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91화 (191/230)

191화 김종표의 반격(1)

중앙 정보부 취조실.

김종표는 테이블 너머 마주 앉은 남자를 보았다.

“생각보다 몰골이 영 말이 아닌데. 재벌 그룹 총수께서 왜 이리 험한 일을 당하셨나.”

몰라서 묻나.

한청호는 울긋불긋한 얼굴을 들어 김종표를 보았다.

찢어지고 메마른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슨 용건으로 날 찾아왔지?”

도와 달란 간절한 연락을 전부 무시할 때는 언제고.

김종표는 용건 없이 찾아올 사람이 아니다.

누구보다 이해타산이 빠르고, 누구보다 잔인한 전략가가 아닌가.

“지금 이 상황에 내가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군.”

한청호가 중앙 정보부에 잡혀 가자 혹시라도 연루될까 봐 다들 등을 돌렸다.

한청호에게 뇌물을 받아먹던 자들이 제일 먼저였다.

김종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중앙 정보부까지 직접 찾아왔다는 건 자신을 장기말로 쓰려 한다는 뜻이 아니고 뭔가.

“내가 당신 꺼내 줄 수 있어.”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도 동의한 일이고?”

어찌 된 영문인지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는 완강했다.

한청호의 감옥행은 이미 정해진 결과라고 못 박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김종표는 손깍지를 풀면서 은근하게 말했다.

“중앙 정보부 취조실보다는 옥살이가 낫지 않겠나?”

저걸 제안이라고 꺼내는데, 고문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솔깃해 버렸다.

한청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김종표는 그런 한청호의 얼굴을 보며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특별 사면권, 한 번 써 봐?”

“특별 사면권?”

한청호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김종표가 말하는 특별 사면권 행사는 누가 하는가.

바로 대통령이 한다.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을 거야.”

박정환이 죽고, 비상계엄에 따라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은 다음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겠다.”

대통령 권한 대행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박정환이 막아 뒀던 실권을 틀어쥐고 나니 더 욕심이 난다.

김종표는 그런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장충동 체육관에서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대의원을 소집해야지.”

통일 주체 국민 회의.

유신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대통령 직선제 대신 간접 선거를 채택한 것이다.

“고작 2,500명 남짓한 선거인단을 구워삶아서 차기 대통령이 되는데, 해 볼 만한 도전이 아닌가.”

제7대 대통령 선거 때 선거 비용으로 700억 원을 뿌리고도 김대준 후보에게 불과 95표 차이로 간신히 승리했던 박정환이다.

당시 대한민국 전체 국가 예산이 4,900여억 원이던 시절에 말이다.

그 일로 위기감이 든 박정환은 유신 헌법을 강행하면서 선거법을 뜯어고쳤다.

원리상으로는 미국의 제도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저 박정환의 장기집권을 위한 요식 행위 기관으로 전락했다.

“박정환이 남겨 준 제도이니 요긴하게 써먹어야지.”

유신 헌법하에서 대통령 권한은 막강했다.

통일 주체 국민 회의의 의장은 현직 대통령이 맡는다.

또한 대법관을 비롯한 법관의 임명권 및 파면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삼권을 모두 틀어쥐었다는 뜻이다.

더구나 대의원 구성까지 정권의 입맛대로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군. 내 뇌물 장부가 필요해서.”

“청일의 한청호만큼 위아래로 골고루, 멀리 또 넓게 뇌물을 살포하는 자는 드물지.”

한청호와 김종표는 동시에 웃었다.

“대통령 취임 기념 특별 사면권과 자네의 뇌물 장부. 맞바꾸는 게 어떤가?”

아주 달콤한 제안이었다.

* * *

사우디 칼리드의 저택 객실.

태수가 눈을 떴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덕분에 조금 피곤했다.

‘하지만 수확이 제법 좋았지.’

화려한 파티가 열렸고, 술이 돌았고, 금방 사람들과 친해졌고, 사업 얘기도 잘 풀렸다.

태수의 사업에 흥미를 보이는 자들에게 먹음직한 미끼를 뿌려 두었다.

그들 가문으로 돌아가기만 기다리면 되었다.

유력 가문 또래 친구들은 아직까진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일 쇼크로 중동에서 쫓겨난 서방 석유 회사를 통째로 인수해 기술까지 가져오느냐, 아니면 록펠러의 기술을 사들이느냐로 경쟁이 붙었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만족할 만한 조건을 들고 직접 찾아가겠어요.

엘리스 록펠러의 마음이 크게 기울었기 때문이다.

태수가 의도한 결과였다.

그녀가 제안한 대로 서류를 준비하는 대신 라흐만의 술자리에 참석한 이유기도 했다.

똑똑.

태수의 객실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가운 차림으로 문을 열어 주자 딱딱한 표정의 비서 송창준가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한국에서 장수 은행이 소식을 보내왔어요.”

송창준이 전보를 내밀었다.

태수는 전보를 받았다.

<김종표 기자 회견 취소>

한일 대륙붕 조약을 밝히라고 요구했던 태수다.

기자 회견을 취소했다는 뜻이 무엇이겠나.

“김종표는 약속을 지킬 생각 따윈 없는 모양이군.”

중앙 정보부에서 칼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하나다.

“대통령만 되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송창준이 덧붙였다.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당장 태양 아파트 분양이 어려워질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준공은 이미 떨어졌습니다만.”

“모델 하우스를 불법 건축물로 규정하고 물고 늘어지고 있어요.”

모델 하우스는 80년대에나 등장하는 분양 판촉 방법이다.

아직 모델 하우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닌가.

“태양 아파트를 겨냥한 날치기 법안까지 준비하고 있나 봐요.”

전보를 내밀었다.

<주거민의 소음 및 분진 공해를 막기 위한 방 안: 고급 아파트 개발 및 분양 제한>

“자세한 내막은 한국에서 들어야겠지만…….”

“확실히 태양 아파트를 노린 정책인 것 같군.”

태양 아파트 58개 동 건축 허가에서 12개 동 건축으로 바꾼 것을 트집 잡는 것이다.

“1차, 2차 순차 개발에 따른 아파트 분양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모델 하우스를 핑계로 시간을 지체시키고, 날치기 법안을 통과시켜 태양 아파트 분양을 막겠다는 뜻이다.

태수가 손에 힘을 주자 전보가 사정없이 구겨진다.

“안정우 어르신이 공화당 의원들을 대부분 장악했을 텐데요.”

“김종표가 만만치 않게 훼방을 놓고 있는 모양이에요. 어려움이 많은 것 같아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이 정도 판을 깔아 줬으니 사업에만 신경을 쓰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김종표는 노련한 정치인이었고, 안정우는 이제 막 정치에 발을 들인 터.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김종표가 중앙 정보부에서 한청호를 만났다더군요.”

“한청호를? 굳이 만나러 갈 이유라면…….”

“한청호뿐만이 아닙니다. 김종표가 연일 굵직한 인물들을 만나고 있다는 소식은 잘 아시죠?”

송창준이 전보를 하나 더 꺼내 내밀었다.

“성북동 대운각에서도 전보가 왔어요.”

<7월 4일 금요일 저녁 7시. 김종표 예약>

‘어쩔 수 없지.’

태수는 결정했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이곳에서 볼일은 전부 끝났다.

“가장 빠른 비행기는 방콕을 경유하는 비행기로, 5일 후 출발 예정이라고 합니다.”

“늦어. 경유지를 늘리는 한이 있더라도 더 빠르게 갑시다.”

“한국행 비행기는 드무니까 일본행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유럽을 빙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도착 예정 시간을 줄여 보죠.”

송창준은 돌아갔다.

정장을 차려입은 태수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김종표. 끝내 야욕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뜻이구나.”

박정환의 지낭으로 불리며 정권에 기생하여 해악을 끼친 자다.

하지만 태수와는 직접적으로 얽힌 일이 없어서 원한은 없었다.

차기 대통령 자리를 두고 뜻하는 바가 달랐을 뿐이니 김종표가 순순히 물러난다면 눈감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종표는 보란 듯이 태양 아파트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

“진흙탕 싸움이라면 나 역시 자신 있다.”

김종표가 어떻게 나올까 태수는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렸다.

또한 태수는 어떻게 김종표를 저지할까도 궁리했다.

“당신이 권력으로 태양 아파트를 막아선다면 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뚫을 수밖에.”

태양 아파트를 건드린 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시작은 태양 아파트지만 김종표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나머지 계열사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될 것이란 경고다.

그때였다.

똑똑.

라흐만이었다.

[아니, 귀국이라니? 갑자기 왜?]

뛰어가는 송창준을 붙잡았더니 대뜸 귀국하겠다는 소리가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찾아뵙고 작별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한국에 급한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급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태수의 차가운 눈빛을 보자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흐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출발하나?]

[비행기 표를 구하는 즉시 떠날 생각입니다.]

[그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지.]

라흐만은 씩 웃었다.

[왕실 전용기, 몇 번 타 봤지?]

아주 빠르고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을 거야.

* * *

서울 성북동 대운각.

고급 요정에서는 오늘도 은밀한 회동이 열렸다.

김종표가 도자기 술 주전자를 들어 술잔을 채웠다.

“검찰 총장께서는 이번 임기 끝나면 행정부로 오셔야죠. 법무부 장관 자리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김차열 검찰 총장이 웃었다.

“법무부 장관이라……. 그것참 구미 당기는 자리군요.”

박정환의 부름을 받아 70년 중앙 정보부 국내 담당 차장으로 관료로 복귀한 이후 내내 박정환의 칼이 되어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한 자였다.

73년 김대 준 의원 납치 사건을 지휘했고, 최종굴 교수 의문사 사건 같은 간첩 조작 사건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 결과 박정환의 신임을 사서 같은 해 12월에 검찰 총장으로 영전했다.

“대통령 각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 뿌리를 같이한 자들까지 흩어져서야 되겠습니까? 함께 모여 영광을 같이 누려야죠.”

전생에 김차열 검찰 총장은 전두호의 신군부로부터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어 재산을 몰수당한 자기기도 했다.

한마디로 김종표가 설계한 박정환 정권 4대 부정부패 사건에 깊이 개입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가 뒤를 캐고 다니는 거 아십니까? 4대 의혹 말입니다.”

김차열의 눈썹이 대번에 올라갔다.

“신지수가? 그 새끼가 갑자기 왜 그런답니까?”

“김재국과 휘하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대통령 암살 사건에 깊이 개입되었지 않습니까? 그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죠.”

쾅.

김차열이 도자기 술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중앙 정보부와 검찰이 함께 공조한 사건이 몇이나 되는데, 혼자 살겠다고 날 제물로 쓰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습니까? 대통령 암살범이 김재국이고, 도청 기록이 전부 중앙 정보부 솜씨라고 드러나는 판인데. 중앙 정보부 공중분해 되는 꼴을 두고 보겠습니까?”

“아무리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로서니 그러면 안 되지!”

씩씩대는 김차열의 술잔을 채워 주며 김종표가 얼렀다.

“그러니 김 총장도 살 길을 모색해야지요. 제가 그 살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김종표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당연히 박정환 4대 의혹은 깨끗하게 덮일 것이다.

김차열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술을 받았다.

김종표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술 주전자를 내밀었다.

술을 받는 사람은 노태오였다.

“노 장군께서는 요즘 특히 시끄럽지요?”

“왜 아니겠습니까? 오성회 세력을 숙청한다고 육군 참모 총장께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데.”

노태오는 전두호와 육사 동기로서, 함께 오성회를 결정한 핵심 인물이었다.

또한 전두호 정권이 들어섰을 때 정권의 핵심 인사로 정권의 이인자이나 일인자의 견제를 받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그때 노태오는 김종표를 찾아가서 이인자로 처신하는 법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또한 전두호의 임기 말에는 전두호의 정치적 후계자로 낙점되기까지 하는 인물이 아닌가.

“이대로라면 조만간 군복 벗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두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덕분에 끌려가는 신세는 면했다.

전두호가 결혼식에서 장성들을 붙들면 노태오가 육군을 장악하기로 모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사는 실패했다.

“어떻게든 버티세요. 제 일만 확실하게 도와주신다면 노 장군께도 좋은 자리 하나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김종표는 노태오와 오성회의 힘이 필요했다.

제2의 박정환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환이 장기 군사 독재를 할 수 있던 힘은 군에서 나오지 않는가.

‘박정환이 남기고 간 유산을 이렇게 잃을 수는 없지. 전부 내가 가져야겠다.’

김종표의 눈이 야심으로 번들댔다.

그때였다.

드르륵.

찾아 올 손님이 없는데 대운각 문이 열렸다.

김종표와 김차열, 노태오까지 전부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종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태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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