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감정의 골(3)
금산 호텔 바 VIP룸.
태수는 연거푸 독한 양주를 들이부었다.
테이블 위에 빈 양주병이 벌써 몇 병이나 굴러다닌다.
오늘따라 술이 쓰다.
김광록이 룸 안으로 들어왔다.
“인천항에서 잡아 온 그 일본인 말이야.”
한일권의 뒤를 따라간 인천항.
그곳에서 은밀한 만남을 포착했다.
그리고 김광록은 그중 태수가 고른 인물을 슬쩍 잡아 왔다.
“너를 잘 아는 모양이던데? 아주 치를 떨더라.”
왜 안 그렇겠나.
태수라고 그를 인천항에서 다시 볼 줄 알았을까.
“몇 년 전 신일본 제철에서 파견된 기술 고문입니다. 포항 철강 제철소를 짓는 일을 맡았을 때 만났었죠.”
우시로다 타케시[後田武至].
빠른 시일 내로 제철소를 완공해야 하는 박태종의 처지를 이용해 패악을 일삼던 놈이었다.
태수에게 약점이 잡힌 이후로 태도를 바꿔 제철소 건설에 적극 협력해야 했다.
“당시 일본 정부를 사칭해서 취업 알선 브로커 짓에 밀항과 밀수에도 손을 댔었죠.”
그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한 루트로 범죄와 연관이 있던 놈이었다.
포항 철강이 준공되고, 당연히 일본으로 돌아갔으리라 싶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서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 새끼, 쫄보더라.”
김광록이 일단 주먹부터 들이미는데 안 쫄 놈이 드물다.
특히 저놈은 나쁜 짓을 하도 두루두루 하고 다녀서 그런지 목숨에 대한 집착이 매우 컸다.
“청일의 도련님과 그 일본 놈, 뒤에서 약 거래를 하고 있었어. 한두 번이 아니라던데.”
한일권이 이렇게 오랫동안 뒤에서 하고 다니던 짓을 태수는 몰랐었다.
‘그냥 조폭 몇 조직과 어울리면서 갑질하고 다니는 정도라고 생각했지.’
청일 그룹 키우는 데 혈안이 되어서 한일권이 뒤로 뭘 하고 다니는지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맞겠다.
한일권이 눈앞에서 크게 사고만 치지 않으면 대충 미뤄 두었다.
처음 청일 그룹을 이끌게 됐을 때는 버거워서, 나중에는 귀찮아서였다.
김광록은 제 잔에도 양주를 부어 마셨다.
“약을 들여오는 걸로 보아 일본 야쿠자 세력과도 연이 닿아 있을 거야.”
“아마도 그렇겠죠. 야쿠자는 이제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기업이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야쿠자가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에 한청호가 개입해 도와주고 있었다.
한일권은 그런 가운데 다른 것에 눈이 돌아간 것이다.
“청일에서 오랫동안 일본 기업의 뒤를 봐주고 있을 줄이야.”
“한청호가 뿌리 깊은 친일파입니다. 일본에 연줄이 꽤 많을 겁니다.”
“연줄이 꽤 많은 정도가 아니잖아. 그 일본 놈이 말하는 거 들어 보니까 거의 매국노 수준이던데.”
“박정환의 뒤처리를 자청해서 담당했던 한청호가 아닙니까. 아마도 일본 기업들뿐만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도 커넥션이 있을 겁니다.”
탁.
태수가 술잔을 내려놨다.
“한일 대륙붕 협약의 책임자가 김종표예요. 김종표와 한청호, 거기에 박정환까지 이어지는 루트. 한일권은 그걸 이용하려고 하는 겁니다.”
김광록이 한숨을 쉬었다.
“태수야, 너 어떡할 거냐?”
“어떡하긴요.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입니다. 내가 나선다고 망가질 접선 루트도 아니고.”
태수는 딱 잘라 말했다.
김광록이 조금 실망한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건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이지.”
김광록과 박태종은 같은 애국 계열 군인이 아니던가.
나라 걱정에 몸을 던지는 부류였다.
하지만 태양 그룹 경호실장이 된 이상 더는 군인이 아니라는 것도 자각하고 있다.
김광록을 말했다.
“하지만 그 쓰레기 새끼가 네 목숨을 노리고 청부를 했을 때는 말이 달라지지. 안 그러냐?”
그랬다.
한일권은 그놈들에게 태수를 죽여 달라고 청탁했다.
“여자를 붙여 너를 약쟁이로 만들려고 했다고 하잖아.”
한일권과 우시로다 사이에 오고 간 말이었다.
김광록 앞에서 우시로다는 고분고분하게 전부 실토했다.
“약에 찌든 초명 은행장 딸 못 봤어? 너도 그 꼴 날 뻔했다고 생각하면…….”
김광록이 분을 참지 못하고 벌컥벌컥 양주병째 마셨다.
흐르는 양주를 손등으로 슥 훔치는 김광록.
그렇게 둘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 * *
얼마나 마셨을까.
빈 양주병이 일렬로 세워져 테이블 한쪽 구석을 채웠다.
태수는 먼저 입을 열었다.
“광록이 형.”
태수는 양주잔을 빙글 돌렸다.
태수의 숨에서 진한 양주 냄새가 풀풀 풍겨 왔다.
“귀찮은데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죽여 버릴까?”
태수답지 않은 말이었다.
김광록은 태수가 매우 취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증거로 태수는 어느새 말을 놓고 있었다.
“죽여? 네가?”
“응.”
“누구를?”
“알잖아.”
태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인내심이 닳고 있다는 게 느껴져. 조바심이 들어.”
김광록은 태수의 팔목을 붙들었다.
“그만 마셔. 너 취했다. 돼도 않는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오늘도 말이야. 한일권의 집에 잠입한다고 했을 때. 금고를 털고, 도청기를 설치하고, 치부책을 찾는 것보다 더 간단하고 쉬운 방법을 택하고 싶었어.”
“뭔데?”
“집에 들어간 김에 다 죽여 버리는 거. 다 죽이고 집을 태워 버리면 증거 인멸까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그 거대한 집을 마주하자 옛 기억이 몰려들어서 증오가 끓어올랐다.
“수사를 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힘으로 덮어 버리면 되지 않을까. 다른 힘 있는 놈들이 하는 짓을 떠올렸지.”
한일권이 전생에 많이 하던 수법이었다.
은밀하게 일을 저지르고, 힘으로 덮고.
송 비서가 아주 오랫동안 뒤처리를 해 왔던 일이었다.
인천항에서 한일권이 하는 짓을 본 순간, 태수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차근차근 망하게 하고, 처절하게 짓밟으려고 했거든?”
“그럼 그렇게 해.”
“그런데 한일권이 하는 짓을 봐.”
벌써 태수를 향한 살인 미수가 3번째였다.
“아주 많은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지더라.”
태수의 눈은 차가웠다.
“난 지금껏 스스로 정한 룰을 지키려고 노력했거든.”
살인하지 않을 것.
마지막 선을 넘지 않을 것.
복수에 잡아먹혀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난 마지막까지 룰을 지켰어.”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태수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한청호 저택의 가정부를 매수해서 음식과 물에 독을 타는 것.
복면 하나 뒤집어쓰고 들어가 칼부림하는 것.
휘발유를 잔뜩 뿌려서 아예 집째 홀랑 태워 버리는 것.
폭발물을 설치해서 터뜨리는 것.
아니면 청부 살인자에게 의뢰해 죽이거나.
복수의 방법은 아주 많았다.
“오늘 한일권의 실체를 봤을 때 그간 내 노력이 모두 허망하게 느껴지더라. 저 새끼는 반칙하는데, 왜 나는 안 돼?”
“그래서 너도 범죄자가 되려고?”
사람 죽이고 감방 가면 다 무슨 소용인데?
태수가 씁쓸하게 양주를 마시는 이유였다.
태수가 양주병을 들어서 그 안을 들여다본다.
호박색 액체가 찰랑인다.
“형, 그거 알아? 사람들은 주정을 얻기 위해 증류를 해.”
브랜디, 위스키, 진, 럼, 보드카, 테킬라, 아쿠아비트 등은 비싼 양주는 모두 증류주다.
1차 발효된 양조주를 서서히 가열하면 물보다 끓는점이 낮은 알코올이 먼저 기화한다.
이때 증발하는 기체를 모아 냉각시킨다.
그렇게 사람들은 고농도의 알코올 액체인 주정을 얻는다.
“증류로 한 번 걸러진 독한 술은 비싼 몸값을 자랑하게 되는 법이야.”
태수는 양주를 한입에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결의에 찬 마음도 독한 술과 같아. 거르고 걸러서 남은 주정이라 비싼 거야.”
한청호를 쓰러뜨리고, 한일권을 마주했다.
“독한 놈이 이기는 거야. 난 더 독해져야 해.”
“독해져서 뭐하려고?”
복수.
“그전까지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 없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언제 내 가족이 그놈 손에 죽어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형은 느껴 본 적 없을 거야.”
그래서 태수는 경호원을 100명 넘게 고용했다.
재벌집이라고 쳐도 너무 과한 숫자였다.
“매일 자동차와 일터 주변을 순찰하고, 점검하고, 24시간 교대 근무로 긴장을 놓지 않고.”
현재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하는 업무였다.
태수뿐만 아니라 사장단까지 경호한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테러와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서였다.
“마음 편히 여자를 만나거나 부모님을 뵈러 갈 수도 없지.”
혹시나 그놈의 표적이 될까 봐.
가족들을 모두 해외로 도피시키게 된 이유기도 하다.
“더는 그놈 손에 잃기 싫어서 스스로 목줄을 차게 된 기분이랄까. 그거, 되게 답답해.”
전생에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
다시 겪기 싫다.
그건 태수의 족쇄가 되었다.
김광록은 양주병을 탁자에 쾅 내려놓았다.
“뭐가 무서워? 그냥 무시하고 네 인생 살면 되지.”
가족들의 원한과 태수의 원한이 아직도 새파랗게 불타올라서 가슴을 뜨겁게 지핀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무시하고 살 수 있을까.
시시때때로 가슴을 짓누르고, 잠들면 꿈에서도 청일 병원에서의 일이 악몽으로 나타나는데.
김광록이 호언장담했다.
“우리가 곁에 있는 이상 누구도 널 위협할 수 없을 거다.”
김광록이 태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스스로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야. 넌 이제 지켜야 할 거 많아졌어.”
그걸 태수가 왜 모르겠나.
잃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태수는 여태 악착같이 자신만의 룰을 고수했다.
다만 그게 시시하게 느껴지고 말았을 뿐이다.
더 편하고, 쉽고, 화끈하게, 빨리 한일권을 조지길 바란다.
“태수야, 하나만 물어보자. 너 요즘 행복하냐?”
“행복? 그게 뭔데?”
어느새 이번 생도 행복보다는 성공과 복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평안과 행복을 바라는 건 사치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태수에게는 가족과 친구를 지키겠다는 사명만이 남아 버렸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해외 멀리 보내고서 얼굴 못 본 지 얼마인가.
태수에게 남은 건 동맹과 적밖에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일만 남은 것이다.
“인생 짧다. 허튼짓에 낭비하기엔 아까운 날들이야. 행복하게 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야.”
내게 그런 여유가 있었던가.
태수는 눈을 감았다.
“그래, 허튼짓에 낭비하기엔 아까운 시간들이야. 내가 잘못 생각했어, 형.”
태수는 눈을 떴다.
광기라고 느껴질 만큼 차갑고 강한 눈빛이 쏟아져 나왔다.
“한일권을 내 인생에서 하루빨리 치워 버려야겠어.”
태수는 주먹을 쥐었다.
“느긋하게 갈 일이 아니었어. 이제 다 왔어. 준비가 다 안 되어도 상관없어.”
“뭘 어쩌려고?”
“강제로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어떻게?”
“힘으로.”
“힘?”
김광록은 의아했다.
태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청일의 재계 서열은 13위, 태양 그룹은 163위.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던 박정환 대통령은 죽고 없다.
그 뒤를 잇는 대통령 권한 대행 김종표와는 서로 얼굴을 붉힌 사이다.
그래서 김광록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힘?”
“내 힘이 부족하면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호가호위해야지.”
여전히 물음표가 뜨는 대답이 돌아왔다.
태수는 양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제일 빠른 길이라서.”
태수가 김광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형 덕분에 마음 다잡았어. 인내심이 닳았다고 그냥 죽이는 건 너무 자비로운 방식이야. 내 성에 차지 않아. 아마 두고두고 후회했겠지.”
“어?”
“어차피 복수에 올인한 이상 다른 것에 눈 돌릴 여력 따윈 없어.”
“…….”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어. 형 덕분이야. 고마워.”
“…….”
이게 아닌데.
김광록이 입을 뻐끔대다가 말했다.
“뭐, 어쨌든 태수 네가 기운 차렸으면 됐다.”
태수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형, 송창준을 불러 줘.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날 밤, 미국으로 전보가 날아갔다.
* * *
다음 날.
늦은 시각 공항에 마중 나온 태수.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한 무리의 외국인을 발견했다.
[여깁니다.]
태수를 발견하고 선글라스를 벗는 그녀.
엘리스 록펠러가 방긋 웃는다.
[아주 흥미로운 전보를 보냈더군요.]
엘리스는 태수의 전보를 받자마자 전용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날 어떻게 차기 록펠러 가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