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호가호위 (2)
청와대 집무실.
대통령 권한 대행 김종표가 집무실 의자에 앉아 만족스러운 듯이 책상을 쓸었다.
“내가 박정환을 이 자리에 앉혀 준 것도 모르고.”
박정환이 군사 정변을 꿈꿀 때 구체적인 계획을 짠 게 바로 김종표였다.
그렇게 김종표는 박정환의 지낭이 되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하지만 박정환이 끝내 내주지 않던 이 자리. 결국 내 차지가 되었어.”
박정환은 머리가 비상하고 수완이 좋은 김종표를 견제했다.
실권은 하나도 내주지 않으면서 그의 능력은 쓰고 싶어 했다.
그렇게 국무총리가 되었고, 박정환의 경제 개발 계획을 만들어 냈다.
“박정환, 난 제2의 박정환이 아니라, 박정환조차 뛰어넘지 못하는 절대 권력자가 될 거야.”
김종표는 야심만만하게 웃었다.
맞은편 벽에 걸린 태극기를 보면서 만년필을 돌렸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실장 김기원이 문을 열었다.
옷을 벗은 김정림의 후임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공항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인가?”
“록펠러 가문의 전용기가 한국에 들어왔답니다.”
“뭐? 록펠러?”
김종표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놀랐는지 들고 있던 만년필이 떨어진 줄도 몰랐다.
“록펠러가 왜 한국에 들어왔지?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는 이에 관해 연락하지 않았는데?”
“지금 주한 미국 대사관도 발칵 뒤집혀서 록펠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김종표는 재빨리 외투를 찾아 입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록펠러는 지금 어디에 있나?”
“금산 호텔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차 대기시켜. 나도 금산 호텔로 간다.”
록펠러가 왔으면 당연히 달려가서 만나야 하지 않겠나.
* * *
금산 호텔 주차장에는 고급 승용차가 속속 들이닥쳤다.
발 빠르게 소식을 받은 자들이 전부 달려온 듯했다.
금산 호텔의 주인인 장준용도 마찬가지였다.
장준용은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채근했다.
“록펠러가 금산 호텔에 투숙했다고? 그런 중요한 일을 왜 이제야 보고해?”
“죄송합니다. 예약도 없이 들이닥친 일이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지금 어디 계시나?”
“금산 호텔 바 VIP룸에 계십니다.”
“누구와?”
“태양 그룹 총수 강태수 씨와 둘이 면담하고 계십니다.”
“강태수 그 친구와?”
다급했던 장준용의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이제 보니 강태수 그 친구를 만나러 여기까지 왔나 보군. 그래서 금산 호텔에. 하하핫.”
강태수라면 그래도 얼굴 한번 보여 주겠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진 장준용.
발걸음마저 느긋해졌다.
이제야 주변이 보인다.
“어이, 신지수 중앙정보부 부장께서도 여기 오셨군그래.”
“장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자네도 당연히 소식 듣고 달려왔겠지?”
“만에 하나 있을 사태에 대비해 근처 경계 수준을 좀 올려 둬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기야. 석유 재벌 록펠러 가문 사람이 한국에서 테러라도 당한다면 중앙정보부부터 철퇴를 맞을 테니 말이야.”
장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슬쩍 주변을 가리키며 웃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에서 나설 것 없이 이미 경계가 살벌한데?”
“태양 그룹 경호실이 총동원되었다고 하더군요.”
“거기 경호원이 한 100명쯤 된다고 했던가? 그보다 좀 많아 보이는데? 군데군데 외국 용병들도 섞여 있는 것이…….”
“록펠러의 경호원들이라고 합니다. 공동 경계를 구축했다고 하는군요.”
“철저하군. 이게 록펠러라는 것인가.”
반가운 얼굴이 또 보인다.
“육군 참모 총장께서도 여기 오셨나?”
“수도 경비 사령부 인원들을 차출해서 경계 보안을 좀 더 강화하려고 나온 참입니다.”
“대통령 합동 수사본부는 어쩌고?”
육군 참모 총장 이세후가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서 말입니다.”
“합동 수사본부에서 퇴근한 육군 참모 총장께서는 록펠러를 만나서 무엇 하려고? 한미 군사 동맹에 대해 청탁 좀 하려고?”
정확하게 들어오는 찌르기에 이세후는 멋쩍게 웃었다.
“록펠러 가문이라면 가능하잖습니까?”
“가능하지 그럼. 록펠러 가주가 지목하는 자가 대통령이 되고, 행정부가 되고, 상원 의원이 된다는 판인데. 미군 움직이는 건 일도 아니겠지.”
어째 주차장에서 만날 사람들은 전부 만날 작정인가 보다.
“삼청 그룹 총수께서도 오셨군.”
“럭케 세븐 총수도 오셨습니다.”
“대한 정유에서도.”
“김영상 의원과 김대준 의원까지.”
끝도 없이 들어서는 유명 인사들.
그중에서 태극기를 펄럭이며 들어오는 의전 차량이 있었다.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까지 전부 다 왔군.”
“주한 미국 대사 의전 차량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주한 일본 대사 의전 차량까지.”
“대사관 차량이 계속 진입하는데요?”
록펠러 가문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려고 오밤중에 집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금산 호텔 로비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 *
금산 호텔 바 VIP룸.
엘리스는 태수의 술잔을 직접 채워 주었다.
쪼로록.
맑은 소리와 함께 태수의 양주잔이 찰랑거린다.
태수는 한입에 털어 마셨다.
엘리스가 다시 한 잔을 채워 주며 웃었다.
[와일드 캣인 데다 해상 유전이에요. 석유 탐사 및 시추에 엄청난 돈이 들 텐데요. 록펠러와 함께 석유 개발을 하자면서 록펠러 돈은 한 푼도 필요 없다고요?]
[내 사업이니 사업 자금은 내가 책임집니다.]
[한두 푼 드는 게 아닐 텐데요. 가능하겠어요?]
물론이다.
[쉐도우 인베스트먼트라고 아십니까?]
한수가 운영하는 미국 투자 회사다.
그리고 그곳이 오일 쇼크로 휘청대는 미국, 영국, 홍콩, 일본의 굵직한 은행을 인수해 적극적으로 세를 키워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을 전부 태수가 내놨다.
[설마…….]
[7개의 세계은행에서 투자를 받을 겁니다.]
양해를 구한다면 장수 은행까지 8개 은행이 될 테고.
[태양 그룹의 계열사는 16개죠. 그런데 빚은 전무합니다. 그러니 기업 대출과 담보 대출 여력도 충분합니다. 여차하면 주식을 발행해도 되고요.]
엘리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마, 말이 안 돼요. 사업을 하면서 빚이 전무하다고요? 대출과 주식 발행 여력까지 남았다는 게 말이 돼요?]
아무리 작은 기업이라고 해도 빚 없이 운영하는 게 쉽지 않다.
더구나 엘리스가 뒷조사했을 때 태수는 고작 3년 만에 이 자리까지 왔다.
10만 원짜리 광산에서 시작해서 재벌 기업이 되었다는 남자가 아닌가.
그러면 당연히 빚더미 위에 힘겹게 쌓아 올린 누더기 성이어야 하지 않겠나.
태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경험이 붙으면 어렵지 않게 꾸릴 수 있을 겁니다.]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설명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란 건 알아요.]
그러니 겸손은 필요 없어요.
엘리스가 흥미로운 눈으로 태수를 본다.
그녀의 눈이 감탄으로 반짝였다.
[비결이 뭐죠?]
[비결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굳이 꼽자면 이겁니다.]
태수는 딱 잘라 말했다.
[투자금을 받지 않는 대신 록펠러 가문에 지분도 드릴 수 없습니다.]
[…굉장한 비결이군요. 신규 사업을 시작하면서 투자금을 받지 않는다는 것부터 일단 불가능해 보이지만요.]
엘리스는 묘한 표정으로 태수를 보았다.
[그때도 당신은 그렇게 말했어요. 위험 부담을 전부 떠안을 테니 내 사업에 숟가락 올리지 마라. 기술을 제공하면 돈을 주겠다고 했죠.]
[그때와 조금 다릅니다. 전 지금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기회를 잡으십시오.]
[석유 개발의 처음과 끝을 함께하는 것. 기술과 바꿔 제가 얻을 수 있는 건 그런 경험을 쌓을 기회란 말이군요.]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유 개발에 성과를 보이는 것은 록펠러의 차기 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위험 부담 없이 무임승차를 하라는 건가요? 대신 지분을 포기하고?]
지분이 탐난다.
하지만 태수는 절대로 지분에 관해서 만큼은 내주지 않았다.
[석유 개발할 기회가 또 생길 것이라 장담할 수 있습니까?]
장담할 수 없다.
엘리스는 가지고 있는 유전이 없다.
어머니는 무명 가수였고, 엘리스의 뒷배가 되어 주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러니 엘리스에게 누가 그런 기회를 줄 수 있겠나.
[전 유럽 석유 회사를 인수하려고 합니다.]
중동 전쟁으로 중동 각국이 서방 세력을 쫓아냈다.
그때 사우디에서 철수하게 된 록펠러 가문이 아닌가.
주식 지분 정리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사실상 몇 년 내로 사우디는 록펠러에서 독립할 것이다.
록펠러가 유전을 개발한 사우디에서도 철수할 정도니 다른 나라는 말해 무엇 하겠나.
엘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유럽 석유 회사라면 중동 전쟁과 오일 쇼크 때문에 도산 직전이었겠군요.]
[덕분에 아주 싼 값에 인수할 수 있겠더군요.]
록펠러의 기술이 없어도 아쉬운 대로 유럽 석유 회사의 기술로 유전 개발을 강행하겠다는 뜻이었다.
태수는 전혀 아쉬울 것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아쉬운 건 엘리스였다.
‘저 남자 말이 맞아. 아버지 건강이 최근 급격히 나빠졌어. 주치의 말로는 차기 가주 경합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했지.’
엘리스는 이제 막 성인이 되었다.
독립할 때 들고 나온 종잣돈으로 경영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
또한 석유 개발에 참여할 기회도 없다.
‘난 시간이 부족해. 설사 내 돈을 들여서라도, 모든 것을 양보해서라도 난 반드시 이 기회를 잡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차기 가주는 될 수 없어.’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당대에 가주는 오로지 한 명.
‘아버지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신다면 모든 게 끝이야.’
엘리스는 지금 어떠한 기본 조건도 달성하지 못했다.
그녀가 사업에 성공하여 유전을 사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 아버지가 버텨 주실 거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받아들이겠어요.]
됐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밖이 무척 소란스러웠다.
엘리스가 뒤를 돌아봤다.
[경호원들이 분명 출입을 통제하고 있을 텐데요. 이상한 일이군요.]
[경호원들은 일을 잘하고 있을 겁니다. 다만 일을 이상하게 만드는 자들이 문제죠.]
태수는 엘리스에게 말했다.
[밖을 좀 정리하고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 소란을 부리는 자에게 똑똑히 경고해 줘야 앞으로의 일이 쉬워질 테니까요.]
[경고?]
태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록펠러의 힘을 등에 업고 제대로 호가호위할 거라고 말했죠?]
[네.]
[이번에 한번 지켜보겠습니까?]
[뭘요?]
[당신 가문의 힘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엘리스가 묘한 표정으로 태수를 보았다.
기대와 의문, 그리고 흥미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차기 가주를 꿈꾸는 당신이라면 가진 힘을 제대로 휘두르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 아주 좋은 공부가 될 겁니다.]
가문의 힘을 제대로 휘두르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라면 마다할 이유가 있나.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갑질 하면 됩니다.]
엘리스는 어리둥절했다.
[갑질?]
[네. 당신이 한국에 와서 해야 할 일은 말 그대로 갑질의 연속이 될 겁니다.]
의아했다.
선뜻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하는 태수.
[제가 오늘 똑똑히 보여 드리죠. 힘 있는 자들이 어떤 식으로 갑질할 수 있는지. 복잡한 일을 얼마나 쉽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지.]
엘리스는 홀린 듯이 태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무조건 제 말에 동조한다고.]
그거라면 아주 쉽죠.
엘리스는 벌써부터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 아예 석유 사업권을 따내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립시다.]
[좋아요.]
태수는 엘리스의 팔을 제 팔에 끼웠다.
태수와 팔짱을 끼게 된 엘리스는 붉어지는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팔짱을 푸는 대신 오히려 태수의 팔을 살짝 잡았다.
태수가 그녀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면서 웃었다.
[어디 록펠러의 힘을 마음껏 휘두르러 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