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재회(2)
태수는 눈을 감았다.
태수를 위해 주베일 산업항 개발 계획을 1년이나 앞당겼다던 라흐만이 떠오른다.
무려 10억 달러나 걸린 공사를 두고 장준용과의 신의를 지켰던 태수.
‘낭만적인 남자’라며 못마땅해하던 라흐만이었다.
그때 태수는 라흐만에게 물었다.
-제 손을 잡은 걸 후회하십니까?
-전혀. 자네를 믿었으니 생사를 함께했지.
-이 바닥에 의리가 어디 있냐고 하셨습니까? 의리와 믿음만큼 부질없는 단어가 없다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함께하는 겁니까?
-그야… 믿으니까.
그렇게 대답하고 라흐만은 피식 웃어 버렸다.
-친구.
라흐만은 태수를 그렇게 칭했었다.
‘예전과는 입장이 달라졌군.’
당시 태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고속 도로 공사를 하청받은 사업가로서, 라흐만은 도시 개발 담당자 만났다.
라흐만의 입지가 매우 좁아져서 고속 도로 공사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처지였다.
태수와 라흐만은 공동 목표를 두고 힘을 합한 동맹이 되었다.
또한 한청호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태수는 석유 개발을 위해 사우디에 왔다.
‘이제는 공동 목표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흐만은 나를 아직도 친구라고 생각할까?’
* * *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무려 10억 달러짜리 거대한 석유 산업항의 공사.
어느새 제법 모습을 갖추고 있는 산업항을 둘러보았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사우디의 뜨거운 뙤약볕에 잔뜩 그을린 남자.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전담하고 있던 김우진이었다.
“오랜만입니다. 3년을 내다봤던 주베일 산업항 공사가 벌써 제 모습을 갖췄군요.”
“그 3년은 선진국 기준으로 만든 거지, 한국 사람 기준으로 매긴 준공일이 아니잖습니까. 앞으로 준공까지 1년을 안 넘기겠습니다.”
“자신만만한 대답이 마음에 드는군요.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도 가능하도록 만들어야죠. 그렇지 않고서야 앞서 나갈 수 있겠습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김우진이 슬쩍 태수를 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중장비와 인력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좋습니다. 태양 중장비를 추가 지원하고, 한국에서 해외 파견 근무 인력을 좀 더 모집해 보내드리겠습니다.”
중동에서 태양 건설의 독보적인 건설 속도는 정평이 나 있다.
아니,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회장님께서 지원해 주신다니 든든합니다.”
“지원이 필요하다면 진즉 요청하지 그랬습니까.”
“건설 속도를 높이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것이지, 그룹의 지원 자체는 충분합니다.”
태수는 김우진의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김우진을 바라보는 눈길이 부드러웠다.
“태양 건설을 중동 국가에 확실히 어필하고자 하는군요.”
“회장님이라면 제 뜻을 알아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김우진이 활짝 웃는다.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은 도저히 시간 내에 맞추지 못하는 준공 기일입니다. 반면 우리는 어김없이 몇 달씩 앞당겨 준공해 놓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경쟁력이 있죠.”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확실히 한국 건설 기업은 중동에서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기회입니다.”
실제로 오일 쇼크 이후 중동 건설 붐이 불 때 한국이 수혜를 많이 봤다.
비싼 석유와 기술 부족으로 인한 공산품 수출 시장이 막히다시피 했을 때 해외 외화 대부분을 벌어들인 건 중동 건설이었다.
‘미국에 이어 한국이 중동 건설 시장 점유율 세계 2위를 달성했었지.’
이제 중동 건설 붐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미리 시장에 진입한 발 빠른 기업이 돈을 쓸어 담는 법.
태양 건설은 요즘 사우디 공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휩쓸고 있다.
그 선봉엔 김우진이라는 걸출한 남자가 있었다.
“듣자 하니 김 실장님은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공사 입찰에 참여했다더군요.”
“좋은 기회가 왔기에 잡았을 뿐입니다. 마침 중동 오일 머니가 쏟아져서 공사 수주 역시 쏟아졌으니까요.”
김우진은 웃으며 말했다.
“이미 실적이 있는 데다 사우디 현지 기업인 쇼복시, 아니 사우디 왕자님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는 태양 건설이잖습니까.”
사우디 서쪽 도시 개발 담당인 라흐만이 있다.
라흐만이 떠먹여 준 공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걸 알기에 김우진은 생색을 낼 수 없었다.
“김 실장님, 이 공사만 마치면 한국으로 갑시다.”
“네?”
“10억 달러짜리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사우디에서 굵직한 공사를 맡은 건을 인정받고 승진했다.”
“회장님…….”
“이 정도면 충분히 금의환향하는 거 아닐까요. 가족들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김우진은 조금 멍한 얼굴로 태수를 돌아봤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답이었다.
‘회장님이 내 바람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
어렵게 꾸려 가던 대운 건설을 한순간에 잃었다.
한청호의 농간으로 은행 대출과 투자가 전부 막혀 석 달을 채 버티지 못했다.
가족들을 두고 협박하는 것을 버티지 못하고 대운 건설을 한청호에게 넘겼다.
막대한 빚을 지고 빚쟁이에게 쫓겨 다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반면 태양 그룹이 출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컥해서 찾았던 금산 호텔.
그곳에서 만난 태수를 다짜고짜 비난했던 김우진이 아니었던가.
-야, 너희 회장? 그 애송이가 그렇게 잘났냐? 나보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벌써 그룹 총수라니!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
술에 취해 그렇게 술주정을 부렸었다.
-금의환향하고 싶습니다. 전 해외에서 재기에 성공하고 싶어요.
그렇게 김우진은 태양 그룹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국에 남기고 온 가족들도 거둬 주고, 월급을 넉넉하게 챙겨 준 덕분에 빚 독촉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지.’
숨통이 트였었다.
딴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공사만 열심히 했다.
그러던 중에 기회가 왔기에 그냥 달려들었을 뿐이다.
김우진이 평소에 하던 것처럼.
‘월급 받는 월급쟁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태수는 부드럽게 웃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쩐지 태수의 말이 빈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지난 1년간의 고생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사우디의 무더운 뙤약볕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흘렸던 땀방울은 헛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래서 김우진은 웃었다.
* * *
김우진의 보고가 이어졌다.
주베일 산업항 건설 상황에 이어서 사우디에서 따낸 공사 입찰 현황, 진행 수준, 완공 예정일, 그리고 이웃 나라의 건설 현황 등.
“장수 은행은 사우디에서 뱅킹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주베일 병참 기지 건설 및 무기 공장 건설 역시 완성 단계입니다.”
안정우와 장말동을 데리고 와서 라흐만에게 청탁했던 일들이다.
“중동 전쟁과 석유 파동 이후 중동의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서방 자본 세력을 내쫓아서 국가의 힘은 더 강해졌지만 내분의 조짐이 일고 있습니다.”
태수가 김우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독재 정권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특히 이란의 내부 갈등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흥미로웠다.
‘78년 12월에 발생하는 세계 제2차 오일 쇼크는 이란이 쏘아 올렸지. 그런데 김우진이 벌써 그 조짐을 감지하고 있구나.’
사우디에서 공사를 맡아 뛰느라 바쁜 남자가 아닌가.
그런데 중동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태수는 김우진과 국제 정세에 대해 한참이나 보고를 들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보고였다.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들을 잘 알고 있군요.”
“그래야 나중에 회장님께 자신 있게 보고할 수 있으니까요. 신경 좀 썼습니다.”
이게 신경을 쓰는 정도로 커버 가능한 수준이던가.
“한국에 들어가면 태양 건설 임원으로 배정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철완 사장은 석유 채굴 공사를 맡게 될 거다.
“박철완 태양 건설 사장이 맡던 태양 아파트부터 국내 관급 공사를 대부분 커버해야 할 겁니다.”
“그거라면 자신 있습니다.”
김우진은 수완이 좋고 과감한 자였다.
전생에서 김우진은 세계 거물급 인사들과 친교가 활발했었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와도 친교가 두터워 리비아 공사를 따냈던 남자였지.’
80년대에 대운 건설이 중동 건설에서 히트를 친 이유였다.
중동 건설 공사를 발판으로 김우진은 고작 10년 만에 대운 그룹을 무려 재계 서열 4위까지 올려놓았다.
이후 대운 건설은 조선과 자동차, 전자 등 중공업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김우진을 선봉에 세워 청일을 먹어 치워야겠다.’
태수는 할 일이 많다.
마냥 청일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다.
‘그래도 한일권에게 되갚아 주는 건 내 몫이지.’
한일권의 마지막은 태수가 책임질 것이다.
하지만 자잘한 조무래기 싸움까지 전부 태수가 맡을 만큼 한가하진 않다.
김우진 역시 한청호와 청일에 갚아 줄 빚이 있다.
‘김우진의 수완이 기대되는군.’
그러던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태수, 오랜만이야.]
태수가 뒤를 돌아봤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 사이로 한 남자.
사우디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멋쟁이, 라흐만이었다.
[라흐만 님.]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거기서 웃고 있었다.
* * *
주베일 도심에 위치한 라흐만의 집.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 있던 사우디 국방부 장관 칼리드의 집과는 달랐다.
부지와 건물 규모는 더 작았지만 라흐만의 집은 더욱 화려하고 세련됐다.
현대식 건물이었다.
[공관은 어쩌고 집을 새로 지으셨습니까?]
[나더러 후줄근한 공관에서 몇 년이나 지내라고?]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진저리를 치는 라흐만.
화려하고 멋진 것을 좋아하는 멋쟁이는 칼리드 저택에서도 가장 화려한 방을 가졌었다.
[태양 건설이 집도 잘 짓더군.]
김우진의 작품인 모양이다.
[라흐만 님의 집을 의뢰받은 줄 알았더라면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요.]
[여기서 더 어찌 신경 쓴다고? 충분히 만족하고 있네. 수영장과 조경이 특히 예술이야.]
대저택은 라흐만의 취향대로 부티가 번쩍번쩍 났다.
호텔 수영장 이상으로 넓고 세련되었으며 잘 관리된 나무와 풀로 웅장해 보였다.
[완공이 앞당겨진 덕분에 리야드 대신 이곳에서 파티를 열까 해. 그러니 강태수, 자네도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어.]
돈 많고 능력 있는 사우디 젊은 왕족이 여는 파티라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다.
그런 파티를 썩 좋아하지 않는 태수가 아닌가.
[흠, 파티라면…….]
[내 생일 파티 말이야. 설마 모르고 있던 건…….]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라흐만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려고 할 때 태수는 재빨리 라흐만의 말을 끊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
[좋아, 지난번엔 자네 동맹을 소개받았듯이 이번엔 내 지인들을 소개해 주지.]
라흐만이 아차, 하더니 못 박는다.
[지인이야. 친구 아니고 지인.]
자네와는 달라.
라흐만은 레드 와인이 찰랑거리는 와인 디켄터를 기울여 태수의 잔을 채워 준다.
태수와 라흐만은 와인 잔을 들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를 위하여.]
[위하여.]
쨍.
풍미가 좋은 레드 와인이었다.
태수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라흐만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한국에서 석유를 채굴하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석유를?]
듣도 보도 못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지는 라흐만.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국엔 지하자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부스러기밖에 없지 않나?]
[지하자원이 부족한 나라인 건 맞습니다. 다만 대륙붕에 석유가 묻혀 있는 것 같습니다.]
[대륙붕? 해양 유전을 발견했다는 말인가? 우리 사파니야 유전처럼?]
[네.]
[한국에 석유라니, 자네가 왜 날 찾아왔는지 알 것 같군.]
라흐만은 턱을 슬슬 문질렀다.
[기술과 자본, 둘 중 어떤 도움이 필요하지?]
[둘 다 필요합니다.]
라흐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해양 유전이라면 석유 탐사 시추부터 석유 채굴 시설을 띄우고, 육지까지 연결하는 거대한 해저 파이프라인까지 만들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지.]
사우디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상 유전과 육상 유전을 보유하고 있다.
[사우디 서쪽 페르시아만 인근에 석유 유전이 몰려 있다.]
석유 전진 기지인 주베일 산업항 역시 그런 이유로 만들어졌다.
[내가 그곳과 관련된 국토 개발을 담당하고 있어. 그러니 제대로 찾아오긴 했군.]
자원이 부족한 동쪽 도시 건설을 담당하다가 서쪽 도시 개발을 담당하게 된 것 자체가 핵심 권력을 틀어쥐었다는 뜻이다.
[강태수, 서쪽 도시 개발 담당자로서의 대답과 사우디 왕족으로서의 대답, 그리고 친구로서의 대답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