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호가호위 (4)
파이팅 자세를 잡으면서 김광록은 손가락을 까닥였다.
“들어와.”
까딱이는 손가락이 가운뎃손가락이다.
그 노골적인 의미에 경호실장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이 새끼가 미쳤나? 위아래도 몰라봐? 또 영창 보내주랴?”
“나 군복 벗었다.”
위아래 같은 소리 하네.
그리고 영창은 옛날에도 무서워한 적 없다.
그동안 지독한 괴롭힘에도 참아 준 이유는 밑에 딸린 놈들 때문이었다.
김광록이 대신 죽어 나는 건 부대원들이었으니까.
오늘 그간 쌓인 설움과 분노를 털어낼 생각이다.
김광록이 양쪽 가운뎃손가락을 동시에 세웠다.
“안 들어가면 내가 간다.”
“이 건방진 새끼가 진짜……. 한번 선임은 영원한 선임인데 말이야.”
어째서인지 경호실장은 요지부동이다.
김종표가 못마땅하게 경호실장을 노려본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경호실장은 김종표의 노여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김광록을 마주하자마자 피부를 뚫을 것 같은 살기 때문에 오금이 저렸기 때문이다.
맹수 앞에 발가벗겨진 채 내던져진 기분이 이런 것이던가.
‘이런 미친 괴물 새끼를 상대하라고? 시팔!’
왜 안 그렇겠나.
군대 내에서 김광록의 위명이 오죽 쟁쟁했어야지.
창군 이래 가장 강하다는 전설.
김광록과 붙으면 최소 골절, 최대 사망이다.
그나마 아군과는 대련 형태로 붙어서 골절로 그쳤지, 적군은 대부분 사망하지 않던가.
확실하고 빠르게 부딪쳤다 하면 적군 멱을 따는 김광록이다.
대체 무슨 수로 이기겠나.
‘내가 미쳤다고 이 새끼랑 붙어! 하지만 대통령 권한 대행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는데, 뺄 수도 없고!’
앞은 맹수고, 뒤는 무소불위 권력자다.
‘진퇴양난이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이 자신을 뽑으면서 뭐라고 했던가.
-군에서 주먹 잘 쓴다고 소문이 났던데?
잘 쓴다고 소문난 주먹은 김광록 같은 주먹이 아니었다.
김광록과 달리 적군이 아닌 부하 군인들 잡을 때 사용하던 주먹이었다.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해지는 신묘한 주먹질.
악명도 명성이라고 그 소문이 김종표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난 아랫사람 제대로 잡는 그 주먹을 높이 사. 호가호위를 그리 잘한다지?
그 말을 듣고서야 김종표가 왜 자신을 뽑았는지 깨달았다.
죽은 차기범 경호실장의 잔재를 완전히 뽑아내기 위해서.
부하들을 잔인하게 때려잡으며 권력에 기생할 군기반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차기범의 뒤를 이어 새로운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다.
‘여기서 겁쟁이처럼 물러나면 당장 잘릴 거야. 내 출세는 이걸로 끝이라고!’
잠깐 맛본 대통령 경호실장의 권력!
그 얼마나 달콤한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어째서 차기범 경호실장을 오성회 수장 전두호 사령관보다 윗줄에 놓는지 알 수 있었다.
권력 냄새를 잘 맡고, 호가호위에 일가견 있는 그이기에 더욱 사무치게 느낄 수 있었다.
‘절대로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 없다! 김광록 따위가 내 앞길을 방해한다면, 예전처럼 치워 버리면 그만이지!’
군대에서 김광록 한두 번 잡아 봤나.
그때보다 권력이 더 강해졌는데!
날선 김광록을 앞에 두고도 이를 악무는 이유였다.
‘저 괴물 같은 김광록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
바로 데리고 있는 부하들!
몇 년이나 김광록을 집요하게 괴롭혀 왔기에 잘 안다.
김광록은 겁이 없지만, 주변 사람들이 망가지는 걸 꺼려했다.
이제까지 그가 김광록을 붙들고 늘어질 수 있는 이유였다.
그래서 경호실장은 야비하게 웃었다.
“김광록, 후회할 텐데? 비키지 않으면 난 네 부하들……!”
“시끄럽다.”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대뜸 날아온 솥뚜껑 같은 손이 따귀를 갈겼기 때문이었다.
짝 소리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쾅 소리가 난다.
태수가 청일 아파트 벽을 오함마로 때렸을 때 나던 소리와 비슷했다.
“끄어어어어-!”
딱 그 한 방에 경호실장은 두 눈이 뒤집혔다.
흰자위가 보인다.
김광록이 반대편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쾅!
경호실장의 목이 뽑힐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홱 꺾였다.
허공에 피와 함께 이빨 몇 개가 튀어나왔다.
쾅!
“끄르륵-!”
김광록은 아예 경호실장의 멱살을 한 손으로 틀어쥐었다.
가뿐하게 성인 남자를 강제로 들어 올린다.
따귀 때리기 딱 좋은 높이와 각도가 나왔다.
아주 좋다.
“뭔 싸움을 주둥이로 하나.”
아…….
이 새끼는 군대에서도 주둥이로 싸움을 걸어오는 작자였지.
군대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김광록의 따귀 속도가 빨라졌다.
쾅! 쾅! 쾅! 쾅!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사색이 되어 김광록의 몸에 매달렸다.
삽시간에 열댓 명이 주렁주렁 달라붙었다.
“참으십쇼! 이러다 죽습니다!”
“이 새끼는 죽어도 싸지만, 보는 눈들이 비쌉니다!”
“그러니까 여기 말고 으슥한 곳에서 처리합시다!”
죽이지 말란 소리는 없다.
김광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따귀 일곱 대밖에 안 때렸다.”
아직 갚아줄 빚은 많고 많다.
그런데 주먹질도 아니고 그깟 따귀 좀 때렸다고…….
“저 새끼 게거품 물었습니다! 강냉이 죄다 털렸고요!”
“안면골절이 확실합니다! 안 그래도 못생긴 면상인데 아주 떡 반죽이 됐습니다!”
“대장 따귀 한 대만 더 맞으면 저승행이 확실합니다!”
확실히 상태가 나쁘긴 하다.
김광록은 부하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경호원들.
부하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마자 김광록은 씩 웃었다.
“그럼 얼굴은 말고. 사지 육신은 멀쩡하니까 좀 건드려도 괜찮겠지.”
순식간이었다.
빡 소리와 함께 김광록의 주먹이 경호실장 사지육신을 두들긴다.
말릴 새도 없었다.
“끝!”
짧은 시간 동안 야무지게도 패 놨다.
흐물흐물 오징어 상태가 되어서 바닥에 털썩 쓰러진 경호실장.
경호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몇 동강이나 낸 거야.’
‘전문가답게 목숨 줄은 제대로 잘 붙여 놨네.’
‘역시 우리 대장. 속은 시원하다.’
김광록과 청와대 소속 대통령 경호실장이 한판 붙었다.
그런데 총 대치 시간 3분 내외로 상황이 정리됐다.
김광록의 실력을 본 자들은 경악했다.
‘태양 그룹 경호실장, 인간이 아니군.’
‘이건 뭐 숫제 괴물이잖아.’
‘그래도 대통령 경호실장이면 제법 한가락 하는 인물일 텐데.’
금산 호텔 로비를 메우고 있는 자들은 정재계 유명인사들이었다.
각국 대사관에서 나온 외교관들이었다.
그들이 지금껏 만나 온 실력자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런데도 김광록은 규격외다.
그 어떤 경호원과도 견줄 수 없는 독보적인 실력이었다.
‘강태수 회장이 제대로 골랐군.’
삼청 그룹 이병춘의 눈에 김광록이 콕 박히는 순간이었다.
나머지 재벌 총수들과 국회의원들도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 대통령 권한 대행 김종표만은 전혀 달랐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김종표가 외쳤다.
“태양 그룹 경호실장이 대통령 경호실장을 두들겨 팼다! 그것도 대통령 권한 대행의 면전에서! 다들 똑똑히 봤습니까?”
김종표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낮게 신음을 흘리는 게 아닌가.
‘모략가 김종표가 또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군.’
김종표는 주변을 돌아보며 선동했다.
“태양 그룹은 대통령 권한 대행을 위협하며 주먹을 들었다! 대통령 권한 대행을 지키려던 대통령 경호실장이 당했다! 이건 태양 그룹이 반란인가!”
“반란?”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장준용은 탄식했다.
‘모략가 김종표가 섬뜩한 칼을 꺼냈구나. 악마 같은 혓바닥으로 진실을 왜곡해 상대를 몰아세우는 게 저자의 수법이지.’
모략가 김종표의 수작에 걸려 몰락한 세력이 몇이던가.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고, 선동과 날조로 여론을 몰아간다.
박정환이 지낭인 김종표를 견제했던 이유다.
“태양 그룹 전체를 반역으로 몰고 싶지 않으면… 비켜.”
태수는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했다.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도 마찬가지.
‘하지만 내가 손을 쓴 탓이 태양 그룹이 반역으로 몰리기라도 하면…….’
김광록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전직 군인에게 반역이란 의미는 매우 크다.
즉결처형까지 가능한 사안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비켜라!”
“내 독단이다. 태양 그룹과는 상관없지. 그래도 못 비켜.”
그때 계단 위에서 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은 태양 그룹이 책임질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위층 홀로 향하는 계단으로 꽂혔다.
태수가 선글라스를 낀 젊은 외국인 여자와 팔짱을 낀 채 계단 위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양 그룹 경호 실장과 경호원들, 전원 경호 대형으로. 계단 앞을 사수한다.”
“예, 알겠습니다!”
김광록과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일제히 계단 앞으로 이동했다.
김종표는 볼을 씰룩였다.
“강태수, 태양 그룹이 이 일을 전부 책임진다고 했나?”
너 잘 걸렸다.
근육질 괴물을 뒤로 물리려고 트집을 잡았는데, 대신 강태수라는 대어가 걸렸다.
“좋아. 태양 그룹이 반란을 시인했군. 심지어 책임자를 문책하지도 않고 아직도 내게 공격 의사를 비치면서 말이야.”
“이건 어떻습니까?”
태수가 피식 웃었다.
엘리스를 위해 친절하게 영어로 말한다.
[태양 그룹과 록펠러 가문 경호원들이 합심하여 록펠러를 경호하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 권한 대행은 대뜸 경호원들을 뚫고 록펠러에게 위해를 가려고 했다. 그걸 저지하기 위해 손을 썼다.]
태수의 말에 다들 표정을 굳혔다.
-대통령 권한 대행이 주도해서 벌인 록펠러 위해 시도!
[세계적인 대재벌인 록펠러 가문은 늘 납치 시도와 협박에 시달린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이 실제로 한국에서 벌어지게 될 줄이야.]
태양 그룹에 누명을 씌우던 김종표가 외려 누명을 쓰게 생겼다.
태수가 입을 열면 열수록 불리해진다.
그래서 김종표는 재빨리 외쳤다.
“가당치도 않다! 나는 이 나라의 통수권자로서 국빈이 방한했다기에 호의를 가지고 방문하여…….”
[사전에 방문 허락은 받고 이러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위에 연락을 넣겠다는 장준용의 제안조차 거절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김종표가 아닌가.
김종표가 변명을 하기 전에 태수가 선수 쳤다.
엘리스의 입가에 귀를 바싹 댄 후 고개를 끄덕였다.
[록펠러 영애께서 이 일을 매우 불쾌하게 여긴다고 하십니다. 불청객을 받지 않겠고 쉬고 싶다는 록펠러의 뜻을 무시한 것은 무례의 극치라는군요.]
엘리스는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수는 그녀의 입가에서 귀를 떼지 않은 채 말을 전한다.
[무례한 자와는 대화하지 않겠다. 더는 이곳에 머물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통보하겠다.]
록펠러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몰려들었던 유명 인사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린다.
‘강 회장이 마련한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 면담 기회가 왔을지도 모르는데, 김종표 때문에 전부 물 건너갔다.’
이 사단을 만든 김종표.
그를 향한 시선이 차가웠다.
특히 석유 공급과 관련한 제안을 건네려고 달려온 재벌 총수들의 눈초리가 유독 매서웠다.
태수는 쐐기를 박았다.
[록펠러는 한국에 석유를 팔지 않겠다.]
경악스러운 결론이었다.
공장에서 나온 물건을 팔아서 경제가 굴러가는 한국이다.
중공업은 물론이고, 경공업 공장 돌리는 데도 석유는 반드시 필요하다.
게다가 화력 발전소로 전력의 대부분을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기에 가뜩이나 중동발 석유 파동을 심하게 겪은 직후였다.
그래서 록펠러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에 정유 회사를 가진 재벌들이 제일 먼저 달려오지 않았나.
김종표는 얼굴을 구겼다.
[한국에 석유 공급을 끊겠다고? 한국이 아무리 작은 시장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안 팔아!]
태수가 대뜸 외친다.
[내 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기분 나빠서 한국에 록펠러 정유의 석유를 안 팔겠다는 뜻인데.
문제는 록펠러가 세계의 석유 95%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동 전쟁 이후 록펠러가 철수하게 된 나라도 몇 군데 있지만, 아직 지분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다.
록펠러가 안 판다고 못 박으면 정말로 전 세계가 석유 공급을 끊을 것이다.
‘안 돼!’
‘끔찍한 상황을 어떻게든 막아야 해!’
‘이대로라면 우린 파산이야!’
재벌 총수들이 입을 열려고 할 때, 태수가 먼저 손을 들었다.
[저와 록펠러를 설득하려고요? 순서가 틀린 것 같습니다.]
태수가 엘리스의 팔을 일부러 토닥인다.
팔짱이 아주 단단하다.
저 팔짱 풀어내는 것보다 다른 것으로 대화를 풀어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눈치 빠른 삼청 그룹 이병춘이 제일 먼저 김종표를 매섭게 노려봤다.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며 깍듯하게 대우해주던 이병춘이 돌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