 석유 채굴 기술과 장비, 전문 인력을 한꺼번에 얻겠다는 소리다.
하지만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그런 건 록펠러 가문이 전부 가지고 있다.
[일단… 돌아오라고 해라.]
록펠러 가주는 딸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벌써 못 본 지 한 달은 넘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같이 사업한다는 놈도…….]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엘리스 님만 모셔 와도…….]
수석 비서의 말을 록펠러 가주가 끊었다.
[반드시 데려와…….]
엘리스는 사생아이며 딸이다.
비범한 안목과 뛰어난 사업가의 자질을 갖고 있음에도 뒷배가 없다.
가난한 무명 가수였던 엘리스의 모친은 일찍 죽었다.
든든한 가문의 모친을 둔 다른 형제들에게 치여 제대로 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 딸이 한국에서 석유 개발권을 따냈다는 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나.
사업의 ‘사’ 자도 모르는 딸이 두 달 만에 수익률 40%란 기적을 만들어 냈다.
-회사를 경영하여 실적을 증명할 시간이 부족하기에 투자 실적으로라도 능력을 증명한다!
-엘리스는 차기 록펠러 가주를 꿈꾼다!
머저리 같은 아들들이 말아먹는 사업 보고를 들을 때마다 수명이 팍팍 깎이고 있는 록펠러 가주가 아닌가.
딸의 소식에 록펠러 가주의 눈에 생기와 기쁨이 감돌았다.
[내 딸에게 다시없을 기회를 주었으니… 이 아비가 응당 큰 보답을… 쿨럭!]
[알겠습니다, 가주님. 아가씨와 함께 모셔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수석 비서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러자 록펠러 가주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서둘러야 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록펠러 가주는 잠이 들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잠드는 시간이 늘어나고, 빈도가 잦아지는 그였다.
수석 비서는 오랫동안 모셔 온 주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책임지고 모셔 오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록펠러 가문의 전용기가 한국을 향해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