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김종표의 반격(2)
“아, 이거 실례. 방을 잘못 찾았네?”
전혀 미안해하지 않은 표정으로 태수는 웃었다.
김종표는 헛웃음을 지었다.
절대로 방을 잘못 찾을 수 없는 고급 요정이 바로 대운각이다.
김차열 검찰 총장이 대놓고 말했다.
“실례인 줄 알면 그만 꺼지지그래?”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태수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 명씩 본다.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 김차열 검찰 총장, 노태오 사령관이라……. 아주 쟁쟁하신 분들만 모이셨군요.”
김종표는 탁 소리가 나도록 술 주전자를 내려놨다.
불쾌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대운각 신용이 형편없군.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을 들이다니.”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태수는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한번 하죠. 태양 그룹의 강태수입니다.”
예의는 이것으로 끝났다.
태수는 김종표를 보면서 씩 웃었다.
“이거 유감입니다. 약속만 지켰으면 다시 볼일 없었을 텐데. 우린 앞으로 또 보게 될 것 같군요.”
“나도 유감이야. 네 뜻대로는 안 될 텐데.”
김종표는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자네를 만나 줄 것 같은가?”
네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내가.
“우리가 얼굴 보고 얘기 나누기엔 급이 안 맞잖아. 그 정도 주제는 알고 살아야지.”
나는 대통령 권한 대행이자 차기 대통령이 될 사람이고.
너는 고작해야 재계 서열 163위 나부랭이 기업이나 꾸리는 놈.
“참, 한청호 곧 나올 거야.”
김종표는 술을 마시며 웃었다.
“내가 대통령 취임 기념 특별 사면으로 힘 좀 쓰기로 했어. 그러니 그런 줄 알아. 어때? 기쁜 소식이지?”
태수는 웃었다.
대통령 특별 사면 같은 소리 하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입만 열면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인에게는 그런 기본적인 신용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인가 봅니다.”
뼈 있는 말이었다.
“참 잔인한 짓을 하셨습니다. 중앙 정보부에서 고초를 겪는 사람에게 이루지도 못할 꿈과 희망을 불어넣다니. 희망이 한 번 더 박살 날 때는 더욱 고통스럽겠군요.”
한청호 낯짝 일그러지는 모습이 볼만하겠는데.
태수는 김종표를 똑바로 보았다.
“태양 아파트에 깜찍한 짓을 하셨더군요.”
김종표는 어깨를 으쓱했다.
“3천만 원짜리 청탁이니까.”
푼돈을 내놓고 더 바라는 건 욕심 아닌가?
태수가 건넨 정치 자금 3천만 원을 꼬집는 것이다.
“나 김종표, 그 정도 신용은 있는 사람이야. 나머지 잔금 7천만 원은 자네 뜻대로 태양 아파트 분양이 끝나면 받지. 그 정도야 내가 이해 못해 주겠나.”
김종표는 비웃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쯤 태양 아파트가 분양될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군. 한 10년 후면 되려나? 20년? 30년?”
내 임기 안에는 어림도 없지.
그런 같잖은 도발에 울컥할 태수가 아니다.
태수는 태연자약했다.
“태양 아파트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다만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생겼군요.”
태수는 일부러 고개를 갸웃댔다.
“내가 아파트 분양을 끝낼 때 당신에게 굳이 잔금을 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권력 없는 정치인에게 정치 자금 건넬 필요가 있냐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넌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김종표는 당연히 그 뜻을 알아들었기에 한쪽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태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군. 정치인과 달리 사업하는 사람은 신용이 생명이죠. 그깟 7천만 원, 내어 드리겠습니다.”
태수는 흔쾌히 약속했다.
“적선하는 셈 치겠습니다. 그때면 당신, 부정 축재 재산까지 홀랑 털려서 당장 먹고살 길부터 막막할 테니까.”
내가 한 번 봐주지.
태수가 크게 인심을 썼다.
“잔금을 주려면 일부러 감옥까지 찾아가야 할 텐데. 벌써부터 귀찮긴 하군요. 제가 신용이 워낙 좋아서 말입니다.”
딱.
참지 못하고 김종표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태수와 김종표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둘.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파지직 튀었다.
“나한테 이렇게 건방지게 나오는 거, 후회하지 않겠나?”
“그건 태양 아파트를 걸고넘어지기 전에 당신이 심사숙고해야 할 고민이었을 텐데요.”
태수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오죽하면 한 성깔 한다는 김차열 검찰 총장과 군대에서 목소리 높이던 노태오까지 긴장한 채 둘을 번갈아 보고 있기만 할까.
“태양 그룹은 내 손에서 산산이 박살 날 거야. 간판 하나 건지지 못할 테지. 내 그건 장담해.”
“당신은 대선에서 처참하게 패배할 겁니다. 먹은 재물 도로 토해 내느라 동전 한 푼 건지지 못할 겁니다.”
“너는 빈털터리 노숙자가 될 거다.”
“당신은 범죄자가 되겠군요. 감옥에 가거든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며 후회하십시오.”
내가 그때 왜 시비를 걸어서 이렇게 됐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해야 할 거야.
“강태수,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박정환의 밀약서 나 내놔. 마지막 기회다.”
“마지막 기회를 내던진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김종표.”
당신이 얌전히 싸 놓은 똥을 치우고 물러났다면 나 역시 그대로 덮어 뒀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똥 치우기를 거부했고, 내게 선전 포고로 돌려줬지.
전부 당신이 자초한 거야.
“난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주의라서.”
김종표가 매섭게 노려볼 때 태수는 마침표를 찍었다.
“그럼 대선에서 봅시다.”
12월 대선까지 반년이 채 안 남았다.
‘당신과 내 미래는 거기서 결정되겠지.’
어떤 싸움이든 승패는 갈리고, 승자는 독식한다.
드르륵. 탁.
태수는 할 말을 끝내고 문 닫고 나갔다.
김종표가 크게 욕설 날리는 소리와 함께 우당탕탕 상 뒤집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수는 등을 돌렸다.
‘김종표, 역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군. 검찰 총장과 육군 사령관을 불러들였다 이거지?’
일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
‘내 짐작대로군. 맞춤형 저격수를 따로 붙여 주지.’
적합한 인물들을 알고 있다.
그중 한 명은 아마 두 손 들고 신나서 협조해 줄 것이다.
다른 이는 조금 설득해야 하겠지만.
드르륵.
태수는 옆방 문을 열었다.
안정우가 웃었다.
“화장실 다녀온다더니. 옆방에 다녀왔는가?”
“인사 좀 하고 왔습니다.”
“퍽 시끄러워졌던데. 한바탕 제대로 뒤집어 놓은 모양이지?”
“태양 아파트를 걸고넘어졌을 때 그 정도는 각오했겠죠. 내가 그쪽 사정까지 봐줘야 합니까?”
태수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안정우가 건네주는 술을 받는다.
“김종표가 김차열 검찰 총장과 노태오 사령관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야. 김종표가 요즘 공화당 의원들을 찾아가 협박하고 있어. 듣자 하니 한청호에게서 얻은 뇌물 장부를 쥐고 있다던데.”
“어르신께는 최무룡이 쥐고 있던 치부책이 있잖습니까.”
한청호의 뇌물 장부와 최무룡의 치부책 중에 어떤 것이 더 더럽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가 더 더럽다.
최무룡이 거느리고 있던 놈들이 공화당 의원들의 더러운 뒤처리를 도맡아 온 덕분이다.
돈 있고 힘 있는 남자들이 노는 곳에 여자들이 붙기 마련이고, 여자들 붙는 곳에는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게다가 정보 상인들이 쥐고 있는 약점도 상당하고 말이죠.”
정보 상인들이 추적한 것은 친일 행각과 빼돌린 은닉 재산이었다.
친일파의 재산 목록을 수집하고, 자금을 추적하는 게 안소정의 일이었다.
그 일은 아주 오랫동안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어 왔다.
확실한 약점이었다.
“공화당의 목줄은 어르신이 더 강하고 튼튼합니다. 뭐가 걱정되십니까?”
뇌물을 받은 것은 작은 죄다.
의원들이라면 얼마든지 힘으로 덮을 수도 있으니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할 정도다.
하지만 큰 돈줄과 명예를 잃는 일은 정치인들에게는 큰일이다.
“밑바닥에서 벌어진 더러운 사고에 얽히기 싫을 겁니다. 공화당 의원들은 어르신 눈치를 봐야 합니다. 봐주지 말고 단단히 틀어쥐십시오.”
태수가 안정우의 잔을 채워 주었다.
안정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능수능란한 노련한 정치가 김종표에게 하도 시달리다 보니 자신감이 바닥으로 꺼진 모양이다.
“정치라는 게 생각보다 어렵더군. 이놈들은 어찌나 더럽고 약아 빠졌는지. 그 낯짝을 보고 있으면 속이 거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민족 투사이며 외로운 애국지사 안정우가 아닌가.
밑바닥 음지에서 별 더러운 꼴을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위에서 노는 놈들의 추잡한 행태를 직접 대면하자 구역질이 밀려왔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 이놈들을 구슬려내 밑으로 끌어들여야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거 말일세. 그게 세력이고, 그게 힘이니까. 하지만 말이야.”
지긋지긋하단 투가 역력했다.
안정우는 구역질이 치미는 속을 알코올로 소독했다.
술을 연거푸 몇 잔이나 마시고서야 다시 입을 연다.
“내가 이렇게 추악한 놈들을 끌어안으면서까지 대통령을 해 먹어야 하나 회의감이 들었어.”
깨끗하기에 더러움을 싫어하는 것이다.
스스로 떳떳했기에 부끄러운 작태에 화가 나는 것이다.
태수는 그런 안정우가 마음에 들었다.
‘나라를 생각하여 살신성인하는 깨끗한 대통령으로 안정우 이상인 사람이 없지.’
야당의 거물 김영상과 김대준이 어떻게 되었는지 안다.
전생에 두 거물은 차례로 대통령이 되었다.
오랫동안 곁을 함께하며 어려움을 같이 이겨 냈던 정치 동지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 민주화 투쟁에 몸 바치던 시절과는 다르게 정권을 잡자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들도 결국 이익 집단이며 정치인들이었다.
반면 안정우는 그들과도 다르다.
“포기하실 생각입니까?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과거 청산을 위해, 어르신이 앞장서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태수는 일부러 안정우의 신념을 건드렸다.
“휴우.”
안정우의 한숨이 크고 깊었다.
하지만 태수는 봐주지 않았다.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박정환처럼 군부 독재가 다시 정권을 잡는다면 지금보다 더 끔찍한 일이 될 겁니다.”
전생에 전두호와 노태오 때가 그랬다.
두 번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태수가 왜 5.18 청일 호텔 참변을 설계했겠나.
“알아.”
“김종표가 정권을 잡는다면 머리가 똑똑한 놈인 만큼 이 나라는 더욱 썩어 갈 겁니다.”
“그것도 알아.”
안정우가 왜 모르겠는가.
지금껏 몸 바쳐서 외로운 투쟁을 해 왔으니 누구보다 잘 안다.
나라의 통수권자에 따라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지는지.
그 중요성을 알기에 눈 딱 감고 이곳에 뛰어들었던 게 아닌가.
“이 나라는 지금 독재와 민주화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것 역시 알고 있어.”
안정우는 눈을 감았다.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어도…….”
“그럼 누가 합니까? 야당의 거물과 그를 따르는 세력들이?”
“…나는 그들을 한번 믿어 보고 싶다.”
그들은 나보다 능숙하게 정치 세력을 조율할 거야.
이 지긋지긋한 바닥은 내가 감히 끼어들 곳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나처럼 신념과 대의를 생각하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사람들이야. 사사로운 사익 때문에 대의를 저버릴 사람들이 아니야.”
“그럴까요? 좋습니다. 저도 한번 믿어 보지요.”
태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자신을 끝까지 설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안정우.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가 마음을 바꿀 줄은 몰랐는데.”
“마음 안 바꿨습니다.”
차기 대통령은 안정우가 될 거다.
태수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들을 믿는다고 하지 않았나?”
“구태여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저와 내기 한번 하지 않겠습니까?”
“내기?”
안정우는 얼떨떨했다.
반면 태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구구절절한 설득보다 확실하게 먹히는 게 바로 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