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83화 (183/230)

183화 꿇어(2)

태수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가 휘하 요원들을 이끌고 취조실에 들어왔다.

“끌고 가십시오. 예정되었던 대로 처리하셔도 좋습니다.”

태수가 내리는 사망 선고였다.

신지수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습니다. 저도 더는 기다리기 어려운 터에 잘됐군요.”

신지수가 휘파람을 불며 휘하 요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문실로 끌고 가. 자백 받아 내.”

중앙 정보부 고문실에 끌려간 이상 없던 죄까지 토설하고 죽는 건 뻔한 결과이다.

중앙 정보부 요원이 한청호의 팔을 붙들었다.

더는 고민할 수 없었다.

쿵.

한청호가 마침내 태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 줘.”

한청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잔뜩 구겨져 있는 표정이 마음에 든다.

태수는 그 모습을 매우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제발… 목숨만은…….”

한청호가 태수 발끝에 이마를 대고 조아렸다.

엎드려 빌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이대로 죽는 건 개죽음이었다.

“살려 주게.”

한청호는 들었다.

자존심과 미래, 한청호라는 모든 것이 깨어져 나가는 마음의 소리였다.

태수는 의자에 앉아 지켜보았다.

태수가 눈을 감는다.

일부러 지금 이 상황을 만든 이유였다.

‘그 오만한 한청호가 드디어 내 발아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군.’

옛날 생각이 났다.

전생에 한청호는 태수에게 범접하지 못할 거물로 기억되곤 했다.

‘내 상상 속에서 커져 버린 괴물 한청호는 내겐 벅찬 상대였다.’

태수는 늘 죽은 한청호를 롤 모델로 두고 청일을 이끌었다.

한청호라면 어떻게 했을까, 한청호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미 죽어 버린 한청호의 이미지를 쫓아 자신을 채찍질했다.

‘상상 속에서 난 언제나 패배자였다.’

죽은 사람은 이길 수 없다.

그렇게 태수에게 한청호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같은 시대에 만났다면 굴복하는 방법밖에 없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회귀하고서야 알았다.

자신이 오랫동안 세뇌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막상 다시 만나 보니 실제 한청호는 내 생각보다 그리 큰 인물은 아니었지.’

몰리브덴 광산에서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그날 한청호는 태수에게 제 밑으로 들어오라고 제안을 가장해 값을 후려쳤었다.

수가 먹히지 않자 야멸차게 돌아섰다.

그 단순한 탐색전에서 태수는 승리자였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줄곧,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을 다시 만났고, 붙었고, 이겼다. 그 덕에 난 내 안에서 긋고 있던 한계를 넘었다.’

태수는 한 단계 더 성장했다.

“약속은 지키죠.”

태수가 손을 들어 올리자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한청호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당신은 감옥에 가게 될 겁니다.”

“감옥?”

한청호의 눈알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이해득실을 따져 가며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감옥에 가게 된다는 뜻은… 내가 죽지 않는다는 말이구나.”

어느새 한청호는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큭, 크큭. 크크크큭. 크하하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자네가 정말로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군.”

한청호는 꿇었던 몸을 일으켰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복수는 늦지 않아. 후환을 남겨 둔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강태수.”

치욕은 그 이상으로 돌려주면 된다.

“신념 따윈 중요하지 않아. 내가 죽지 않는다는 게 중요한 거야. 기회는 곧 희망이지.”

한청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웃는 놈이 진정한 승자다. 강태수, 난 마지막에 웃게 될 거야. 넌 그때가 되면 내 발아래서 오늘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겠지.”

한청호의 눈이 번들댄다.

“오늘 내가 겪은 패배의 상처는 아물어서 훈장이 될 거란 소리니까. 약속하지 강태수.”

한청호는 진심을 담아 다짐했다.

“내가 네게 되돌려 줄 상처는 아물 새도 없이 네 목숨을 빼앗게 될 거야. 그날을 기다려라.”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념을 꺾은 것은 여흥에 불과하다.

“당신의 감옥 생활은 내 손에 달렸다는 걸 알 텐데.”

감옥 생활을 아주 고단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다.

태수는 웃고 있었다.

반대로 한청호의 웃음이 뚝 멎었다.

“강태수, 넌 처음부터 나를 죽일 생각이 없었구나.”

태수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등을 돌리고 취조실 문을 향해 걸어간다.

‘당신은 지금 죽어서는 안 돼. 고통의 시간이 너무 짧잖아.’

죽음으로 사죄해야 하는 건 한일권이다.

한청호는 다른 것으로 죄를 갚아야 한다.

‘넌 감옥 안에서 모든 걸 지켜봐야 할 거야. 네 아들이 청일 그룹을 어떻게 말아먹는지.’

한일권은 나쁜 짓엔 천재적이지만 경영에는 소질이 없다.

그건 한청호도 알고, 태수도 안다.

‘네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키워 온 청일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한청호가 평생을 바쳐서 일궈 온 청일이다.

전생에 한청호는 죽을 때까지도 청일을 걱정했다.

그래서 태수에게 그리 간곡하게 뒷일을 부탁하지 않았던가.

‘네가 지켜야 했던 가족들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한청호와 한일권은 태수의 가족들을 죽였다.

한청호도 가족을 잃는 슬픔을 느껴 봐야 한다.

‘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걸 무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것.’

태수는 중앙 정보부 문을 열었다.

‘그게 내가 네게 주는 벌이다.’

때로는 목숨을 잃는 것보다 훨씬 괴로운 벌이 있다.

‘당신의 치욕과 굴욕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난 아직 시작도 안 했어.’

한청호가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강태수! 대체 넌 내게 왜 이러는 거냐? 이유가 뭐야?”

청일 정유와 중장비를 넘길 때 물었던 질문이었다.

달칵.

이번에도 태수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태수는 그렇게 중앙 정보부 취조실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한청호는 테이블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강태수! 돌아와! 돌아와서 제대로 대답해 주란 말이야!”

* * *

중앙 정보부 부장실.

태수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내가 중앙 정보부에 온 용건은 모두 세 가지다.’

그중 한 가지는 바로 한청호와 관련된 문제였다.

한청호의 신념을 꺾고 오랜 세월 드리웠던 한청호의 망령을 걷어 낸 것.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신지수는 커피잔을 든 채 태수의 눈치를 살폈다.

“한청호의 뒤처리는 염려하지 않아도 좋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고문 몇 번해서 자백 받아 내고, 무거운 형량을 받아 내 감옥에 보낼 생각이야.”

“약합니다.”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최고의 고문 전문가를 붙여 주십시오.”

“음?”

“강도 높은 고문으로 병신이 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숨만 붙여 놓으면 됩니다.”

이건 병신을 만들어서 내보내라는 뜻이다.

신지수가 커피잔을 내려놨다.

“알았네. 최고의 고문 전문가를 붙여 주지.”

“감옥에서도 사람을 따로 붙여 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

“흉악범 중에서도 성질 더러운 놈. 조직 폭력배처럼 힘과 돈으로 포섭 가능한 죄수가 아니라, 충동적으로 눈 돌아가면 막무가내로 사람 패는 위험한 놈으로.”

“…그런 놈을 붙였다가 감옥에서 죽으면 어쩌려고?”

“그건 내 알 바 아닙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편하게 살게 할 수야 없지.

신지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서운 자로군. 밟을 때는 확실하게 밟는다는 건가.’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와 태수가 뒤에 있는 한 한청호의 처우는 정해졌다.

신지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네 말대로 하겠네. 그러니 자네도 힘을 좀 써 줬으면 하는데…….”

태수가 원하는 대로 한청호의 처분에 전적으로 협력한 이유.

신지수가 바라는 것은 따로 있다.

“중앙 정보부가 휘말려서 공중 분해되지 않도록 부탁하네.”

태수가 온 두 번째 이유였다.

‘중앙 정보부에서 얻어 내야 할 것이 있지.’

하지만 태수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지금 아쉬운 처지는 태수가 아니라 신지수가 되어야 한다.

협상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태수가 신지수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이유였다.

신지수는 속이 타들어 갔다.

“중앙 정보부 차장 김재국이 대통령 암살 사건 주범이야. 더구나 중앙 정보부 요원 여럿이 도청 기록을 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어.”

당장 이세후 합동 수사 본부장이 나서면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

차기 정권이 들어서면 보란 듯이 뭇매를 맞게 될 게 뻔했다.

‘실제로 전생에서는 박정환 암살 사건을 일으킨 중앙 정보부 부장 김재국 때문에 중앙 정보부가 공중 분해되었지. 전두호는 대신 안기부를 만들었다.’

국가 안전 기획부.

줄여서 안기부라 불렀다.

국내 파트를 맡은 남산과 해외 파트를 맡은 이문동에 청사가 있었는데, 보통 안기부 하면 남산으로 통했다.

한수가 안기부에 들어간 후 박정환 암살 배후로 지목된 안정우를 잡으며 ‘안기부 송곳’으로 스타가 되기도 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박정환 암살 사건을 중앙 정보부가 주도한 일이 아닌, 김재국 개인의 일로 넘겼으면 해.”

달칵.

태수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날 청일 호텔 VIP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물에 대해 들으셨을 텐데요.”

김재국은 박정환 앞에서 실토했었다.

-요원들 전부 각하의 매국 행위를 알게 됐죠.

-전부 총 빼 들고 각하를 죽여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거든요. 애국 청년들을 뜯어말리는 게 보통 일이랍니까.

-부하들을 대표해서 내가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래서 문제였다.

그런 이유로 중앙 정보부가 발칵 뒤집어 졌다.

부장 신지수가 몸이 달아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자네가 나서서 무마해 주길 바라네. 애국심에 넘친 김재국이 나라를 대표해서 한 일이라고 덮었으면 해.”

신지수는 대신 태수에게 더 가까이 붙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나라를 위해서라네.”

뭐만 했다 하면 다들 나라를 위해서란다.

박정환도 그렇고, 전두호도 그랬다.

실은 자신들의 이득 때문에 저러는 것일 테지만.

‘이득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나서는 인간은 결국 김재국과 안정우 어르신뿐이었지.’

하지만 신지수는 진지했다.

“생각해 보게. 이 나라의 정보를 깊이 다루고 있는 두 기관이 이번에 전부 휘말려서 마비 상태가 되었어.”

국내외 정보를 아우르는 중앙 정보부와 국내외 군사 정보를 담당하는 보안 사령부.

중앙 정보부 차장 김재국과 보안 사령관 전두호라는 기관의 우두머리들이 대통령 암살 사건에 깊이 연루되고 말았다.

“계엄법에 따라 육군 참모 총장이 계엄 사령관이 되었고, 그와 군 세력이 사건에 개입했어.”

신지수가 몸이 단 이유였다.

“이세후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어찌 될 것 같나? 이 나라에 제2의 군부 세력이 들어서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보 기관은 살아 있어서 견제를 해 줘야 해.”

이세후는 군대 정비에만 힘쓰겠다고 이미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신지수는 모른다.

중앙 정보부가 공중 분해되면 그 기관의 우두머리인 신지수는 어찌 되겠나.

그것이 가장 걱정인 신지수였다.

“도와주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시국을 바꿀 사람은 자네뿐이야.”

안정우가 들고나온 모든 것들은 실제 태수가 들고 있던 것이다.

그 말은 안정우와 태수는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이 많다는 뜻이다.

또한 이세후가 안정우를 직접 소개했다.

태수가 이세후까지 움직였다는 소리다.

‘중앙 정보부의 생존 여부는 이세후 손에 달렸다. 하지만 당장 나는 이세후와 닿은 끈이 전혀 없어. 여기 앉아 있는 강태수를 제외하고는 전혀 손 쓸 방도가 없으니.’

군에서 나온 중앙 정보부 요원들은 꽤 된다.

하지만 그들이 육군 참모 총장과 인연이 있을 리가 있나.

더구나 육군 참모 총장 이세후는 군에 틀어박혀 잘 나서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세후의 관심사는 오로지 군부대뿐이었으니까.

“이 나라를 위해서 중앙 정보부의 붕괴는 막아야 하지 않겠나?”

신지수가 고개를 숙였다.

“자네의 도움은 절대로 잊지 않겠네.”

신지수는 알까?

이 모든 것이 태수가 짜 놓은 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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