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재회(1)
“박정환이 죽어 버려서 당신 뒤를 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대통령 암살 사건과 한일 조약으로 인해 시끄러운 때입니다.”
태수는 품에서 서류를 꺼내 흔들었다.
“박정환의 지낭으로 열심히 일하셨던데. 지금 금융 파동 문건이 터진다면? 4대 부정부패가 연달아 터진다면?”
그뿐만이 아니다.
“한일 조약도 당신이 주도했잖아. 안 그렇습니까?”
제7 광구를 둘러싸고 일본과 협상을 주도한 건 다름 아닌 김종표였다.
“국민들의 관심이 모두 집중된 한일 조약에 당신이 연관되었다는 것을 밝히지 못할 것 같습니까?”
김종표가 흔들리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중앙 정보부에서 가져온 서류가 틀림없다.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가 나선 이상 없는 먼지도 털어 낼 것이다.
하물며 정치 자금 스캔들은 덮어 두기에도 급급할 만큼 큰 건이었으니 깊이 연루된 자들만 털어도 이 나라 가 발칵 뒤집힐 정도다.
“강태수, 네놈이 날 협박해?”
“못할 것도 없지. 날 윽박지르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이 아닙니까.”
태수가 차가운 눈으로 김종표를 보았다.
“당신의 똑똑한 머리라면 알고 있겠죠. 이걸 터뜨린다면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는 그 자리,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합동 수사 본부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계엄법 아래 계엄 사령관과 대통령 암살 사건 합동 수사 본부장으로 이세후가 칼을 휘두르고 있다.
현재 김종표는 이세후를 찍어 누를 힘이 없다.
“차기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있을 텐데, 공화당 대선 후보는 될 수 있겠습니까?”
될 수 있을 리가 있나.
공화당 의원들은 대체 누구 손에 매수됐는지 김종표가 어르고 달래도 난색을 표할 뿐이었다.
‘이제 보니 강태수가 뒤에서 손을 썼구나.’
김종표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 갔다.
“박정환과 관련된 4대 부정 축재로 당신에게서 몰수할 재산만 최소 216억.”
전생에 전두호 정부가 김종표를 털어 몰수한 재산은 정확히 216억 4,648만 원이다.
물론 전두호는 이후 1조 원 넘는 돈을 부정 축재했다가 김영상 정부에 털렸다.
전생에 김종표가 전두호에게 삿대질을 했던 이유였다.
“그 먼지, 털어 볼까요?”
태수의 눈이 차가웠다.
김종표는 태수의 눈을 보며 그 눈이 말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젠장, 잘못 건들었군.’
겉으로 보기에 태수는 고작 재계 서열 163위 재벌 총수 나부랭이다.
반면 김종표는 비상계엄 사태에 행정부를 틀어쥔, 무려 대통령 권한 대행이다.
그런데 막상 붙어 보니 상황이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어르고 달래고 올려붙이고 떨어뜨리고, 그렇게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서 쉽게 주무를 생각이었는데, 내가 외려 제대로 한 방 먹었군.’
스물일곱의 젊은 재벌 총수가 정치에 관해 알면 얼마나 알랴 싶었다.
‘한일 조약은 반드시 내 손으로 증거 인멸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이야.’
박정환이 나라 땅을 팔아먹은 매국노로 찍힌 상황이다.
한일 조약을 주도하게 됐던 김종표는 반드시 그걸 덮어야 했다.
안 그러면 김종표까지 도매급으로 넘어가서 차기 대권을 잡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 볼 것도 없군.’
쓴웃음이 나온다.
김종표는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떡하면 되겠나?”
김종표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한청호와 다른 점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일 조약 발표할 때 굳이 나를 거론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쓸모가 있으니까.
김종표는 아직 제 쓸모를 다하지 않았다.
“당신이 싸지른 똥, 책임지고 치우십시오.”
박정환의 지낭, 한일 협약의 책임자가 여기 있지 않은가.
김종표는 바로 알아들었다.
“한일 조약을 내 선에서 정리하라는 뜻이군.”
김종표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감당해야 할 일이 점점 더 커진다.
태수는 말없이 김종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만 묻겠네. 자네가 이토록 한일 조약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뭔가?”
“태양 그룹은 제7 광구에서 석유를 채굴할 겁니다.”
이해득실이 얽힌 사업이라는 뜻이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이기도 하다.
김종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7 광구에는 석유가 없어. 우리가 그것도 확인하지 않고 협상했을 거라 생각했나?”
“그건 내가 알아서 합니다. 당신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을 텐데요.”
김종표는 입술을 깨물었다.
선택의 시간이 왔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일본 수상과 얼굴을 붉히면서 뒤집어엎느냐, 아니면 이대로 박정환과 세트로 묶여 매국노로 처형당할 것이냐.’
이세후가 칼을 뽑았는데, 어찌 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외통수로구나. 선택지는 애초에 하나뿐인 것을.’
박정환과 세트로 묶여 매국노가 되어서는 미래가 없다.
그렇게 오랜 시간 꿈꿨던 대통령 자리는 물론 정치권에 발붙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태수는 부정축재로 모은 가산을 몰수하고, 감옥까지 보내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욕을 먹어도 이웃 나라에 먹는 게 낫지.’
한청호가 늘 당했다는 외통수가 이런 거였군.
김종표는 두 손을 들었다.
“알겠네. 태양 그룹에서 석유를 채굴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
무조건 항복이었다.
* * *
사우디로 향하는 비행기 안.
저쪽 칸에는 김광록과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자리 잡았다.
태수는 송소리에게 보고받고 있었다.
그룹에 관한 보고를 끝낸 송소리가 조심스럽게 태수에게 물었다.
“회장님, 정말 제7 광구에서 석유를 채굴하실 건가요?”
“해야죠.”
“자원 탐사부터 쉽지 않을 거예요. 솔직히 석유 탐사 시추 한 번 할 때마다 거액이 들어갑니다. 채굴 가능성도 매우 낮아요.”
박정환과 김종표가 제7 광구를 팔아먹은 이유였다.
망망대해에서 혹시나 기대를 갖고 석유 탐사 시추를 하기엔 드는 돈이 너무 많았다.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사업을 추진하는 것보다 다른 사업을 벌이는 건 어떨까요?”
“제7 광구엔 석유가 묻혀 있습니다.”
하지만 태수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 바로 옆에서 수십 개의 원유 시추 시설을 갖추고 자원을 팔아먹고 있었으니까.’
한일 조약에 묶여서 제7 광구에 손도 못 대는 한국과 일본, 양국과는 달랐다.
“회장님께서 무엇 때문에 확신을 갖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룹 차원에서는 만류하고 싶어요.”
송소리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실패할 때 감당해야 할 빚 더미 때문입니까?”
“예, 지금 태양 그룹엔 석유 자원을 탐사하고, 시추하고, 석유 시설을 갖출 만한 기술과 자금이 부족해요.”
한두 푼 드는 시설이 아니다.
확실하게 판명이 되어도 자금 규모가 워낙 커서 손도 못 댈 정도가 아닌가.
또한 해양 석유 자원 탐사 시추엔 많은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박정환이 제7 광구를 포기한 이유였다.
‘박정환이 제7 광구를 먼저 대한민국의 영유권으로 선포했으면서도 한일 대륙붕 협정을 맺은 까닭이지.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끌어오겠다는 명분으로.’
지금 대한민국 기술 수준은 그만큼 낙후되어 있었다.
또한 해양 석유 탐사 비용은 정말 많이 든다.
육지 시추에 비해 네 배 이상으로 들며 석유 탐사 비용은 석유 개발 비용의 50, 60%를 차지한다.
“회장님, 태양 그룹의 역량은 물론이고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도 가능할까 싶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도전이에요.”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회사가 나아갈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것만이 회장이 할 일은 아니다.
아랫사람을 독려하고, 사업을 따오는 건 임원진도 할 수 있다.
그룹 회장이 필요한 이유는 그룹 차원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새로운 방향에서 문제의 해결 방법을 뚫어 내는 데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사우디로 가고 있는 겁니다.”
송소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태수를 보았다.
“사우디에서 우리에게 기술 협조를 해 주시리라 생각하세요?”
“협조를 얻어 낼 생각입니다.”
“만일 한국에서 석유가 발견된다면 경쟁 상대가 돼요. 그런데도 사우디에서 순순히 협조해 줄까요?”
사우디는 세계 최고의 산유국이다.
석유수출국기구 OPEC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국가이기도 하다.
“기술을 절대 내주지 않으려고 할 거예요. 밥그릇 싸움하기 싫을 테니까요.”
“설득해야겠죠.”
태수는 씩 웃었다.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그 일은 제가 맡기십시오. 그러니 송 실장님은 내가 사업을 따왔을 때를 대비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바로 석유 채굴 사업에 뛰어들 수 있도록.”
태수에게선 꺾을 수 없는 의지가 흘러나온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송소리.
그녀가 태수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직 많은 부분이 부족한 기획서예요. 검토 부탁드려요.”
태수는 송소리가 넘겨주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제7 광구 석유 탐사 및 석유 자원 개발 사업부에 관한 기획서>
태수가 그걸 휙휙 빠르게 넘겨 보면서 체크했다.
제7 광구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기획서였다.
사업 확장 및 개발에 관한 의견도 꼼꼼히 기재되어 있다.
“언제 이런 것을 다 준비하셨습니까?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을 텐데요.”
“제 일이 그런 거예요.”
송소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란 듯이 말하지만 태수가 어찌 그 노력을 모르겠나.
“보름을 꼬박 매달려도 힘들었을 양입니다.”
두툼한 서류에는 수준 높은 자료 조사와 간결하게 정리된 사업비 목록, 그리고 태양 그룹 사업 연계 방향성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아주 흡족했다.
그녀를 영입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 논문과 사례를 수집했고, 관련된 예산안까지 짜왔군요. 고생했겠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녀는 뒤따라 내뱉을 뻔했던 다른 말은 생략했다.
‘당신이 원하는 일이잖아요. 그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야죠.’
태수는 송소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화장으로도 감추지 못하는 초췌해진 안색, 깊이 내려온 다크 서클, 그리고 붉게 충혈된 눈까지.
“괜찮습니까? 무리한 것 같은데.”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그녀가 재빨리 서류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태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내거나 나무라려는 게 아닙니다. 기획서가 너무 훌륭했기에 송 실장이 걱정되었을 뿐입니다.”
“제 걱정… 이요?”
송소리가 서류 내려서 얼굴을 보인다.
그녀의 눈이 기쁨으로 조금 반짝였다.
“송 실장은 안 그래도 무지막지한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 이런 기획서를 만들려면 당연히 제대로 쉬지도, 자지도 못했을 게 뻔하잖습니까.”
“필요한 일이었잖아요.”
“충분합니다. 당신은 그 자리를 능력으로 지켜 냈고, 다들 당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쁨으로 반짝이던 송소리의 눈빛이 조용히 잦아든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이렇게 무리하는 겁니까?”
송소리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물끄러미 보고서를 보았다.
태수 역시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제가 무리하지 않으면 당신이 무리해야 하니까요.’
송소리는 끝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비서 송창준은 그런 송소리와 태수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송창준이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회장님, 사우디에 내리면 바로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수도 리야드? 아니면 주베일?”
“주베일로 갑시다.”
“주베일 어디로 향할까요?”
“산업항부터 둘러봅시다.”
태수가 주베일 산업항으로 관심을 돌렸다.
태양 건설이 단독 입찰을 따냈고, 김우진이 진두지휘하고 있는 사우디 서쪽의 산업항 공사.
‘주베일 산업항. 사우디가 야심 차게 준비하는 석유 수출 기지다.’
태수가 사우디로 향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사우디에는 세계 최대 석유 국영 기업인 아람코(ARAMCO)가 있다.’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에서 34개로 쪼개진 회사들이 아람코의 지분을 확보한다.
지금의 엑션모빌과 쉐브렌 등 초거대 다국적 정유 회사들의 원조가 바로 스탠더드 오일이다.
독점을 해소하기 위해 회사를 일부러 쪼개 놓은 것이다.
‘사우디에서는 1951년 사파니야 오일 필드란, 세계에서 가장 큰 해상 유전을 발굴했다. 또한 1957년 세계에서 가장 큰 육상 유전 가와르 오일 필드 역시.’
태수는 비행기 좌석에 몸을 기댔다.
‘오랜만에 만나겠군, 라흐만.’
주베일에 머물면서 서쪽 도시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라흐만을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