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화려한 생일 파티(2)
태수는 흥미로운 눈으로 눈앞의 여자를 보았다.
‘엘리스 록펠러. 모든 것이 베일에 싸였지만 소문만은 늘 무성했던 이름이군. 철가면이라 불렸지.’
전생에 석유 재벌인 록펠러 가문에서 특이하게 건설 사업으로 크게 두각을 드러낸 여자다.
그런 여자를 이렇게 만나 보게 될 줄이야.
‘전생에서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보니 대단한 미인이었군.’
그녀를 본 사람들은 국적 불문, 나이 불문, 성별 불문하고 미인이라고 입 모아 말할 정도다.
그녀는 미인일 뿐만 아니라 재산 불리는 수완도 좋았다.
‘할당받은 돈으로 개인 자산을 무려 120조까지 불렸다던가?’
록펠러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 재단으로 묶여 있다.
능력 없는 가문 사람이 요직에 앉아 재산을 탕진하는 일이 없도록 한 조치였다.
태수는 록펠러 가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개인 자산을 불려 얼마만큼 성과를 이뤘느냐를 보고 능력을 검증받는다던데.’
록펠러 가문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종잣돈을 받아 사업적 재능을 시험받는다.
록펠러의 시험이자 가문의 전통이다.
록펠러를 이끌 가주는 피비린내 나는 암투로 정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재벌가답게 돈 싸움으로 정해진다.
‘록펠러는 능력 있는 자가 가문을 꾸려 나가길 바랐으니까.’
이제 성인이 된 엘리스도 시험대 위에 섰다.
그녀가 사우디 왕자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나온 이유다.
또한 대한민국 해상 유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록펠러의 가주가 되길 원했다.
‘차기 가주 자리를 노리면서 끝내 미혼을 고집하다니. 배우자가 없으면 결격 사유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런 이유로 그녀는 끝내 록펠러 가문의 가주가 되지 못했다.
다들 그런 그녀를 두고 손가락질을 하곤 했다.
얼마나 못생겼으면 그 많은 돈을 보고도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남자가 없었겠냐고.
그녀를 보고 나니 그건 모두 헛소문이라는 것을 잘 알겠다.
‘눈에 차는 남자가 없어서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었지.’
눈앞의 여자는 눈이 높을 만했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중요한 얘기가 될 텐데 장소를 옮길까요?]
태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슥 닦았다.
허리춤에 배스 타월을 한 장 두른 상태다.
[초면에 이런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건 큰 실례가 될 것 같군요.]
[상관없어요.]
태수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어서 지금 모습을 드러낸 엘리스가 아닌가.
중요한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우위에 서고자 했기 때문이다.
‘복장이 초라하면 은연중에 위축되기 마련이니까.’
예로부터 귀족들이 온갖 보석과 패션으로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한 이유가 무엇이겠나.
바로 겉에서부터 드러나는 부와 권력의 차이를 과시하기 위해서다.
지금 맨몸을 드러낸 태수와 정장과 보석으로 단단히 무장한 엘리스는 극적으로 대비되었다.
엘리스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10분 드리죠. 당신이 내 흥미를 끌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내겠습니다.]
‘또한 갑작스러운 타임 리미트를 받으면 상대를 빨리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지.’
엘리스가 노리는 바였다.
하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았다.
[10분이면 충분합니다.]
태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태수의 자신감을 높이 산 엘리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대하겠어요. 쓸모없는 일에 시간 쓰는 건 질색이거든요.]
세계의 석유를 움켜쥔 오만한 록펠러 가문 사람다웠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태수가 어찌 모르겠는가.
‘협상에서 어떻게든 우위에 서겠다고 기를 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지. 효과적인 방법을 쓰는군.’
하지만 그깟 위세 좀 부린다고 꺾일 태수가 아니다.
협상 자리에 나선 세월이 몇 년이며 그동안 겪었던 어려운 협상이 몇 자리던가.
정치인들과 하는 협상보다 기업과 하는 협상이 더 익숙한 남자가 바로 태수다.
‘나중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의 엘리스는 철가면이 아니라 막 사업을 시작한 애송이일 뿐이로군.’
태수는 부드럽게 웃었다.
엘리스가 묘한 눈으로 태수를 보았다.
‘옥상 수영장에 있다고 해서 쾌재를 불렀는데, 이 남자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서도 전혀 위축되는 게 없네.’
젖은 생쥐 꼴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남자의 몸은 지나치게 섹시해서 오히려 엘리스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잘 만들어진 태수의 몸에 절로 눈길이 간다.
혹시라도 얼굴을 붉히게 된다면 오죽 망신이겠나.
앨리스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반면 태수는 거리낌 없이 태연하다.
[사우디까지 힘들게 왔는데 괜한 신경전으로 10분을 낭비하지 맙시다. 10분 안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드는 것, 그게 록펠러 아닙니까.]
태수가 느긋하게 선 베드에 앉는다.
[앉으시죠.]
태수는 손을 내밀어 엘리스에게 맞은편 선 베드에 자리를 권한다.
엘리스는 물끄러미 태수와 선 베드를 내려다보았다.
‘초장부터 기를 꺾어 놓을 생각이었는데. 이런 여유라니.’
겉은 부드러우나 심지가 굳고 단단한 남자다.
엘리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는 말없이 태수가 권한 선 베드에 앉았다.
태수가 말했다.
[대한민국 대륙붕에서 해상 유전을 발견했습니다.]
[대통령이 영유권을 먼저 선포한 그곳 말이군요. 석유가 있다는 게 확실한 정보인가요?]
박정환은 제7 광구에서 석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21세기 발전된 기술로 탐사했을 때 전문가들은 소리 높여 확신했다.
최소 600억 배럴, 최대 1천억 배럴의 석유와 천연 가스가 묻혀 있다고.
[록펠러의 기술을 빌리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록펠러의 기술이 있다고 없는 유전에서 석유가 나오지는 않을 텐데요.]
[석유는 있습니다. 단지 이 자리에서 증명할 방법이 없을 뿐입니다.]
21세기 중국과 일본이 바로 옆에서 해양 자원을 채굴했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까.
[가능성 높은 정보를 확실한 사실로 만들고, 추정되는 자원을 생산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록펠러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와일드 캣(Wildcat)이잖아요. 석유를 발견한 적이 없는 지역에서 처음으로 진행하는 시추예요.]
와일드 캣은 석유 산업이 떠오르기 전까지 미국에서 위험도가 높은 벤처 사업을 일컫는 단어였다.
이후 미국에서 석유가 터지자 그때부터 석유를 탐사할 때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유전을 시추하는 용어로 쓰였다.
[와일드 캣은 막대한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일이에요. 게다가 성공 확률은 무척 낮죠.]
박정환이 제7 광구를 포기한 이유다.
하지만 태수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나는 석유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지만 이들은 모른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은 성공 확률은 낮고 위험부담만 큰일이라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엘리스가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와이드 캣이라. 이건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러 나온 내가 일을 추진하기에는 난이도가…….]
태수는 딱 잘라 말했다.
[당신 사업이 아니라 내 사업입니다.]
태수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태양 그룹의 석유 채굴에 록펠러는 넘보지 말라고.
[록펠러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습니다. 그 위험은 제가 떠안죠.]
엘리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태수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박혔다.
[당신은 위험을 떠안기 싫고, 나는 록펠러가 내 사업에 발을 뻗는 게 싫습니다. 우리 둘 모두가 만족할 만한 좋은 타협안이 있습니다.]
태수가 손가락을 하나 폈다.
[1억 달러. 록펠러의 해상 유전 기술을 사겠습니다.]
1억 달러라면 적은 돈이 아니다.
회사를 몇 개나 인수할 수 있는 돈이다.
앞길은 창창하지만 자본금이 부족해서 곤란을 겪고 있는 회사가 한둘이 아니다.
오일 쇼크 때문에 세계 경제가 발칵 뒤집혔지 않은가.
[그 돈으로 당신은 원하는 사업을 시작하면 될 겁니다. 스스로 능력을 증명해 위로 올라가십시오.]
태수의 제안이 달콤하게 들렸다.
엘리스가 원하는 바와도 맞아떨어졌다.
앨리스가 꼰 다리를 바꾸며 웃었다.
[1억 달러 받고 팔기에는 록펠러의 기술이 아까운데요.]
[록펠러가 아니어도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들은 있습니다.]
[하지만 록펠러의 기술은 독보적이죠.]
[록펠러 중에서 내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이 없을 것이라 자신하십니까?]
[…….]
[내기할까요?]
말문이 막힌 엘리스가 입을 닫았다.
자신할 수 있을 리가 있나.
태수와 같은 결과에 베팅할 용의도 있다.
‘분명 기술을 제공하겠다는 사람이 나올 거야. 아주 개떼처럼 달려들겠지. 새로운 유전에 숟가락 얹겠다고.’
이것만은 자신이 아니라 확신할 수 있다.
엘리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조급했고, 태수는 여유로웠다.
[난 지금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겁니다.]
태수의 말이 너무나 달콤하게 들렸다.
하지만 태수 역시 달콤하게 느껴지는 사정은 비슷했다.
‘돈 냄새 진해지는 것 봐라.’
엘리스에게서 풍기는 황홀한 돈 냄새에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다.
태수가 말을 할수록, 엘리스가 혹할수록.
아찔하게 사람을 유혹하는 돈 냄새는 마약처럼 기분을 들뜨게 한다.
점점 짙어지는 돈 냄새가 태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건 되는 일이다!
-떼돈 벌 일만 남았다!
태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겁니다. 1억 달러. 사업 초기 자금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엘리스는 태수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엘리스는 웃었다.
[당신 언변이 정말 대단하군요.]
[과찬의 말씀을.]
[잠깐 넋이 나갔어요. 홀랑 넘어갈 뻔했죠. 당장 당신 손을 잡고 싶었으니까요.]
[잡으면 됩니다. 뭘 망설입니까?]
태수가 웃자 엘리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일단 옷부터 입어요.]
[이제 10분 다 되어갑니다. 내 손 안 잡을 겁니까?]
[손을 잡고 흔드는 건 협상이 마무리될 때 해도 충분해요.]
그녀가 선 베드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중요한 얘기를 얼렁뚱땅할 수는 없겠군요. 객실로 내려가죠.]
[객실?]
[내 방으로 오세요. 당신이 준비한 서류가 있다면 그것도 보고 싶군요. 종이와 펜, 테이블과 의자는 내 쪽에서 준비하지요.]
엘리스가 헛기침을 한다.
[그, 복장은 제대로 갖춰 입고 오도록 해요. 지금 그 모습으로 내 방을 오는 건 꽤…….]
엘리스가 작게 눈살을 찌푸리는데, 무척 곤란한 표정이었다.
치한 변태 보듯이 싫은 기색을 내비치는 게 아니라, 왠지…….
‘부끄러워한다고? 저 철가면 여자가?’
자신만만한 차가운 표정과 몸가짐은 한 치도 흐트러짐 없다.
목소리조차 평온하다.
하지만 엘리스가 무심결에 쓰다듬는 목덜미가 무척 빨갰다.
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던 게 의아할 정도였다.
[복장에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땐 10분 내에 끝날 줄 알았고, 지금은…….]
[지금은?]
[…당신과 제대로 사업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어요. 10분으로 마무리하기엔 시간이 부족한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셔츠를 꿰어 입기 시작했다.
엘리스는 재빨리 등을 돌리고 섰다.
[강태수 씨, 당신은 젊은 나이에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고 들었어요. 고작 작은 광산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죠?]
태수를 만나기 이전에 뒷조사를 해 온 모양이다.
[듣자 하니 그 광산 한화로 고작 10만 원. 달러로 치면… 하, 말이 안 되잖아요.]
터무니없는 가격의 쓰레기 광산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말이 더 안 되는 건 이후 마구 쏟아져 나오는 태수의 실적들이다.
[어떻게 그런 광산 하나로 고작 3년 만에 이렇게까지 성공한 거죠?]
그녀는 태수에 대한 뒷조사 보고서를 보자마자 덮었다.
허풍이라고 해도 믿기 힘든 일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록펠러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차기 가주 자리는 무조건 당신 차지였을 거예요.]
[다행히도 저는 록펠러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경쟁자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선을 그었는데, 엘리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당신이 두각을 드러낸 건 건설업이라죠?]
청일 그룹에서 받아 온 정유와 중장비의 덩치가 더 크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사우디 공사에서부터 시작해 태양 아파트 공사까지.
광산을 일굴 때부터 건설을 주된 사업으로 갈아타려고 했던 태수가 아닌가.
[오만한 멋쟁이 사우디 왕자까지 침을 튀겨 가며 당신 자랑을 하더군요.]
라흐만이 대체 뭐라고 했기에 이러나.
미래의 미국 건설 재벌은 태수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