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한국의 록펠러를 꿈꾸다(1)
금산 호텔 7층 홀은 늦은 시간까지도 북적였다.
록펠러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사람들은 로비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했다.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으로 석유 개발권을 따낸 록펠러!
-순식간에 김종표를 궁지에 몰아넣어 사업권을 따냈다!
그 충격이 참으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병춘은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록펠러가 제7 광구 석유 개발에 참여해?’
그럴 수 있다.
석유 재벌 록펠러는 유전이 발견되면 아프리카 오지까지도 날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제7 광구에 석유가 묻혔다는 게 확실하다면 일본이 저리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한국에 비해 자본과 기술이 월등히 뛰어난 일본이다.
제7 광구에 석유가 있다면 일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을 배제하고 석유 채굴을 시작했을 것이다.
분명 주한 일본 대사도 ‘석유는 없다’고 못 박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록펠러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정보력과 기술력에서 일본 이상이라는 건가?’
대단한 가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수완도 보통이 아니었다.
‘말 몇 마디로 간단하게 석유 개발권을 따냈어.’
이제 보니 모든 게 계획적이었다.
이병춘은 석유 공급을 잃지 않기 위해 김종표를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록펠러의 석유 개발 사업권을 따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줄이야.
그때 이병춘은 아차 했다.
그래서 김종표가 석유 개발권을 내어 주는 순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재벌 총수들을 이용해서 아주 쉽게 목적을 이뤘다. 그런 계획은 누구 머리에서 나왔을까? 강태수? 아니면 록펠러?’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눈치 빠른 이병춘이 그걸 모를 리 있겠나.
‘태양 그룹이 록펠러 가문을 지분 하나 안 내어 주고 끌어들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강태수, 정말 기가 차는 놈이군.’
록펠러 가문과 태양 그룹.
일방적인 힘의 우월 관계를 무시하고 일을 성사시켰다.
결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안 나온다.
-강태수가 록펠러를 휘두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록펠러가 저리 나오겠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태양 그룹에 석유 사업권을 챙겨 주다니.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충격이란.
홀에서 다들 그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강태수, 그 수완 좋은 놈은 주변의 힘을 참 쉽게도 갖다 써. 나 이병춘마저도 이리 쉽게 이용하다니. 그것참, 하하하.’
당했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
한청호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총수직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는 쓰게 웃었다.
한청호가 아들들을 들쑤셔 삼청 그룹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는 피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솔직히 이렇게 시원하게 웃어 버린 적은 처음이다.
태수가 남긴 말 덕분이었다.
-태양 그룹은 혼자 안 먹습니다.
-정유 업체를 가지고 계신 총수님들이 섭섭해하실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석유 개발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란 것은 다들 아시죠?
-그에 관해 논의할 생각이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모쪼록 자리를 지켜 주십시오.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돌아가겠나.
순식간에 사람들은 ‘석유 개발권’에서 ‘떨어질 콩고물’ 쪽으로 관심이 쏠렸다.
남의 일보다 당장 내 이득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
사람들의 불만과 걱정은 곧 기대감과 희망으로 바뀌었다.
‘강태수, 그놈 진짜 난놈은 난놈이다.’
인정한다.
강태수, 그놈은 정말로 대단한 놈이다.
이병춘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앗! 록펠러다!”
홀의 입구가 술렁이면서 사람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병춘도 고개를 돌렸다.
태수와 엘리스가 약속대로 홀에 들어왔다.
또각또각.
꼿꼿하고 반듯한 자세로 엘리스와 태수가 입장한다.
여전히 팔짱을 낀 상태였다.
엘리스를 박정환이 주로 쓰던 VIP 룸으로 안내한 태수.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삼청, 럭키 세븐, 금산, 대한 정유 총수님들은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드디어 록펠러와의 만남이다.
* * *
엘리스는 여전히 선글라스를 쓴 채였다.
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태수의 조언이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눈을 통해 상대의 강함을 파악합니다.
-군에서 조교가 모자를 깊이 눌러 써서 훈련생에게 눈을 보이지 않는 이유와 같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재벌 총수들을 우습게 보다간 큰코다칠 겁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제야 갓 성인이 되어 사업에 뛰어든 신출내기 사업가다.
아무리 록펠러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아 길러졌다지만 실전 경험은 매우 다른 영역이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서 만만해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도 다들 여유롭게 웃고 있어.’
분위기 자체는 매우 좋다.
하지만 재벌가 총수들의 눈빛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다.
록펠러가 주에게서 보던 기세만큼이나 묵직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태수는 돋보였다.
이병춘이 입을 열었다.
[태양 정유에서 제7 광구에 석유를 개발한다면 우리는 전부 정유 회사를 내놓아야 된다. 그건 알고 있나?]
[제가 석유를 독점하고 가격 경쟁으로 씨를 말릴까 두려우십니까?]
훅 들어오는 정곡.
그 말이 사실이었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지. 두렵네.]
[태양 그룹과 힘겨루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와 상생할 생각이니까요.]
상생(相生)이란 말은 듣기 좋지만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정유 업계 점유율을 두고 박 터지고 싸우는 경쟁 관계라면 더욱.
그래서 이병춘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태양 그룹은 지금 여기 계신 분들에게 국제 시세 대비 15% 저렴한 가격에 원유를 공급할 것입니다. 또한 가격 경쟁으로 한국 정유 회사를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의아했다.
석유 개발을 독점했다면 폭리를 취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태수는 폭리를 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왜?]
[함께 살지 않으면 다 같이 죽게 되니까. 그래서 상생입니다.]
태수는 엷게 웃었다.
‘이들이 석유 개발권을 반대한다면 태양 그룹은 석유 개발조차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원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이 떼돈을 벌 것 같으면 깽판 치고 싶은 법이다
당장 이해득실이 걸린 탓에 태수의 사업을 방해할 확률이 컸다.
‘곧 이란발 세계 제2차 오일 쇼크가 덮칠 것이다. 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기회를 쟁취하려면 석유 채굴을 서둘러야 한다.’
중동이 쏘아 올린 석유 파동은 세계 경제를 크게 흔들어 버린다.
당시 오일 쇼크를 발판으로 태수는 재벌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태수는 이번 제2차 오일 쇼크를 기회 삼아 다시 한번 위로 도약하려고 한다.
‘세계적인 대재앙급 이벤트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지.’
앞으로 제2차 오일 쇼크까지는 고작 3년 조금 넘게 남았을 뿐이다.
제7 광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다.
여기서 정치 싸움으로, 재벌들 신경전으로 낭비할 시간은 없다.
[제가 사우디에서 석유 공급 권리증을 가져왔을 때 우리는 여기서 모였습니다.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그걸 왜 기억 못하겠나.
박정환이 바로 이 멤버를 불러다가 석유 공급 권리증을 내밀었다.
사우디 국왕에게서 직접 받아 온 이권이었다.
[그 당시 중동 전쟁 이후 터진 오일 쇼크로 세계 경제가 출렁거렸습니다. 한국도, 여기 총수님들 회사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세계 전반적으로 상황이 무척 어려웠었다.
중동 국가들이 일제히 석유 공급을 거부하자 세계가 발칵 뒤집혔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대위기 속에서 그들은 태수 덕분에 큰돈을 벌고, 세를 불렸다.
지금도 그들이 태수를 고마워하는 이유였다.
[그때 제가 총수님들께 대가를 바랐던가요?]
놀랍게도 태수는 그때 석유 공급 권리증을 내놓으면서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스스로 명함 내놓기를 자처했던 총수들이 아닌가.
태수가 명함을 들이밀어 계열사를 하나 내놓으라고 해도 내놓을 각오까지 했었다.
[같은 맥락입니다. 함께 살아남읍시다.]
총수들에겐 태수의 말이 묵직하게 들렸다.
태수는 행동으로 그 뜻을 증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긴 침묵 속에서 이병춘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신용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입장이 생각을 바꾸는 게 되지.]
문제는 이것이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것.
돈 빌릴 때와 돈 갚을 때가 다르다는 것.
상황이 바뀌고 이해득실이 달라질 때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게 사람이지 않던가.
[자네가 변치 않으려고 해도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을 걸세.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니까.]
태수는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만일 태양 그룹이 누군가의 훼방으로 석유 개발 자체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어쩌실 겁니까?]
태수의 석유 개발 사업을 방해하는 경우는 어떡하겠냐는 뜻이다.
이병춘이 대답했다.
[우리는 절대로 자네를 방해하지 않겠네. 오히려 적극 지원해 줄 생각이야.]
다른 사람들도 거들었다.
[그래, 석유를 싸게 공급받을 수 있다는데 왜 방해하겠나?]
[그것도 가격 경쟁으로 싸움을 걸지 않고, 지속적으로 석유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하는 마당에.]
[더구나 우리는 위험부담을 하나도 지고 있지 않지. 이득만 얻게 되는 구조인데, 자네의 제안을 마다할 리 있겠는가.]
태수는 물었다.
[김종표가 방해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 그놈이 있었군.]
[오늘은 일단 석유 개발에 대해 승인했지만 당장 내일부터 계략을 짜서 훼방 놓을 게 분명합니다.]
[그럴 만한 위인이지.]
김종표의 별명이 무엇이던가.
바로 박정환의 지낭이다.
그는 더러운 모략과 잔혹한 보복으로 명성이 높았다.
[김종표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오늘 일을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분명 태양 그룹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도 보복 대상이 될 겁니다.]
록펠러가 석유 공급 거부를 선언한 시점에서 이미 엮이고 말았다.
이제 태수와 재벌 총수들의 이해관계와 목표는 같아지게 되었다.
재벌 총수들은 서로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까 김종표와 얼굴을 붉혔지. 한 번 망쳐 버린 관계를 개선하는 데는 무척 많은 노력과 돈이 들어.]
그뿐만이 아니다.
[김종표, 그 잔혹한 놈은 반드시 보복한다.]
내게 칼을 들이밀 위험한 싹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그놈이 차기 대통령이 되어선 안 돼.’
[차기 대통령은 기업의 이권과 미래가 걸린 중요한 일이지. 이미 눈 밖에 난 자가 대통령이 되는 건 우리도 껄끄럽네.]
이병춘이 재벌 총수들을 돌아보며 대표로 말했다.
[우리가 책임지고 김종표를 치워 주지.]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다.
무척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엘리스는 태수를 보며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정적을 이런 식으로 제거해 버리네.’
차도살인(借刀殺人)이다.
김종표를 태수가 아닌 재벌 총수들이 치우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처음에는 록펠러를 등에 업고 일을 벌였지만 결국 이 남자가 수완을 부려서 이해관계를 강제로 엮어 버렸어.’
처음부터 태수는 록펠러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를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록펠러 가문의 위세를 빌미로 사람들을 자극해서 정적을 압박했어. 뿐만 아니라 이용당했다고 불쾌했을 사람들마저 외려 제 편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대단한 수완이다.
이 남자를 보면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알고 있었고,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기분이 새로웠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록펠러 직계라고 해도 한국 시장 석유 판매에 대해 거부할 결정권은 없어. 그래서 조마조마했는데, 애초에 그건 협박의 빌미였을 뿐이잖아.’
다만 말뿐인 협박이어도, 록펠러가 말했기에 무시무시한 권력이 되었다.
‘말이 안 되니까 먹히지 않을 협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무기 삼아 말이 되게 상황을 만들어 버렸어.’
생각할수록 대단하다.
‘이건 록펠러의 힘일까, 이 남자의 능력일까? 정작 가문에 피해를 주지 않으니 탓할 것도 없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재벌 총수들을 주도해 협상을 만들어가는 남자가 달리 보인다.
‘더 배우고 싶다. 어떻게 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사람들을 휘두르는지.’
차기 가주를 꿈꾸는 엘리스는 깨달았다.
바로 이런 부분이 그녀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태수의 말이 맞았다.
‘갑질은 그저 강자가 힘으로 약자를 짓밟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력한 협상 카드로도 사용할 수 있구나. 그 방법이 아니었으면 석유 개발권을 따내기 위해 진짜 오래 고생했겠어.’
힘은 쓰기 나름이라더니.
태수를 보는 엘리스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태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종표의 미래는 정해졌군. 내친김에 차기 대선까지 한 번에 정리해 버리자.’
태수는 말했다.
[말뿐인 약속을 못 믿겠다고 하셨죠.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석유와 관련된 오늘의 약속을 대선 공약으로 발표하겠습니다.]
다들 깜짝 놀랐다.
[대선 공약? 자네, 대권에 도전할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