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내기합시다(2)
강원도 원주 문막 취병 저수지.
넓은 호수 수면 위로 바람이 불어 잔잔한 물결이 흐른다.
호숫가 옆 커다란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남자.
태수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고기는 좀 잡힙니까?”
태수가 그늘 아래 들어서자 남자는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자네는?”
김정림이 모자를 벗었다.
“…날 놀리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내가 어떻게 옷 벗었는지 잘 알 텐데.
“놀리다니요. 강원도까지 달려와 놀릴 만큼 제가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안부를 물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김정림은 한청호와 끈끈한 관계를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김정림은 권력을, 한청호는 돈을.
한청호가 주기적으로 돈 박스를 나르면 김정림이 한청호의 뒤를 봐주었다.
오고 간 이권이 상당했다.
“차기범과 박정환이 죽고 끈 떨어진 연이 되었겠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 역시 끈 떨어지긴 마찬가지라서.”
“새로운 끈을 잡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계시던데요.”
김정림은 은밀히 전두호를 찾아 군자금을 댔었다.
김정림은 복귀를 꿈꾸고 있었다.
“이곳 생활이 아주 지긋지긋해서. 내가 은퇴하기엔 아직 창창하잖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살다가 쫓겨나듯 나왔는데, 전원생활이 마음에 들 리가 있나.
“왜? 날 잡아가려고 왔나? 전두호에게 접촉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랬다면 태수 대신 중앙 정보부나 합동 본부에서 사람이 나왔을 것이다.
태수는 너른 호숫가에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제게 날을 세우실 것 없습니다. 이 바닥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자네가 좋은 의도로 날 찾아올 리가 없지. 나와 한청호가 어떤 사이였는지는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김정림과 한청호는 함께했었다.
그러니 함께 태수를 엿 먹이는 데 동조했었다는 뜻이다.
태양 그룹에 은행 대출을 금지하는 데도 한몫했다.
또한 태수가 박정환과 만나려 할 때는 번번이 연락을 중간에서 차단해 버렸다.
이 일로 태수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었으리라 김정림은 확신했다.
“당신은 권력을, 한청호는 돈을. 당신네 둘은 끈끈한 사이였죠. 하지만 결국 한청호는 당신을 버렸습니다.”
태수는 웃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는 나와 한청호, 누가 더 밉습니까? 아직도 한청호에게 의리가 남아 있습니까?”
김정림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국무총리였던 김종표는 어떻습니까? 행정실 장악을 두고 피 튀기며 싸우던 그가 대권을 꿈꾸고 있습니다.”
김정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김종표와 김정림은 오랜 앙숙이었다.
김종표는 박정환의 지낭으로 간사한 계책을 줄줄이 내놨지만 박정환의 견제를 많이 받았다.
김종표를 견제하는 역할을 받아 오랜 세월 김종표와 대립했던 인물이 바로 김정림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당신에게 해가 될 것 같습니까, 득이 될 것 같습니까?”
득은 전무하고, 무조건 해만 될 관계가 김종표와의 관계다.
자고로 권력을 잡으면 복수와 숙청부터 감행하기 마련이다.
오랜 세월 박정환 밑에서 견제받던 김종표는 김정림의 세력에 칼을 뽑아 들 것이다.
“당신에게 한청호가 영원한 친구가 아니듯, 저와 당신도 영원한 적이 아닙니다. 또한 김종표와 비교한다면 제가 낫지 않습니까?”
최선 대신 차선이라는 건가.
“저는 차기 대통령으로 다른 사람을 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누구? 김영상? 김대준?”
“안정우.”
“안정우?”
김정림은 웃었다.
“이봐, 젊은 친구.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이 바닥은 명성이 반 이상 먹고 들어가.”
그걸 태수가 왜 모르겠는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부터 정치인의 힘이다.
다들 목에 핏대를 내세워 가며 목소리를 높이고, 저격수를 자처하는 게 다른 이유겠는가.
“그 명성이 저명이든 악명이든 미명이든 상관없어. 그런 면에서 안정우는 아웃이야.”
그간 쌓은 명성과 정치 기반이 너무 부실해.
“낚시하신다고 신문 방송을 멀리하시나 봅니다.”
“안정우가 박정환의 매국 행위를 밝힌다며 큰소리치는 거? 얼마나 갈 것 같나? 내가 보기엔 별거 없어. 전부 다 뻥이야. 박정환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치부를…….”
태수가 김정림의 말을 잘랐다.
“박정환의 그 치부, 제가 쥐여 준 겁니다.”
“……!”
안정우가 아니라 강태수가 치부를 캤다면…….
철저하고 확실할 것이다.
“자네도 미쳤군. 박정환이 안다면 눈 돌아갈 일을 굳이 캐서 사달을 만들었나. 박정환이 몰랐길 망정이지 알았다면 필경 자네는…….”
“왜 박정환이 모를 거라 단정하십니까?”
“……!”
김정림이 입을 떡 벌렸다.
“설마……!”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림은 5.18 청일 호텔 참변으로 생각을 이었다.
박정환, 전두호, 차기범이 그 자리에서 죽고, 한청호가 중앙 정보부에 끌려가게 된 일.
그 일로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자네였군. 이제 보니 자네였어. 하…….”
김정림은 목이 졸린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이 젊은 남자가 새삼 무섭게 느껴졌다.
호숫가에는 침묵이 흘렀다.
태수와 김정림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마침내 긴 침묵을 깨뜨리며 김정림이 입을 열었다.
“날 찾아온 이유를 이제 알겠군.”
강태수는 대놓고 말했다.
차기 대통령으로 안정우를 밀고 있다고.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김종표를 치우기 위해 이곳까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나?”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 * *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불쾌한 일이 태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색이 된 비서 송창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국세청에서 나와 서류와 장부를 쓸어 간 일이라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검찰에서 압수 수색을 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미리 당부한 참이 아닌가.
하지만 송창준은 반대편에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지금 정부 용역 깡패가 나와서 모델 하우스를 때려 부수고 있습니다!”
“용역 깡패가요?”
용역 깡패는 국가나 지자체 철거반이나 구사대에서 재개발 사업 등을 위하여 파견하는 용역 일꾼들이다.
일의 특성상 깡패처럼 무력 진압을 많이 써서 보통 그리 불렀다.
도심 재개발 초기이던 70, 80년대에는 민간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적으로 개발 및 철거 사업을 해 왔고, 그 과정에서 용역 깡패들을 많이 보냈다.
주로 불법 판잣집이나 노점상 철거, 노동 운동 진압에 투입되곤 했다.
“불법 건축물에 대한 신고가 많이 접수돼서 강제 철거 명령을 내렸답니다!”
강제 철거에도 절차라는 게 있다.
무허가 건축물에 대해서 원상회복을 명령한 후에도 이행되지 않을 때야 비로소 행정 대집행에 따라 계고 절차를 밟고 철거에 나설 수 있다.
‘하지만 김종표가 그것을 두고 볼 리 없지. 비상계엄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밀어붙였을 거다.’
무력으로 태수에게 시위하겠다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권력으로 대충 얼버무리면 그만인 법.
모델 하우스를 철거함에 따른 불이익은 모두 태수가 떠안게 된다.
“일단 현장에 가 봅시다.”
태수는 도로 차에 올랐다.
비서 송창준도 냉큼 태수의 차에 올라탔다.
부르릉.
태수가 탄 차가 출발했다.
* * *
태양 아파트 건설 현장.
모델 하우스 앞에는 용역 깡패가 우글댔다.
저마다 손에 삽과 오함마 따위를 들고 있다.
또한 포클레인이 두 대나 왔고, 덤프트럭까지 세워져 있었다.
“뭐야? 다치기 싫으면 썩 꺼지쇼!”
용역 깡패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태수에게 손짓했다.
“어이, 경고했어. 나랏일 하는데 끼어들면 알지?”
대단한 권력을 등에 업은 양 으스대는 기색이 꼴같잖았다.
그 모습을 보고 김광록이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나도 경고한다. 우리 회장님 앞길 막으면 알지?”
김광록이 눈짓하자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용역 깡패들이 잔뜩 긴장했다.
“뭐야? 해 보자는 거야? 앙? 우리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어떻게 되나 일단 패면 알겠지.”
“이 좆만한 새끼가! 악! 억!”
2미터 거한 김광록이 파리 잡듯 간단하게 양쪽 싸대기를 올려 붙었다.
건들대던 놈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넌 좆이 너보다 크냐? 희한한 새끼로군.”
그것을 시작으로 용역 깡패와 대치가 시작되었다.
연장을 바닥에 끌며 사방에서 모여드는 용역 깡패들.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고 각 잡힌 자세로 배치된 태양 그룹 경호원들.
“안 보인다. 길 좀 터 봐.”
그때 용역 깡패들 뒤로 누군가가 외쳤다.
용역 깡패들이 홍해 갈라지듯 갈라졌다.
갈라진 길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젊은 남자.
한일권이었다.
“이야, 이게 누구신가?”
한일권이 비릿하게 웃으며 건들댔다.
“불법 건축물 주인이 이제야 나오셨네? 그런데 어쩌나? 반쯤 부숴 버렸는데, 클클클.”
어째서 한일권이 지금 이 시각에 이곳에 있는 것인가.
그것도 정부에서 파견한 용역 깡패들을 거느리고.
“요즘 태양 그룹이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고 있다면서? 쯧쯧쯧.”
과장되게 너스레를 떠는 한일권.
“기다렸잖아. 만나서 참 반갑다. 그치?”
한일권이 느끼하게 웃었다.
여유롭게 콧노래까지 흥얼대면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태수와 한일권은 한 발자국 간격을 앞에 두고 마주 섰다.
“우리가 만나서 반가울 사이던가?”
“난 오늘 고맙다는 말부터 할까 했는데. 이거 반응이 영 싸늘하네?”
“아버지를 감옥으로 치워 줘서 고맙다는 말이라면.”
한일권은 대뜸 태수를 향해 활짝 웃었다.
“역시 머리가 좋아. 맞아, 네 덕분에 내가 청일의 차기 총수가 됐잖아. 한 20년은 기다려야 하나 싶었는데 말이야, 클클클.”
아버지가 중앙 정보부에 끌려간 일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랬다면 원수나 다름없는 태수에게 이리 환한 인사는 건네지 못했으리라.
태수는 고개를 꺾었다.
“언제부터 청일이 용역 깡패 노릇을 하게 됐지?”
“아, 새로운 사업권을 따냈지. 정부에 용역을 납품하는 사업이야. 내가 오늘 만들었어.”
한일권이 턱을 들었다.
“첫 번째 의뢰를 이렇게 맡게 됐네? 이것 참 공교로운 일이야. 안 그래?”
“청일 그룹 차기 총수는 참 한가한가 보군.”
“아아, 난 어차피 경영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어서. 그룹 일은 전부 이문복에게 맡겨 두고 나왔지.”
한일권이 윙크한다.
“이쪽은 소일거리. 아무래도 내 적성은 이쪽이라서.”
“아무리 깽판이 적성에 맞아도 그렇지. 자기 자리 뺏기는 줄도 모르고 놀러 다닐 나이는 지났을 텐데.”
“내 자리를 내가 왜 뺏겨? 아하, 이문복한테 일 맡겨 둔 거? 클클클.”
한일권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거 진짜 멍청한 질문이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번다는 말, 모르나 봐?”
태수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 말을 태수가 왜 모르겠는가.
청일 병원 VIP룸에서 죽기 직전에 한일권에게 직접 들은 말이 아니던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번다는 말, 알지?
-그러니까 재주나 실컷 부리고 진작 꺼져 줬으면 좋았잖아. 미련 곰탱이가 눈치 없이 버티고 있으니 내가 미쳐 버리잖아!
태수의 눈이 더욱더 차가워졌다.
하지만 한일권은 싱글벙글 웃었다.
“이문복이 요즘 아주 신났어. 그룹 총수 의자에 앉았다고 의기양양해서 죽도록 일하는데, 그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몰라. 클클클.”
태수의 주먹에도 힘이 들어갔다.
전생에 태수가 그토록 열심히 청일을 키웠을 때 한일권은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을 터였다.
“이문복이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변하지 않는 게 있어.”
한일권이 눈을 번뜩였다.
살인자의 눈이었다.
“그 회사는 내 회사고, 청일의 개는 결코 주인이 될 수 없지. 개새끼가 죽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태수는 웃었다.
“미친개한테 물리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궁금하군.”
전생에 청일 병원 VIP룸에서 죽어 갈 때 입과 혀가 마비되어 돌려주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그 말을 이제 돌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주 오랫동안 지금 이 순간이 오길 기다렸다. 널 직접 만나서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지.”
한일권의 마지막 비웃음이 아직도 이렇게 귓가에 생생하게 맴돈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내게 좋은 선물을 주다니 정말 아낌없이 주는 친구라니까. 병-신, 클클클.
그래서 태수는 기쁘게 웃었다.
“네 마지막 가는 길은 내가 닦아 주지. 지옥까지 직행 코스로.”
난 복수에 자원 따위 아낄 생각 없다.
아낌없이 전부 뿌려 주마.
“한일권, 내가 받은 빚은 전부 되갚아 주겠다.”
죽기 직전 울부짖었던 스스로의 다짐도 떠올랐다.
-한청호! 한일권! 청일 그룹! 복수한다! 부숴 버린다! 이렇게는 못 죽어!
-한일권!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 지옥 끝까지 따라간다! 너희 가족도 전부 죽여 버리겠다!
그렇게 전생의 강태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생각한 단어는 ‘복수’였다.
“내가 받은 것 이상으로 넌 피눈물을 흘려야 할 거야.”
“하……!”
“이번에는 내 손으로 청일 그룹, 기둥뿌리 하나 안 남기고 전부 박살 내줄 테다. 그리고…….”
태수는 한일권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는 내 손에 죽어.”
내가 너한테 죽었던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