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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찍고 건설 재벌-187화 (187/230)

187화 재회(3)

[좋습니다. 하나씩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서쪽 도시 개발 담당자로서 대답하지.]

라흐만이 와인 잔을 내려놨다.

[사우디 석유 시설에 관한 모든 것은 국가가 관리하는 정보이므로, 그 어떤 시설도 외부인에게 보여 주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겠다.]

국가 공무원으로서의 대답은 직위에 맞게 충실했다.

[시설 견학과 기술 공개 역시 불가능하다는 뜻입니까?]

[사우디 석유 채굴 시설은 관광지가 아니다. 또한 박물관도 아니고, 연구소나 행사장, 학술 교류 행사도 아니다. 공개해야 할 의무도, 이유도 없다.]

[알겠습니다.]

[공무원 권한이라고 해 봐야 겨우 이것밖에 안 돼. 이해해 주길 바라네.]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사우디 왕족으로서 대답하지.]

라흐만은 말했다.

[결단은 사우디 국왕 폐하께서 내릴 것이고, 자세한 일 처리는 외무부가 맡아서 하겠지.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철저히 사우디 왕족 중 한 명으로서 하는 비공식적 발언이다.]

굳이 ‘비공식적 발언’이라고 못 박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발언의 책임이 그만큼 무겁다는 뜻이다.

[사우디는 석유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로서, 석유 수출국 기구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산유국의 출현을 반기지 않는다.]

이번에도 대답은 부정적이다.

태수는 자세한 속사정을 알기 위해 슬쩍 찔러봤다.

[남한과 사우디는 단독 수교를 맺은 동맹 국가입니다.]

[알아. 하지만 사우디 왕국은 동맹 국가에 원조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야.]

[의리가 없다는 겁니까, 여유가 없는 겁니까?]

솔직히 중동 전쟁 때 대한민국은 사우디가 아닌 미국 편을 들었다.

국익을 따져 결정한 일이다.

그러니 사우디 역시 석유에 관해 한국에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다.

하지만 라흐만은 깔끔하게 대답했다.

[후자.]

이건 좀 이상하다.

[오일 쇼크 이후 사우디는 오일 머니로 떼 부자가 되었죠. 그 오일 머니로 사우디 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있을 텐데요.]

한마디로 석유 팔아서 떼돈을 벌었으면서 돈 없다는 게 말이 되냐는 뜻이다.

[솔직히 사우디는 기술적, 자본적 여유가 없어. 이제껏 둘 다 외세에 의존했기 때문이지.]

알고 있다.

자본 많고 기술 많은 서방 세력이 사우디 유전에 빨대를 꽂았다.

막대한 탐사 비용을 치르고, 유전을 캐내어, 석유 회사를 세워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다 날랐다.

[따라서 해양 유전을 탐사 및 석유 시추할 기술적 기반을 제공하기 어렵다는 소리야. 우리도 몰라. 핵심 기술은 사우디 석유를 개발한 외국 석유 회사가 갖고 있어.]

사우디 해양 유전을 개발한 외국 석유 회사.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미국 스탠더드 오일의 자회사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석유를 찾다가 1933년 사우디 정부에서 유전 개발권을 받아 낸다.

이 회사는 이후 사우디에서 유전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독점 우회 루트를 뚫기 위해 회사를 쪼갰고, 결국 액션모빌, 쉐브렌, bop, MPC 등 메이저 정유 회사로 발전했다.’

2020년에 알아주는 초거대 정유 회사는 록펠러 가에서 시작되었다.

[아쉽군요. 솔직히 사우디에서 석유 관련 기술을 얻고 싶었습니다.]

포항 철강이 신일본 철강이란 일본 거대 철강 산업체에서 기술을 전수받았던 것처럼.

태수도 그렇게 사우디에서 석유 탐사 및 채굴 기술을 전수받고 싶었다.

[자잘한 채굴 기술이라면 우리도 내어 줄 수 있어. 하지만 해양 유전이라면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탐사 및 시추 기술이 필요하잖나.]

태수는 순순히 납득했다.

중동 전쟁 이후 겨우 독립을 시작한 사우디 석유 산업이 아니던가.

‘어쩔 수 없군. 결국 서방 정유 회사와 접촉하는 수밖에.’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세계를 주름잡는 메이저 정유 회사와 접촉할 방법이 없군. 편지를 쓰고 전보를 보내어도 만나기 쉽지 않아.’

다국적 초거대 기업이 시간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 그곳에서 고작 163위 기업의 수장을 만나 줄 리가 있나.

‘일반적인 회사 차원의 접근으로는 일이 성사되긴 글렀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군.’

라흐만은 조용히 말했다.

[돈 문제 역시 지금은 곤란해. 한국 석유 채굴을 도와준다 하더라도 적어도 5년, 10년은 이후에나 가능할 거야.]

기한을 정하는 이유가 뭘까?

태수가 모르는 속사정이라면 아무래도…….

[혹시 외교적인 문제가 얽혀 있습니까?]

[남한과 사우디 왕국의 문제라면 전혀. 사우디 왕국과 석유 회사의 문제라고 봐야지.]

이제야 확실하게 알겠다.

[아람코의 지분 정리를 끝낸 이후에나 여유가 있을 것이란 뜻이군요.]

[역시. 자네라면 바로 알아들을 줄 알았어.]

라흐만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중동 전쟁 이후에 석유 회사 국유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지금쯤 미국계 석유 회사 지분율은 합계 40%쯤 되겠군요.]

[모르는 게 없군. 정확해. 그래서 우리는 100% 국유화가 될 때까지 지분 인수를 서두르고 있어.]

전생에서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80년에 이르러 마침내 아람코 주식 100%를 취득해 국유화를 완성하지.’

그래서 라흐만이 5년에서 10년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사우디 왕족으로서도 별로 좋은 대답을 들려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솔직히 서쪽 도시 개발 담당자나 사우디 왕족으로서의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권력이 있으니 그에 따라 가능해지는 일의 범위가 크니까요.]

[미안하게 됐어. 석유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내 권한 밖이야.]

[어쩔 수 없이 친구로서의 대답을 마저 들어 봐야겠군요.]

태수 역시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자네 친구로서 대답은 오히려 훨씬 변변찮아. 개인적인 도움밖에 줄 수 없는데, 괜찮겠나?]

[상관없습니다. 친구란 개인적인 도움 여부와는 관계없이 마음만으로도 충분한 관계죠.]

라흐만은 씩 웃었다.

[내 생일 파티는 수도 리야드에서 열겠어. 아주 성대하게 열어서 세계 각지의 유명 인사들에게 전부 초대장을 보내지.]

석유 얘기하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생일 파티 초대라니.

하지만 태수는 라흐만의 대답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수는 허리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라흐만 님. 최고의 대답을 듣게 되었군요.]

[뭘. 내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개인적인 도움보다 시답잖으니 안타까울 뿐이야. 빨리 출세를 하던가 해야지, 원.]

사우디 국왕의 후계자라는 허울 좋은 자리에 위치하면서도.

석유와 관련된 국가 간의 일에는 선뜻 나설 수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라흐만은 처음과 달리 마음을 바꿔야 했다.

주베일 집이 아니라 수도 리야드의 칼리드 저택에서 생일 파티를 열겠다고.

[일개 공무원이자 허울뿐인 사우디 왕족인 나보다는 사우디 국왕인 아버지께서 더 좋은 대답을 해 주시지 않겠나.]

수도 리야드의 칼리드 저택에서 생일 파티를 열게 된다면 사우디 국왕 칼리드를 만나러 갈 수 있다.

또한 라흐만은 세계 유명 인사를 초청해 성대하게 파티를 열겠다고 말했다.

[사우디 국왕의 후계자가 보낸 초대장을 거절하는 자들이 많지는 않겠지?]

[사우디에 석유 채굴을 했던 미국계 석유 회사들에 초대장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내 초대에 응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태수가 라흐만의 말을 듣자마자 허리를 숙였던 이유기도 하다.

[이왕이면 생일 파티답게 내 또래 거물들도 부를 생각이야.]

[라흐만 님 또래의 거물이 있습니까?]

[록펠러와 로스차일드 가문에도 내 또래 후계자들이 있다고 하던데.]

록펠러와 로스차일드라니.

사우디 왕자 라흐만은 이렇게나 통이 크다.

뻥도 통 크게 치더니 생일 파티에 부르는 인맥 스케일도 이렇게나 크다.

[그들이라면 내 초대는 무시하려나? 아버지께 부탁드려야겠어. 초대장 봉투에 사우디 국왕 인장을 찍으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초대를 무시하는 인사들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상대는 무려 세계 굴지의 가문 사람들이다.

‘록펠러와 로스차일드라. 전생에서는 제대로 만나 보지도 못했는데.’

가진 게 많기에 적도 많다.

그들은 베일 뒤에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전생에 태수가 청일 그룹의 총수 노릇을 하고 있을 때도 만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한국을 주름잡던 청일이라고 해도 세계 100대 그룹에 겨우 발을 걸치는 정도.

아무리 날고 기어도 록펠러나 로스차일드의 수장을 만날 급은 아니었다.

‘두바이 건설을 책임진 MR.아브라함 덕분에 나도 그들에 대해서 듣긴 했지.’

라흐만은 두바이 높은 빌딩에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을 모아 놓고 파티를 벌이곤 했다.

록펠러와 로스차일드 가문 사람들은 라흐만의 생일 파티에 몇 번 참석했다고 했었다.

태수나 한일권이 파티에 초대받아 참석했던 것처럼.

[세계 석유를 꽉 잡고 있는 록펠러와 세계 중앙은행을 꽉 잡고 있는 로스차일드. 운 좋게 안면을 튼다면 자네의 고민은 쉽게 풀리지 않겠나?]

라흐만이 만들어 줄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감사합니다, 라흐만 님.]

[감사는 뭘. 친구끼리.]

라흐만이 태수와 어깨동무를 하면서 말했다.

[최고로 화려한 생일 파티가 될 것 같다. 안 그런가?]

* * *

사우디 수도 리야드.

사우디 국방부 장관 칼리드의 저택은 발칵 뒤집혔다.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바쁘게 일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라흐만의 27세 생일 파티 때문이었다.

[장차 이 집안을 이어받으실 라흐만 님의 생일 파티야. 조금도 소홀함이 있어선 안 돼.]

[세계에 초대장을 보내어 성대한 파티를 열겠다고 처음으로 뜻을 밝히셨다. 절대로 실망을 안겨드릴 순 없지.]

[이참에 사우디 왕족의 위엄을 세계만방에 보여야 해.]

부산스러운 사람들 사이로 태수가 정원을 둘러봤다.

사막의 나라 사우디 왕국답지 않게 크고 높은 열대 나무와 풀로 잘 가꿔진 정원이었다.

사우디에서는 제대로 정원을 가꾸려면 많은 손길이 필요했다.

따라서 부잣집이라면 반드시 공을 들이는 것 중 하나가 정원이었다.

[내 집 정원은 마음에 드나?]

[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신기한 나무와 풀, 그리고 꽃입니다. 잘 어우러져 이국적이고 멋지단 생각이 드는군요.]

[하하하, 한국과 이곳의 초목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기후부터가 다른데 자라는 식생이 같을 리가 있나.

[오랜만에 보는군. 자네나 내 아들이나.]

아버지는 사우디 국왕으로 바쁘고, 아들은 서쪽 도시 개발자로 내려가 바쁘다.

[그간 한국에 일이 많았습니다. 꽤 시끄러웠는데, 혹시 소식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반란이 불거져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인사가 죽고 다쳤다지?]

과연 칼리드는 잘 알고 있었다.

사우디 국왕이기 때문에 국제 정세에 관련한 보고를 빠짐없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은 칼리드가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는 곳이기도 했다.

[설마 자네도 그 현장에 있었나?]

[네, 있었습니다.]

태수가 사는 나라이기도 했고.

[청일의 한청호도 그 일에 연루되어 잡혀갔다고 들었다.]

자칫 라흐만을 국외로 추방당하게 만들 뻔했던 배신자 한청호가 사는 나라이기도 했다.

한청호의 이간질에 사우디 왕궁도 발칵 뒤집히지 않았던가.

반란과 암살에 연루된 사람들.

그때 칼리드는 형제와 조카 모두 합쳐 20명 이상이나 잃었다.

[한청호가 다시 사우디를 어지럽히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겁니다.]

[그거 아주 기쁜 소식이군.]

칼리드는 정원 구석에 마련된 벤치에 앉았다.

원수를 언제고 갚아 주겠다는 칼리드가 아니었던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다. 한청호는 사막에 직접 묻어 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어.]

정말로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자네 솜씨라며? 청일 호텔 VIP룸의 도청기.]

그 일이 어떻게 멀고 먼 사우디 국왕 귀에까지 들어갔을까.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칼리드는 벤치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권했다.

[자네 덕분에 라흐만과 내 속도 시원하게 됐군.]

후련하게 웃는 칼리드.

그는 은원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내가 무엇으로 갚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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