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꿇어(1)
‘강태수 말이 맞다. 살길이 보이질 않아. 외통수도 이런 외통수가 없지.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몰렸다.’
중앙 정보부에 끌려온 이상 정해진 결말이었다.
한청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든 강태수를 붙들고 늘어져야 살 수 있다는 직감.
그러기 위해서는 강태수가 원하는 것을 채워 줘야 하지 않겠나.
“계열사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날 찾아왔지? 내게서 뭘 얻어 가고 싶은 거냐? 설마…….”
역시 그것인가?
현재의 청일과 한청호를 만든 보물.
“치부책을 원하나?”
한청호의 치부책.
한청호가 내어 줄 수 있는 가장 큰 물건이다.
한청호는 태수의 기색을 살펴보느라 눈을 번뜩였다.
‘거래의 기본은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의 가치를 높여 상대방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지. 강태수를 흔들어야 살길이 열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껏 숨겨 왔던 치부책의 존재를 드러내었다.
살고 싶었다.
아주 간절하게.
‘하지만 속내를 드러내서야 이 협상에서 약자를 자처하게 될 뿐이다.’
한청호는 일부러 여유를 가장했다.
“내가 재벌 총수 노릇보다 더 인정받는 분야가 뭔지는 너도 잘 알 테지.”
“정치, 로비, 뇌물, 이간질, 음모, 함정, 선동, 모략. 죄다 비겁하고 더러운 것뿐이군요.”
“알고 있으니 대화가 쉽겠어.”
하지만 속은 바싹바싹 탔다.
말 그대로 벼랑 끝에 몰렸기 때문이다.
강태수가 살길을 터 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떨어지고 마는 절벽 위에 서 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치부책의 존재를 밝혔다.
생사의 기로에 놓이지 않았다면 절대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카드였다.
이거라면 강태수도 혹할 것이리라 자신했다.
“내가 갖고 있는 치부책은 단순히 뇌물 장부나 권력자 약점을 잡은 것이 아니야. 제목이 치부책이지 내용은 전혀 달라. 지금의 청일이 있게 된 기반이다.”
치부책(恥部冊).
남에게 들키기 싫은 부끄러운 부분을 적어 놓은 책이다.
하지만 내용이 전혀 다르다면 대체 무엇을 적어 놓은 책이란 말인가.
‘한청호의 치부책이라. 전생에서 끝내 볼 수 없었던 극비 중의 극비가 튀어나왔군.’
태수는 그게 보통 물건이 아니란 것을 안다.
경영에 영 재주가 없는 한일권마저도 치부책의 도움을 받아 회장 자리를 지켰을 정도니까.
한청호가 은근하게 말했다.
“이것은 정치인들을 공략하는 물건이 아니야. 이건…….”
“내게 정치인들을 공략할 약점이나 뇌물 장부가 있어서 뭐하겠습니까? 내가 정치할 것도 아닌데.”
태수는 말려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건 당신의 치부책이 아니어도 충분합니다. 나 역시 그 정도 수완은 있습니다.”
수완으로 따지면 한청호보다 태수가 한 수 위가 아니던가.
한청호는 태수를 다시 한번 설득하고자 했다.
태수의 욕망을 부채질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만뒀다.
‘웃고 있잖아?’
눈치 빠른 한청호는 태수의 반응 차이를 확인했다.
한청호는 경악했다.
비명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너무 동요한 나머지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내 치부책을 알고 있어?”
전생에 송 비서가 가르쳐 줬다.
절대로 한청호 부자의 비밀을 탐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그것이 태수의 목숨과 쓸모를 연장시켰다.
‘하지만 그뿐이었지. 결국 끝은 정해진 것이었으니.’
토사구팽.
사냥을 끝낸 사냥개는 삶아지듯, 청일이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가 되자 태수는 죽어야 했다.
“말도 안 돼!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그 비밀을? 어떻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보다 중요한 게 있을 텐데요.”
태수는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쳤다.
한청호는 그제야 정신을 수습했다.
“당신 목숨. 그게 최대 관심사 아닙니까?”
한청호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태수를 흔들어 보겠다고 나섰다가 괜히 한청호만 말리고 말았다.
태수는 처음처럼 여유만만 태연자약할 뿐이었다.
“치부책? 나랑 거래하겠다고 꺼낸 말이 아니잖습니까. 날 떠보려고 꺼낸 말이지.”
한청호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치부책은 태수가 아니라 한청호의 욕망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아내와 아들에게도 입 한 번 벙긋하지 않던 것을 순순히 내어놓겠다고?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겁니까?”
태수는 코웃음 쳤다.
“줄 생각도 없는 물건, 돼도 않는 소리는 이쯤 하지요. 그래 봐야 당신이 이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한청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넌 정말 내 패를 전부 알고 있었구나. 그럼 대체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냐?”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내가 당신을 찾아온 이유. 알고 있잖아?”
“살길을 열어 주러 왔다는 거냐?”
살길을 열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태수가 원하는 건 청일 계열사도 아니고, 치부책도 아니다.
태수의 차가운 눈이 한청호에게 내리꽂힌다.
그 노골적인 요구를 한청호가 어찌 모르겠나.
“굴복… 을 요구하는 거냐?”
“당신의 끝은 이미 예전에 정해졌지. 변수가 있다면 오직 내 결정 하나만 남았군.”
강태수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군.
한청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살고 싶다면.”
태수가 딱 잘라 말했다.
“꿇어.”
강태수의 차가운 말이 한청호의 치욕을 부채질한다.
“그리고 빌어.”
한청호의 두 손이 덜덜 떨렸다.
한청호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달리 살아남을 방법 있나?”
없다.
증거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대통령 암살 미수 및 영부인 저격 피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중앙 정보부에 끌려온 상황이 아닌가.
반역죄라는 뜻이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이 국민들 앞에 폭로되었으니 빠져나갈 길은 없다.
강태수의 말처럼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는 자신을 제물로 삼아 위기를 모면하려고 할 것이다.
‘외통수. 그것도 정말 더럽게 걸렸구나.’
이미 한청호는 청일 호텔 VIP룸에서 박정환과 마주했을 때 알았다.
끝났다는 것을.
박정환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꿈꿨다.
이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하지만 강태수가 나타나 그 작은 희망마저도 부숴 놓는다.
“나를 굴복시켜서 넌 무엇을 얻을 수 있지?”
이해할 수 없는 요구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업가이자 재벌 기업의 총수이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목숨과 맞바꾸는 대가가 내 굴복이라고?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
한청호는 지금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청일이라는 대한민국 재계 13위의 기업이 아닌가.
돈, 보석, 부동산, 주식, 인맥과 치부책까지.
눈에 보이는 건 물론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뜯어내려고 작정하면 양껏 뜯어낼 수 있다.
먹음직스러운 먹이, 지금 한청호의 위치였다.
“강태수, 너는 대체 왜 내게 굴복을 요구하는 거냐? 날 무릎 꿇려서 뭘 얻겠다고…….”
한청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다. 차라리 이해득실을 따진다면 나 역시 그에 맞게…….”
태수는 한청호의 말을 딱 잘랐다.
“착각하고 있군. 난 지금 이 전쟁의 승리자로서 당신 목숨을 처분할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거야.”
한청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당신에겐 내 결정에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어. 물론 납득할 필요도 없다.”
태수는 웃고 있었다.
“굴복이냐, 버티기냐. 삶이냐, 죽음이냐. 이 문제에 이해득실 따윈 없다.”
복수는 원래 이해득실 따지면 할 수 없는 거야.
험로를 걸은 내 결심이 이제야 결실을 하나씩 맺고 있는데.
내가 받았던 그 고통과 치욕을 이제야 되돌려 주는 참인데.
그 즐거움을 어찌 값으로 따질 수 있겠어. 안 그래?
“쉽잖아, 내가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 죽음을 앞둔 패자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던가?”
한청호는 생사의 갈림길에 섰으니 그게 막다른 곳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다른 곳에서도 더 추락할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태수, 넌 지금 내게 밑바닥을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건가?”
“왜? 지금 이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것이 있나? 그게 목숨보다 더 중요한가?”
“강태수! 나더러 자존심을……!”
“윗선에 뇌물 건네고 아부하기로 결심하면서 제일 먼저 버린 것이 당신 자존심이지. 내가 지금 그걸 요구하겠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속지 않는다.
일부러 돌린 화제를 다시 정면으로 되돌려 놓는다.
한청호는 탄식했다.
“그래, 네가 꺾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내 자존심이 아니야. 넌 내 신념을 꺾으라고 하고 있어.”
“신념. 세상 풍파에 가장 먼저 부러지는 것이라지? 그렇기에 끝까지 지켜 냈을 때 비로소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라지?”
박정환이 그리 말했다.
태수가 기어이 무릎을 지켜 내자 박정환이 감탄하며 인정해 주었을 정도였다.
“정치인들에게 뇌물 먹이고 아부하는 것? 남들은 손가락질해도 당신은 그게 부끄럽지 않았을 테지. 그건 당신 신념에 따른 행동이니까.”
-권력과 이권을 얻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 한청호의 신념이다.
아부와 로비에도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사탕발림으로 위선을 꾀어내고, 뇌물을 듬뿍 먹여 유착 관계를 고착화시킨다는 것.
정치와 경제가 하나로 출발하는 이 시대에서 살아남는 한청호의 신념이었다.
“청일을 지키기 위해서, 청일을 키우기 위해서, 당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당신은 자존심 따위는 진즉 내다 버렸잖아. 그딴 걸 이제 와서 내가 요구할까?”
자존심을 버리고 나니 입안에 든 혀처럼 비위 맞추는 건 더욱 쉬웠다.
그에 따라 떨어지는 권력과 이권은 자존심보다 달콤했다.
“내게 무릎 꿇고 빌어. 그렇다면 승자는 관용을 베풀어 당신의 목숨을 살려 주지. 그게 내가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야.”
결국 말하는 바는 하나다.
“당신의 신념.”
그래서 태수는 한청호의 신념을 요구한다.
“꺾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
한청호에게 인간의 존엄성보다 더 근원적인 것.
지금의 한청호를 버티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
신념이었다.
잔인한 요구였다.
“당신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 무릎 꿇는 게 아니야. 신념을 꺾는 대가로 연명하게 되는 것이지.”
한청호는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도망갈 길을 완전히 막아 버리는군. 신념을 꺾는 대가가 목숨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처절한 패배의 결과였다.
‘한 번 꺾인 신념은 절대로 바로 세울 수 없다. 내가 이번에 강태수에게 무릎 꿇으면 다시는 재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잔인한 놈이.’
한청호는 깨달았다.
“중앙 정보부에 끌려왔는데도 여태 고문 한 번 받지 않은 까닭을 알겠군. 강태수, 네가 손을 썼나?”
“물론.”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이리 몸 성히 있을 수 있었겠나.
“고문이란 핑계를 대며 도망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한다는 뜻이냐?”
“그래.”
“멀쩡한 몸과 멀쩡한 정신, 멀쩡한 신념을 가진 채로 날 꺾어 버릴 생각이었나?”
“당연하지.”
한청호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확인 사살 같은 태수의 말.
“멀쩡한 상태 그대로, 오만한 자부심과 개 같은 성질 그대로. 그게 아니라면 내 성에 찰 리 없다.”
한청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날 밑바닥까지 부숴 놓겠다는 일념 하나로 박정환과 전두호, 차기범까지 끌어들여서 죽여 없앴구나. 혹여 날 비호하여 살려 줄까 봐. 변수를 없앴던 거였어.”
“잘 알고 있군.”
부르르.
한청호는 소름이 돋아서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절대 권력의 박정환을 고꾸라뜨린 게 고작 나를 저격하기 위해서라고?’
말해 놓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대체 이놈은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태양 그룹을 몰락시키려고 했던 것이 이렇게 되돌아왔나.
어디서부터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궁금했었지. 내게 왜 굴복을 요구하는 것인지, 날 무릎 꿇려서 뭘 얻겠다고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넌 내게서 뭘 얻어 내려고 이러는 게 아니야. 내가 가진 것을 부숴 버리기 위해서 이러는 거지.”
“맞다. 그러니…….”
태수는 오만하게 한청호를 내려다봤다.
“꿇어.”
한청호는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