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203화 (203/230)

203화 호가호위(5)

삼청 그룹 총수 이병춘.

그는 누구보다도 냉철하게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김종표냐, 록펠러냐.’

강태수는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다정하게 록펠러와 팔짱을 끼고서.

이병춘이 보기에 김종표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김종표는 마비된 국정을 수습하고, 차기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역할에 불과하다. 더구나 차기 대통령 선거는 올해 12월 말에 하기로 이미 결정 났지.’

갑작스러운 전직 대통령의 서거로 권한을 떠맡게 된 것뿐이다.

박정환 대통령마저도 그리 무서워한 적 없는 이병철이 아닌가.

그런 그가 고작 반년짜리 허수아비 권력을 무서워하겠나.

‘하지만 록펠러는 달라. 내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삼청은 석유가 필요해.’

1890년대 시행된 반독점법을 시작으로 록펠러는 어쩔 수 없이 석유 기업을 34개로 쪼갰다.

그렇게 록펠러의 뿌리에서 나온 석유 기업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에 불과하다.

누가 그런 노다지를 순순히 내주겠는가.

속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록펠러의 입김이 닿지 않는 정유 회사는 없다.

회사를 쪼갠 덕분에 록펠러의 주가가 무지막지하게 올랐다.

세계 정유 시장에서 록펠러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지고 말았다.

‘록펠러가 직접 소유한 회사만 삼청 정유에 석유 공급을 거절해도 타격은 어마어마하다. 더구나 록펠러의 입김이 닿는 다국적 정유 회사들까지 동조한다면… 삼청은 끝이다.’

그때 망하는 건 삼청만이 아닐 것이다.

외채 적자가 GDP보다도 많은 대한민국까지 폭삭 망해 버릴 것이다.

1인당 국민 소득이 고작 1,000불도 안 되는데 적자는 무려 68억 달러나 된다.

삼청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공장을 돌려 만든 물건을 내다 팔아 겨우 외채를 갚아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석유 공급이 끊긴다면 더할 수 없는 대재앙이 될 것이다.

이미 석유는 한국에선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자원이 되고 말았다.

‘사우디를 필두로 중동 일곱 개 국가가 석유 공급을 거절하자 청일 정유는 채 석 달도 버티지 못했다. 우리 삼청뿐만이 아니라 금산과 대한 정유조차 석유 없이는 반년을 버티지 못해.’

석유를 틀어쥐고 있는 록펠러를 거스를 수 없는 이유다.

록펠러가문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에 유명 인사들이 앞다투어 달려온 이유기도 하다.

‘김종표 하나를 제물로 바쳐 석유 공급 단절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지.’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 들인 시간은 매우 짧았다.

이병춘은 계산이 끝나자마자 김종표를 돌아보았다.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꼬박꼬박 불러 주던 호칭은 이미 떼 버린 지 오래다.

어느새 존댓말도 반말로 바뀌었다.

아니, 애초에 한국말이 아니라 영어를 쓰고 있다.

록펠러 들으라는 듯이.

[당신 때문에 록펠러가 석유를 안 판단다.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건가?]

이병춘의 말에는 어마어마한 노기가 느껴진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기업이 한순간에 쫄딱 망할 수도 있는 대위기가 아닌가.

록펠러발 오일 쇼크라면 중동발 오일 쇼크보다도 파급력이 훨씬 더 크다.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는 알량한 자리에 올랐다고 오만방자한 모양인데,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꼭 힘으로 보여 줘야 깨닫겠나?]

이병춘이 대놓고 등을 돌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박정환이 날 견제한 탓에 정치적 기반은 나보다 삼청이 더 단단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기업이라는 이름값이 있다.

본사와 계열사까지 합하면 데리고 있는 사원들이 몇 명인가.

더구나 장학 재단으로 키워 놓은 인재들이 있다.

삼청의 정치 자금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까지.

이번에 그들을 동원하여 정치적 총공세를 펼친다면?

자신은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는 자리조차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김종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회장, 지금 저 헛소리를 믿나? 되는 대로 내뱉는 애송이의 협박을 믿고 지금 나를…….”

[말뿐인 협박이라고? 내 말이? 아니면 록펠러의 말이?]

이병춘이 작심했다.

[삼청 키즈와 삼청 직원, 삼청의 정치인들까지 전부 풀겠네. 김종표, 어디 삼청의 정치 총공세 한번 막아 보겠나?]

김종표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병춘 옆으로 장준용이 합세한다.

[금산도 한 힘 보태지. 금산 키즈와 금산 직원, 금산의 정치인들도 함께할 거야.]

[우리 럭키 세븐도 같은 뜻일세.]

럭키 세븐 구자겸까지도 한 발 나서서 입을 보탠다.

[김종표, 네놈 때문에 석유 공급이 끊겼다는 말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내보내지. 개망신 한번 당해 봐.]

[너무 약한데? 우리 금산은 가진 힘을 총동원해서 대통령 권한 대행의 스캔들부터 터뜨릴 생각이야.]

그러자 조용히 있던 중앙 정보부 신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 박정환 대통령의 4대 부정부패에 관련된 수사 자료가 우리 중앙 정보부에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한 부씩 드릴까요?]

[그거 좋지. 그런데 우리 금산이 갖고 있는 스캔들은 성 스캔들인데, 그것도 아주 더럽고 추악한 걸로 내보낼 거야.]

[우리 럭키 세븐에서 갖고 있는 건 친일 행적입니다. 김종표가 주기적으로 일본에 뇌물을 상납하고 있는 건 다들 알고 있을 테니 긴말 않겠습니다.]

은근슬쩍 이세후 육군 참모 총장도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국가의 위기 상황이로군. 군에서도 이 일을 주시하겠다. 한낱 대통령 권한 대행의 망발로 인해 육군의 전차가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기름 없이 나라를 어떻게 지키나?”

이세후가 고리눈을 뜨고 김종표를 노려봤다.

모두의 따가운 시선이 김종표를 향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김종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럴 순 없어! 이놈들이 작심하고 밀어붙이면 정말로 난 끝장이야! 정치 인생이 끝나고 말아!’

김종표는 몸이 달달 떨려 왔다.

개돼지 국민들의 비난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곳에서 김종표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전부 사회에서 한가락 하는 유명 인사들이 아닌가.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박정환 대신 앉아 본 청와대 집무실 의자를 어떻게 포기해! 차기 대통령은 바로 나란 말이다!’

하지만 삼청, 럭키 세븐, 금산과 중앙 정보부, 군대가 전부 등을 돌리고 있다.

김종표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강태수!’

태수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얄미운 낯짝에 김종표는 이를 박박 갈았다.

‘이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뜯기며 곤경에 처해야 할 사람은 김종표가 아니라 강태수였어!’

김종표는 강태수의 태양 그룹을 박살 내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러다간 태양 그룹 박살 나기 전에 자신의 정치 생명이 끝나는 게 먼저일 것 같다.

살길을 찾기 위해 김종표는 재빨리 주한 미국 대사에게 매달렸다.

“주한 미국 대사, 당신이 좀 말해 보시오. 록펠러가 일방적으로 한국에 석유를 끊는다고 통보하지 않았소? 이건 양국 간의 외교에 커다란 문제가 생길……!”

“미국의 뜻이 아니라 록펠러의 뜻이요. 기업의 판매 결정이 어째서 양국 외교에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고 하십니까?”

주한 미국 대사가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확실히 말하건대,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요. 또한 록펠러의 심기를 거스른 건 당신의 독단으로 벌인 일이니 알아서 수습하시오. 왜 애먼 나를 끌어들여요?”

“대한민국을 우습게 여기는 거요?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석유 공급을 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기업 윤리 이전에…….”

“물건을 팔건 말건 그건 파는 사람 마음이지. 록펠러가 미국 기업이라고 내가 그것까지 왈가왈부해야 합니까?”

딱 자른 선 긋기에 김종표는 재빨리 록펠러를 봤다.

선글라스를 끼고서 표정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오만하고 꼿꼿한 자세.

젊은 여인은 말없이 좌중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병춘은 김종표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간다.

[김종표, 뭐 하고 서 있나? 제대로 수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장준용과 구자겸뿐만이 아니다.

[정말 석유 끊기는 꼴을 봐야 정신 차리겠나?]

사람들이 모두 한 발자국씩 다가오며 김종표를 압박하고 있었다.

[네놈 때문에 나라가 파탄 나게 생겼는데 아직도 잔머리를 굴려?]

어쩔 수 없이 김종표는 뒤를 돌아보았다.

태수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태수는 웃고 있었다.

‘빌어먹으으으으을!’

김종표는 목구멍까지 치민 욕설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김종표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어야만 했다.

[내, 내가… 어떻게 사과드리면… 되겠소?]

굴복할 수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 * *

엘리스는 선글라스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습관처럼 표정을 지우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차가운 표정 위로 자꾸만 놀라움과 감탄이 드러나려고 한다.

엘리스는 태수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이게 갑질인가요?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는 사람을 말 한마디로 몰아세웠군요.]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엘리스의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을 전한다.

[사과하는 방법까지 내가 가르쳐 줘야 합니까? …라고 하시는군요.]

태수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록펠러 영애께서는 더는 시간 낭비를 원치 않는다고 하십니다. 귀국 준비를 서두르겠다고 하시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갈까요?]

둘이 칼같이 등을 돌리자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석유를 안 판다는 통보만 하고 귀국해 버리면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록펠러 가주를 직접 찾아가도 만나 줄 리가 있겠나.

귀한 딸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대로 한국에 석유를 안 팔 가능성이 1%만 되더라도…….

사람들이 전부 김종표에게 소리를 질러 댔다.

“지금 뭐 합니까?”

“록펠러가 간다잖아! 석유 어쩔 거야!”

“내가 당신 무릎까지 꿇려 줘야 해?”

달려들어 김종표의 멱살을 잡을 정도로 흉흉했다.

어쩔 수 없이 김종표는 긴 한숨 끝에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미안합니다. 록펠러를 함부로 대한 무례에 대해 제대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엘리스는 계단을 올라가던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난 말뿐인 사과 따윈 믿지 않습니다.]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은은한 노기까지 비친다.

[당신의 행동을 보인 무례를 사과하고 싶다면 이번에도 행동으로 증명하세요.]

아까부터 태수가 귓가에 속삭이는 대로 말하는 엘리스.

[제7 광구의 석유 독점 개발권을 넘겨주세요. 그러면 한국에 대한 록펠러의 석유 판매 거부를 철회하죠.]

사람들은 수군댔다.

“제7 광구라면 박정환 대통령이 영유권 선포를 한 제주도 남해 해분?”

“록펠러가 석유 독점 개발권을 노려?”

“거기 석유 없다고 결론 났을 텐데?”

김종표가 딱 잘라 말했다.

[제7 광구에 석유 자원은 없습니다.]

[그건 제가 탐사해 보고 확인할 겁니다.]

[일본 측에서도 확실하게 제7 광구에 석유 자원이 없다고 결론을 냈습니다.]

김종표의 눈짓에 주한 일본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측 해양 과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제7 광구에는 석유 자원이 없습니다. 이 사실은 록펠러가 주께서도 알고 계실 텐데요?]

주한 일본 대사의 지원 사격에 힘입은 김종표.

그가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해상 유전 탐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민국의 국고와 국민의 혈세를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누가 대한민국의 국고 지원을 바란다고 했죠?]

엘리스는 김종표의 말을 잘랐다.

[누구의 자금 지원도 필요 없습니다. 실패와 성공은 전부 이쪽에서 책임질 겁니다. 당신이 책임져야 하는 건…….]

엘리스가 차갑게 말했다.

[나에게 행동으로 사과할 것이냐, 말 것이냐. 즉, 제7 광구 석유 개발권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 책임을 어떻게 질지 스스로 결정하세요.]

김종표는 90도로 굽혔던 허리를 스르르 들어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야, 도둑놈이 따로 없네.]

드디어 명분을 이쪽에서 얻었다!

자원을 사수하기 위해 록펠러와 얼굴을 붉혔다면 다들 이해해 줄 것이다.

[록펠러가 다른 나라의 자원을 강탈한다는데 이 나라의 수장으로서 어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제가 결단을 내려야겠군요. 이 나라의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하지만 태수가 그걸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엘리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단칼에 김종표의 말을 끊는다.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록펠러 가문은 대한민국 석유 개발과 관련해 단 1%의 지분도 없습니다.]

[그, 그럴 리가!]

[제7 광구는 태양 그룹이 단독으로 개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거기에 록펠러는 기술을 제공할 겁니다.]

[말도 안 돼!]

이번엔 태수가 확실하게 단언했다.

[그러니 국부 유출 걱정은 할 것 없습니다. 처음부터 태양 그룹이 책임질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본, 기술, 장비, 인력, 판매와 송유관까지. 모두 태양 그룹에서 맡겠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태수가 계단 위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했던 첫 마디를 떠올렸다.

-모든 것은 태양 그룹이 책임질 겁니다.

그 말은 비단 태양 그룹 경호실장 김광록이 벌인 일을 책임지겠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처음부터 태양 그룹은 지금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태수가 진즉 석유 공급 권리를 손에 틀어쥐고 있었어.’

‘모략가 김종표가 강태수의 덫에 걸리다니.’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국부 유출과 애국이라는 이유로 빠져나가 보려 했던 김종표.

그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진다.

‘외통수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아. 꼼짝도 없이 석유 개발을 허가해야 할 판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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