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꿇어(3)
김재국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태수는 오래전부터 공들여 준비했다.
미리 김재국과 접촉하여 ‘제7광구’에 대한 서류를 보여 주었다.
애국심을 자극해 김재국의 마음에 배신의 불씨를 지펴놓았다.
태수는 김재국이라면 박정환을 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두 번째 용건도 문제없이 해결될 것 같군. 중앙 정보부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모두 두 가지.’
고개 숙인 신지수.
태수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내가 대의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을 텐데요.”
설득은 태수가 아니라 신지수가 해야 한다.
이미 권력의 시소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다.
지금 이곳에서 강자는 신지수가 아니라 태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나는 대의를 말할 수밖에 없네. 자네에게 내어 줄 것이 없으니까.”
“왜 줄 것이 없습니까?”
“중앙 정보부가 망하게 생겼는데, 내가 무엇을 약속할 수 있겠나.”
“그도 그렇군요.”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가 아니면 전부 의미 없는 약속이 될 것이다.
‘생각보다 이해득실을 잘 따지는 자군. 그러니 김재국처럼 대의를 내세우는 선임을 제치고 이 자리에 올랐겠지만.’
마음에 든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왔던 한청호의 손을 미련 없이 놓았을 테지.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해 등 돌릴 수 있는 자.
중앙 정보부란 막강한 권력 기관의 장이라면 대의보다는 권력에 가까워야 한다.
신지수는 이미 반은 정치인이 다 되었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권력자와는 신의를 논할 수 없지만 거래 상대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신지수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던가.
-중앙 정보부가 휘말려서 공중 분해되지 않도록 부탁하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태수가 입을 열었다.
“중앙 정보부 부장으로서는 제게 어떤 것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지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얼굴색이 밝다.
“어떤 것을 원하나?”
“당신의 우선순위가 되길 원합니다. 당신이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다른 재벌들의 청탁과 정치인들의 입김보다 우선하라는 뜻이다.
“최우선 순위는 장담할 수 없네. 자네도 알다시피 대통령의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통령 권한 대행의 말은?”
대놓고 훅 들어오는 돌직구에 신지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대답이었다.
“무시하겠네.”
태수를 대통령 권한 대행 김종표보다 우위에 올려놓겠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현재 박정환이 모든 권력을 빼앗아 행정부 살림을 맡겨 놓은 국무총리 김종표.
행정부의 실질적인 살림을 맡고 있지만 비상계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오히려 박정환이 살아 있을 때보다 할 수 있는 권한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 권한 대행은 차기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행정부가 연명하도록 숨을 돌리는 것밖에, 다른 일을 추진할 권한이 없어. 허수아비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이 일에 연루된 중앙 정보부 요원들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최대한 신분을 숨길 작정이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신지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중앙 정보부에 몸담은 이상 대의를 위해 각오해 줘야겠지.”
죽여서 입을 막겠다는 뜻이 아닌가.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에 연루된 중앙 정보부 요원을 전원 태양 그룹에서 떠안겠습니다.”
신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태양 그룹에서 떠안겠다는 말은…….”
“제 그늘에 들어오면 중앙 정보부와 관계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신지수가 활짝 웃으며 크게 기꺼워했다.
“좋아, 그 녀석들도 지금 불안한 상황에 앞날 걱정이 많아. 태양 그룹에서 책임져 준다면 갈 녀석들이 많을 거야.”
“월급은 확실하게 챙겨 준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 녀석들을 통해 우리도 얼굴 볼일이 더 자주 생기겠군 그래. 좋아, 아주 좋아.”
신지수는 만족스러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강태수가 아닌가.
‘강태수라면 어떻게든 제 식구를 챙기는 자이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오랜 시간 공들여 길러 낸 국가의 재원이다.
하지만 죽여서라도 그들의 입을 틀어막아야 할 상황이다.
그들을 태양 그룹에 떠넘기면 중앙 정보부에 불똥이 튀진 않을 것이다.
‘이참에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히는 정치계 슈퍼스타 안정우와 육군 참모 총장 이세후를 연결하는 뒷배, 강태수와 단단한 연결 고리까지 생겼고 말이야.’
한청호 하나 처리하는 대가치고는 소득이 꽤 짭짤하지 않은가.
신지수는 손을 내밀었다.
“함께 이 난관을 잘 헤쳐 나가자고.”
“그럽시다.”
태수가 그 손을 잡고 흔들었다.
태수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이로써 두 가지 용건은 끝났군.’
이번 걸음으로 얻은 이득은 총 세 가지였다.
‘첫째, 한청호를 확실하게 짓밟는 것.’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는 원래 청일 한청호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뒤를 봐주며 꽤 끈끈하게 유착된 사이가 아니었던가.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가 한청호를 비호한다면 꽤 골치 아팠을 터다.
그를 한청호에게서 돌려세운 것만으로도 발걸음을 옮길 이유는 충분했다.
‘둘째, 중앙 정보부의 새로운 끈을 만드는 것.’
중앙 정보부란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장이 아닌가.
정권의 칼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가 된 중앙 정보부다.
이번 일로 신지수는 태수에게 빚을 하나 지게 됐다.
‘셋째, 내 휘하의 정보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
정보원으로서 오랫동안 수준급 교육을 받은 자들이 바로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다.
태수가 내내 아쉬워했던 부분이 무엇이던가.
태양 그룹의 정보력이 다른 재벌 기업에 비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한청호와 달리 한일권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놈이야.’
나쁜 짓으로는 천재적이다.
그러니 한일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유능한 정보원들이 필요했다.
‘중앙 정보부 요원들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군.’
그런 이유로 대통령 경호 및 요원 감시를 이유로 중앙 정보부에게 도청을 맡겼다.
대통령 암살 사건에 휘말려서 자연스럽게 태양 그룹이 흡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아주 좋아.’
태수는 기쁘게 신지수와 맞잡은 손을 흔들 수 있었다.
태양 그룹은 지금도 조용히 내실을 다지며 커 나가고 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용건이다.’
태수가 신지수에게 슬쩍 말했다.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대통령 권한 대행인 김종표와 관련된 일입니다.”
“김종표?”
신지수가 안색을 굳힌다.
“안 그래도 김종표와 우리 중앙 정보부가 얽힌 일이 있어.”
말 안 해도 안다.
박정환 정권의 4대 부정부패 사건 중에서 속칭 ‘워커힐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을 말하는 거다.
“그게 터지면 우리 중앙 정보부까지 아주 곤란해져.”
그럴 것이다.
김종표 머리에서 나왔고, 중앙 정보부가 손발이 되어서 국고를 빼돌린 일이었으니까.
“금융 파동이 있잖습니까.”
신지수는 씩 웃었다.
그건 중앙 정보부와 상관없지.
“그거라면 언제든지.”
이미 가지고 있는 자료가 꽤 된다.
자신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신지수.
아주 든든했다.
* * *
중앙 정보부에서 나온 태수.
주차된 차를 향해 걸어간다.
태수의 옆에는 김광록이, 그 뒤에는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따랐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는 차가 있었다.
“강 회장.”
뒷좌석 차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이었다.
“재벌 그룹 젊은 총수께서 중앙 정보부에는 어쩐 일인가?”
“그러는 대통령 권한 대행께서는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나야 자네를 만나러 왔지.”
태수가 중앙 정보부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했다.
오는 길에 박정환과 한청호의 기자 회견 내용을 듣고 확신했다.
강태수는 한청호와의 오랜 악연을 정리할 것이라고.
“잠깐 대화할 시간은 되나?”
“본론만 간단히 하신다면.”
“시간 많이 잡아먹지는 않을 거야.”
김종표가 눈짓한다.
그러자 김종표를 따라왔던 경호원들이 멀찍이 뒤로 물러선다.
태수 역시 손을 들었다.
김광록을 비롯해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뒤로 물러선다.
태수와 김종표 둘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것 같은 구도가 되었다.
“아쉽게 되었어. 난 약속을 지켜서 태양 아파트 준공을 서둘렀는데. 내 손에 돌아온 건 먼지뿐이야.”
“1억짜리 먼지도 있습니까?”
태수는 웃었다.
“대통령 권한 대행께서는 기억나지 않으시나 봅니다.”
그날 김종표가 찾아왔을 때 태수는 말했었다.
“정치 자금으로 요구한 1억. 일단 가진 것을 털어 3천만 원을 드렸습니다. 태양 아파트 분양이 끝나면 잔금을 마저 드리겠다고 했을 텐데요.”
아직 태양 아파트는 분양을 막 시작하려고 한다.
“내가 처음부터 원한 것은 박정환의 매국 혐의라고 했을 텐데.”
김종표가 양복바지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태수를 삐뚜름하게 노려본다.
“그걸 딴 놈 손에 쥐여 줘 놓고 지금 그런 말이 나오나?”
“그날 분명히 말했는데요. 지금 제 손에 없다고.”
태수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김종표도 태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걸 어쩌나.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그런 말은 하지 않던가요?
-용건이 그것이라면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차 했다.
김종표는 그때도 말의 속뜻을 헤아리려고 했었다.
다만 태수의 페이스에 넘어가서 정치 자금 문제로 넘어갔을 뿐이었다.
김종표의 눈이 더욱 매서워진다.
‘처음부터 내게 내어 줄 생각 따윈 없었다는 소리잖아?’
당연하게도 태수가 고깝게 보이지 않았다.
맡겨 놓은 제 물건을 멋대로 빼돌려 판 도둑놈 보듯 태수를 노려본다.
“자네를 귀찮은 일에서 완전히 빼 주려고 했었는데 말이야.”
이미 이세후가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다.
대통령 암살 사건 수사를 수사하는 건 이세후지, 김종표가 아니다.
김종표가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건 행정부의 일.
‘하지만 태양 아파트는 이미 준공이 떨어진 후지.’
그러니 태수가 무서울 게 있겠나.
김종표가 볼을 씰룩이며 말했다.
“내 딴엔 호의를 보이기 위해 선물로 한청호를 중앙 정보부에서 푹 썩게 해 주려고 했었지.”
중앙 정보부 신지수를 만나고 나오는 길이 아닌가.
중앙 정보부에 잡혀간 한청호의 생사를 결정하는 건 신지수지 김종표가 아니다.
김종표가 태수의 앞에 몸을 기울이며 으르렁댔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태수는 김종표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고 있어서 세상이 당신 손아귀에 들어온 것 같습니까?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선전 포고는 김종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신은 박정환이 아니야. 권한 대행, 그것도 임시직일 뿐이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건 태수가 아니다.
김종표였다.
“어차피 행정부를 움직일 권한은 전에도 갖고 있었죠. 권력은 없고 일과 책임만 떠안은 허수아비 국무총리. 지금과 별다를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뿐이다.
군을 틀어쥐고 있는 이세후, 중앙 정보부를 틀어쥐고 있는 신지수만도 못한 권력이었다.
차기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버티기만 해야 하는 허수아비 권한 대행 자리가 아닌가.
전생에 최규혁이 맡았던 바로 그 자리 말이다.
“내가 중앙 정보부에 왜 왔다고 생각합니까?”
“한청호 때문이겠지.”
“틀렸습니다. 당신 때문입니다.”
김종표는 그제야 표정을 굳혔다.
태수에게서 떨어져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박정환과 함께 싸지른 4대 부정부패, 그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증권 파동. 당신은 어떻게 빠져나갈 겁니까?”
김종표의 안색이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