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인생 한 방(3)
기자 회견장은 발칵 뒤집혔다.
청일 호텔 VIP룸에 있었던 일을 편집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반란군의 총소리가 들린다.
박정환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나오자 다들 숨소리까지 참아 가며 집중했다.
-누가 시작했어? 두호냐? 아니면 기범이냐?
-저 총성을 보게. 무기는 어디서 반입했을까? 대통령인 내가 있는 자리에서 장성을 쏘았다는데, 이것을 어찌 해석해야 하나?
전두호의 목소리도 나왔다.
-뭐해! 쏴! 이 새끼부터 죽여야 우리가 산다!
탕- 탕-
-무장한 오성회 회원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내 자네를 일등 공신으로 삼지. 나 전두호, 배포 크게 베푸는 사람이야.
-차기범을 죽인 건 결국 너야. 배신자는 차기범이 아니라 박정환이라고. 나 역시 그런 꼴이 될 텐데 무슨 짓을 못해?
-오성회가 오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넌 죽어! 내가 죽어도 넌 죽는다! 어디 같이 죽어 보자, 이 시팔 새끼야!
그날의 급박한 상황이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전국 생방송을 하는 방송국 아나운서와 라디오 DJ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입을 막았다.
그렇지만 흥분한 기자들이 내지르는 비명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반란이다! 군과 대통령 경호실이 주도했어!”
“박정환 대통령이 차기범 비서실장을 죽였구나!”
“전두호 보안 사령관이 오성회와 함께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어!”
통제 불가능할 만큼 기자 회견장은 발칵 뒤집혔다.
현장에 있던 음향 감독은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방송사고 났잖아! 마이크 좀!”
“마이크를 끄면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도 방송에 내보낼 수 없습니다.”
“젠장! 차라리 마이크를 스피커에 바싹 갖다 대! 잡음을 조금이라도 줄여봐!”
이 모든 혼란 상황은 여과 없이 생방송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
이세후가 마이크를 들었다.
“들으셨다시피 이날 차기범과 전두호 및 오성회 군 간부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작고한 박정환 대통령의 마지막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재국, 너도 배신이냐?
-배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처단하는 건 애국이다.
김재국이 박정환을 죽이며 읊는 말과 총성도 고스란히 담겼다.
이번엔 방송국과 신문 기자들이 아예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결과였기 때문이다.
‘매국노?’
‘박정환이 나라를 팔아먹어?’
‘중앙 정보부 차장 김재국이 박정환을 죽인 이유가 나라를 위해서라고?’
기자 회견장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이세후는 이들을 덮친 충격이 지나가길 잠시 기다려 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작고하신 박정환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데,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에 대한 부분을 들어 보시죠.”
이세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7 광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신이 죽으면 밀약 조건은 충족되지 않는다지? 일본은 대한민국이 아닌 박정환 개인에게 50억 달러를 지급하는 대가로 제7 광구 소유권을 주장하기로 했으니까.
기자 회견장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봤다.
“밀약이라니? 이게 다 무슨 말이야?”
“일본이 왜 박정환 개인에게 50억 달러를 줘?”
“제7 광구는 우리가 영유권을 갖고 있는데?”
기자 회견장은 난장판이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고, 기자들은 너도나도 수첩에 적기 바빴다.
목청을 높여라 질문을 퍼부어 대는 기자들.
생방송 음향을 조절하느라 진땀을 빼는 방송국 사람들.
이세후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빙그레 웃는다.
“목숨 걸고 박정환의 매국 행위를 밝혀낸 민주 투사가 있습니다. 바로 동방일보를 인수하고 지라시를 배포한 신문사 사장님이죠.”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안정우 씨입니다.”
안정우가 단상으로 올랐다.
손에는 태수가 쥐여 준 제7 광구에 대한 서류를 들고 있는 채였다.
또한 박정환의 금고에서 나온 친일파 재산 목록도 함께였다.
그의 등장에 다들 흥분해서 카메라부터 들이밀었다.
“찍어!”
“손에 들고 있는 서류도 찍어!”
“녹음기 켜!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적어!”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안정우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면서 서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박정환의 매국 행위에 대해 낱낱이 밝히겠습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정치권에 대형 슈퍼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이세후가 주도한 합동 수사 본부의 기자 회견.
생방송 전파를 타고 전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길 가던 사람들은 전파상 텔레비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충격적인 상황에 모두 아연실색했다.
“이런 미친!”
“아주 개판이었네!”
“시팔! 이런 개새끼들!”
라디오를 틀고 운전하던 운전자들도 차를 길옆에 세우고 볼륨을 높였다.
나오는 것 역시 욕뿐이었다.
“이런 쳐 죽일 매국노 새끼!”
“박정환이나 전두호나! 다 똑같은 새끼들이!”
국민의 분노는 박정환에게, 관심은 안정우에게 쏠렸다.
“안정우가 대체 누구래? 어떻게 이걸 캐냈대?”
“동방일보 광고 탄압 때 신문사를 인수하고 지라시를 펴냈대!”
“박정환이 죽자마자 동방일보도 다시 나오고 있잖아.”
“집안 대대로 뼈대 깊은 독립군이었대.”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독재 군부가 타도된 마당에 새로운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야 할 텐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어. 똥 같은 독재 잔재들이 정권을 잡으면 안 되지.”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될까?”
“안정우 어때? 그 사람, 친일파 척결 공로가 대단하다던데.”
안정우라는 이름이 전 국민의 뇌리에 새겨졌다.
-매국노 잡는 사냥꾼!
-친일파 잡는 민주 투사!
-동방일보의 새로운 사장!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안정우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방송국과 신문사를 가지고 있는 재벌들의 솜씨였다.
태수가 명함을 휘두른 결과이며 삼청이 뒤에서 손을 쓴 효과이기도 했다.
* * *
중앙 정보부 지하실에도 텔레비전이 나온다.
금산 호텔 기자 회견장에서는 오늘도 이세후가 수사 결과를 중간보고한다.
요즘 합동 수사 본부 기자 회견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모른다.
최고의 시청률을 연일 갈아엎을 정도였다.
순간 시청률은 무려 81%를 기록했을 정도다.
캐도 캐도 끝이 없이 나오는 VIP룸의 비밀.
이세후는 기자 회견을 열 때마다 새로운 이슈를 던져 메마른 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오늘의 이슈는 박정환과 한청호였다.
-간도 크게 내 아내의 재산을 뜯어냈을 뿐만 아니라 내 금고까지 털어서 팔아 치워? 뭐에 썼어?
-돈의 사용처도 확인했습니다. 결혼식을 위한 내부 인테리어, 그리고 오성회 군자금. 이상입니다.
-한청호! 암살범과 네놈이 만날 일이 뭐가 있나!
-한청호는 오래전부터 각하의 암살을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끼 끌어내. 중앙 정보부 취조실로 끌고 가.
-각하! 각하!
-그놈 입부터 틀어막고 끌고 가.
한청호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쾅. 쾅쾅. 쾅.
커다란 취조 테이블이 들썩일 정도였다.
한청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댔다.
“내게 굳이 이런 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뭐냐? 강태수!”
한청호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매섭게 노려봤다.
태수는 태연자약하게 의자에 앉아 웃고 있었다.
“상황 파악 똑바로 하시라고.”
태수가 한청호를 내려다본다.
“중앙 정보부의 대접이 너무 극진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강태수!”
“중앙 정보부에 뒷돈을 많이 먹였나 봅니다.”
한청호 특기가 위아래로 뇌물 뿌려서 로비하기다.
중앙 정보부라는 막강한 권력에 뇌물 살포를 안 했을 리가 있나.
“아직까지 고문 한 번 안 받은 것 같군요. 혈색이 아주 좋습니다.”
“누가 감히 날 고문한단 말이냐?”
“중앙 정보부에서 사람 봐 가며 칼 듭니까?”
“난 청일의 한청호야! 두고 봐라. 난 이곳에서 나가 반드시 네놈을 죽일 것이다!”
“당신이?”
“그래, 이제 넌 가족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할 거야. 내 목줄을 푼 건 너야!”
박정환 암살과 관련된 증거들을 풀었으니 한청호도 거리낄 것 없다는 소리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그거야 당신 생각이고. 세상이 당신 생각처럼 만만하던가?”
태수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친다.
“당신, 중앙 정보부에서 못 나가고 있잖아.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만나는 거 아닙니까?”
한청호는 이를 갈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지?”
“자업자득이죠. 아닙니까?”
한청호가 이곳에 끌려온 이유는 ‘대통령 암살 미수 및 영부인 저격 피살 사건의 배후’였다.
“문세기가 이미 죽은 마당이야. 사건 종료된 일로 날 어찌할 수 없어. 증거 있어?”
“중앙 정보부가 언제부터 증거 따졌답니까?”
그건 태수도 알고, 한청호도 아는 일이다.
오죽하면 중앙 정보부에 끌려가면 몸 성히 살아 돌아올 기적을 바라지 말라는 소리가 나올까.
“중앙 정보부 부장 신지수는 내가 오랫동안 뒤를 봐줬다. 그놈이 지금 그 자리에 어떻게 올라간 줄 아나?”
한청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쿵 친다.
“나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어! 중앙 정보부 부장 자리 따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갑을 판단이 안 됩니까? 당신은 중앙 정보부에 잡혀 있고, 당신 목줄은 그자가 쥐고 있지.”
태수가 얄밉게도 웃는다.
“중앙 정보부장 신지수가 당신을 꺼내 주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즉에 나왔을 텐데.”
한청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끈 떨어진 연을 누가 신경이나 써 준답니까? 이젠 그만 인정하시지. 당신은 끝났어.”
“아니야!”
“박정환이 직접 당신을 암살 배후로 지목했고, 중앙 정보부에 끌고 가란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이야.”
태수가 굳이 한청호에게 텔레비전을 보여 준 이유다.
“중앙 정보부장 신지수가 위험을 떠안고 당신을 놓아줄까? 천만에.”
안 그래도 한청호를 외면하던 신지수가 아닌가.
“여론이 불리하게 형성되었으니 신지수는 국민들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 당신을 제물로 바칠 거야. 당연한 수순이지.”
중앙 정보부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기 전에 결과를 내놓는다.
안 그래도 대통령 암살 사건에 중앙 정보부가 얽혀서 골치 아픈 참이다.
신지수는 기꺼이 한청호를 토막 낼 것이다.
한청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게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날 비난하고 조롱하기 위해서 찾아온 건 아닐 텐데. 강태수, 넌 용건 없이 움직이는 자가 아니야.”
한청호의 말이 맞았다.
“무얼 원하나?”
한청호는 확신했다.
“넌 내게서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가져갔지. 이번엔 어떤 계열사를 내주랴?”
한청호는 금산 호텔에서 치욕스럽게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강제로 빼앗겼다.
그때 느꼈던 굴욕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자다가도 그때 생각만 나면 이불을 걷어차곤 했으니까.
“넌 그때도 날 구석으로 몰아넣었지. 네 손을 잡지 않으면 살길이 안 보이도록. 철저하게 내 숨통을 틀어막았다. 바로 지금처럼.”
박정환과 한청호의 관계를 이용해서 외통수를 갈겼다.
영부인과 얽힌 사진과 필름 때문에 눈 뜨고 청일 중장비를 빼앗겼다.
계열사 전체에서 긁어 온 적자까지 고스란히 되돌려 받았다.
“골라. 내어 주지. 그걸로 내 목숨을 사겠다.”
하지만 태수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한청호는 어쩔 수 없이 판돈을 올려야 했다.
“청일 일보, 청일 제화, 청일 방직, 청일 식품.”
반응이 없다.
“아니면 네가 갖고 있는 계열사의 덩치를 키워 주랴? 청일 목재, 청일 창호, 청일 중석. 어떤가? 아니면 청일 시멘트?”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하기야,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 맛을 본 놈이 이런 시시한 계열사를 탐할 리가 없지.”
한청호는 크게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청일 상사, 청일 유통, 청일 화학. 이 중에서 골라. 더는 안 돼.”
딱 잘라 말하는 한청호.
태수는 피식 웃었다.
“내가 그깟 계열사 때문에 왔다고 생각합니까?”
“허, 욕심도 많군. 하나 가지고는 성에 안 찬다는 말이구나. 좋다, 두 개.”
“당신 계열사는 내가 알아서 가져갑니다. 당신이 챙겨 주지 않아도.”
시작은 청일 자동차.
그다음은 청일 해운을 먹어 보려고 한다.
“웃기지 마! 그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내가 내어 주지 않으면…….”
“귀찮은데 전부 부도내 버릴까? 청일 그룹 전체를.”
“강태수!”
“내가 못할 것 같습니까? 아니면 내가 공갈을 치는 거라 생각하십니까?”
저 말이 진심이라는 게 무섭다.
한청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