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인생 한 방(2)
‘인생 한 방이라. 저렇게 말하지만 삼청 그룹이 올인할 리가 있나.’
현재 대선을 준비하는 김종표, 김영상, 김대준과 접촉했을 것이다.
또한 계엄 사령관인 이세후에게까지 좋은 제안을 건넸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삼청이라면 크게 한 번은 베팅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중립적인 처신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마련이지. 그래서는 1등을 지켜 낼 수 없어.’
그 베팅이 정치인이 아닌 태양 그룹이라는 게 의아할 뿐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삼청이 적으로 돌아서는 것보다 내 편이 되는 게 낫지.’
태수는 한 가지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건 이건후 이사님 개인적인 뜻입니까?”
“삼청 그룹 전체의 뜻입니다.”
삼청 그룹 전체의 뜻을 논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닌데.
이건후가 당당하게 품에서 푸른 명함을 꺼낸다.
아버지 이병춘의 것과 비슷한지만 조금 다른 명함이었다.
“오늘부로 TBS 동인 방송국 이사 자리는 그만뒀습니다. 내일부터 본사로 출근할 겁니다.”
“본사? 그렇다면…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삼청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작별 인사는 제게도 해당됩니다.”
이건후가 태수에게 내어 준 명함.
<삼청 그룹 부회장 이건후>
그룹 부회장의 새로운 명함이었다.
‘전생과 다르다. 이건후는 TBS 동인 방송 이사를 맡다가 79년에야 삼청 그룹 부회장이 되었는데.’
이후 아버지 이병춘이 사망한 87년 그룹 회장에 올라섰었다.
‘그런데 벌써? 아직 시기가 이른데.’
이건후는 말했다.
“아버지는 적어도 5, 6년은 더 기다려 그룹 후계를 정할 생각이셨다고 하셨습니다. 남자 나이 마흔은 되어야 무게가 생긴다면서요.”
그랬을 것이다.
전생에서 이건후는 38살로 그룹 부회장이 되었다.
그때도 후계자 경영권 승계는 너무 이르다며 걱정했던 이병춘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엔 이건후 나이 고작 34살에 경영권을 넘겨받는다.
평소 이병춘의 뜻과는 다른 결정이었다.
‘대체 왜 이런 변화가…….’
태수는 깨달았다.
‘박정환이 죽었기 때문이군. 전생과 다르게 박정환 정권이 일찍 막을 내리면서 삼청 역시 후계자의 경영권 승계 시기를 앞당겼어.’
태수가 시작한 역사의 변화는 삼청 내부의 변화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이건후는 다른 말을 한다.
“시대가 바뀐 것도 한몫했긴 합니다만, 아버지께서는 강 회장님을 만난 후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만나고 말입니까?”
“27살의 젊은 총수는 그 자체가 파격이라고 하시더군요. 젊기에 시도할 수 있는 혁신, 젊기에 달려들 수 있는 도전, 젊기에 내지를 수 있는 패기. 그걸 아주 높이 사셨습니다.”
태수는 이병춘 회장이 먼저 악수를 청했던 것을 떠올렸다.
“강 회장님은 어린 나이에도 재벌 그룹을 잘 이끄는데, 그간 편견으로 제 가능성을 낮춰 보았다고 반성하셨지요. 덕분에 제가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건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서 삼청 그룹 총수 이병춘 회장이 겹쳐 보였다.
“아버지께서 제게 삼청의 혁신을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 회장님.”
태수가 가르쳐 준 ‘혁신’이란 단어는 이건후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후다.
태수가 그 손을 잡았다.
“삼청의 미래가 기대되는군요.”
전생에서 오랫동안 청일과 삼청은 재계 1위를 두고 다퉜다.
이건후가 태수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때 비서 송창준이 태수 곁에 슬쩍 붙었다.
“회장님, 태양 아파트 준공 떨어졌습니다.”
기다리던 소식이 빨리도 왔다.
대통령 권한 대행 김종표가 약속한 일이었다.
계엄이 발동된 이점을 살려 속전속결로 마무리된 모양이다.
옆에 있던 이건후가 축하를 건넸다.
“차일피일 미뤄지던 태양 아파트 준공 검사가 통과되었군요. 죽은 차기범이 아파트 준공을 막고 있었죠? 청일의 청탁으로 알고 있는데요.”
삼청 그룹의 정보력이 참 대단하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아무리 차기범 죽었다고 해도 이렇게 금방 준공이 떨어질 리가. 윗선에서 크게 한탕 해 먹으려고 혈안이 되었을 텐데, 누구를 통하셨습니까?”
삼청 그룹이 그런 정보를 모를 리가 없다.
아마도 태수가 밀어주는 정치인을 떠보려는 속셈이 틀림없을 터.
“3천만 원짜리 준공입니다. 싸게 먹혔죠.”
태수는 빙그레 웃었다.
태수는 송창준에게 지시를 내린다.
“내일부터 태양 그룹 홍보실이 바빠져야겠군요.”
“태양 아파트 분양 홍보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문에 광고 넣고, CF 방영 빈도를 늘리고, 분양 전단을 뿌리고, 꾼들을 모집하십시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이건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꾼? 사기꾼?”
“아뇨, 아파트 분양 전문가. 전 떴다방을 만들 생각입니다.”
“떴다방이요? 그건 뭡니까?”
속칭 떴다방.
아파트 분양 현장 주변에 철새처럼 모여드는 이동식 중개 업소를 일컫는다.
주로 무허가 중개 업소들이 아파트 모델 하우스 인근에 가건물이나 파라솔 등을 설치하여 손님들을 끌어모은다.
이러한 변칙 거래는 2003년 분양권 전매 금지 이후 불법 행위로서 단속 대상이다.
‘하지만 모델 하우스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지금은 불법 행위라고도 볼 수 없지.’
떴다방은 90년대를 주름잡던 아파트 분양 전략 중 하나다.
70년대인 현재에 부각된 전략이 아니었다.
“돈 냄새 나는 곳에는 똥파리도 꼬이고, 투기꾼도 몰려드는 법이죠.”
그래서 태수는 자신할 수 있었다.
“전국에 있는 분양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을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돈 냄새부터 풍겨 대야겠지.
태수가 송창준에게 지시를 내렸다.
“판매 수수료를 넉넉히 챙겨 주세요. 그러면 돈 냄새를 쫓아 꾼들이 앞다투어 몰려들 겁니다.”
“수수료를 얼마나 책정할까요?”
“기본에서 추가 100만 원씩 올려서.”
지금 10만 원은 2020년 기준으로 250만 원 정도다.
거기에 한 채당 100만 원이나 더 얹어 주란다.
“그렇게나 많이요?”
“그래야 눈에 불을 켜고 아파트 판매에 달려들 것 아닙니까.”
“그냥 한 채당 10만 원만 더 붙여 줘도 좋다고 할 것 같은데요.”
송창준은 제 돈이 아님에도 아까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런데도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장님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겠죠.”
송창준의 눈에는 신뢰와 존경이 가득했다.
태수는 송창준에게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이건후는 그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당히 특이한 관계다. 비서가 강태수를 존경하는 게 눈에 보여. 이런 경우는 처음인 것 같은데?’
금산의 김 비서는 장준용과 오래된 친구 사이로, 걸핏하면 잔소리를 하거나 때로는 한심하게 보곤 한다.
청일의 박 비서와 송 비서는 한청호를 매우 두려워했다.
삼청의 최 비서는 선을 딱 잘라서 절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기계처럼 지시를 따를 뿐이다.
‘가장 곁에 붙어 있으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지켜보는 비서에게 이처럼 존경받는 회장이 있었던가?’
없다.
이건후의 기억에 있는 무수한 재벌 회장과 비서의 관계가 떠오른다.
하지만 저렇게 존경, 믿음으로 무장한 채 성심성의껏 따르는 비서는 없었다.
이건후는 태수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구태여 그렇게까지 웃돈을 얹어 주는 이유가 뭡니까? 태양 아파트는 드라마와 광고 덕분에 워낙 이미지가 좋아서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팔릴 것 같은데요.”
“푼돈에 연연하면 안 됩니다.”
태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최단 기간, 최고 가격, 최고의 경쟁률 속에서 아파트를 완판하는 것입니다.”
무려 네 가지의 조건이 붙었다.
거기에 기본적인 조건이 더 있다.
“대한민국 최고급 프리미엄 아파트입니다. 브랜드 하나를 제대로 만드는 일이고, 국민들의 인식 자체를 바꾸는 어려운 일입니다.”
태수가 채당 추가 100만 원이라는 웃돈을 얹어 주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
아직까지는 빈민들의 주택 대체제로 닭장이라는 이미지를 쓰고 있는 아파트가 아닌가.
드라마에서 연일 화려한 회장님 이미지를 덧씌워도 뿌리박힌 인식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이겠나.
하지만 드라마의 성공으로 달라진 점이 한 가지 있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양 아파트가 팔릴까, 의구심을 가진 채 지켜보고 있습니다.”
간을 보기 시작했다는 건 좋은 징조다.
“고급 아파트를 덜컥 살 수 있는 자산가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샀으니 전망이 밝습니다.”
원래 관심이 몰리는 곳에 사람이 몰린다.
그리고 사람이 몰리는 곳엔 자연히 돈이 몰리는 법.
“이번 분양의 성공은 추가 분양의 성공을 예약합니다.”
한청호의 청일 아파트에 맞춰 분양 규모를 줄였다
남은 공터에 방송국 촬영 스튜디오 겸 모델 하우스를 지었다.
그렇게 분양 일정이 앞당겨졌다.
“최고의 광고는 성공 실적, 그 자체입니다.”
태수가 이번 분양에 사활을 거는 이유였다.
“우리는 반드시 이번 태양 아파트 1차 분양을 성공해야 합니다.”
송창준이 환하게 웃는다.
“역시. 회장님께 큰 뜻이 있으실 거라 믿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송창준은 야무지게 대답하면서 재빨리 수첩을 꺼내 적기 시작한다.
태수의 지시 사항을 빠짐없이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이건후가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었다.
‘어째 존경심이 한껏 솟아난 모양인데, 아주 광신도가 따로 없네.’
왠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시 스케줄을 끝내자마자 이미 퇴근하고 없는 최 비서가 야속하기만 하다.
이건후의 말을 귀담아듣기는커녕 농담 한마디라도 하면 차갑게 외면하던 최 비서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디서 저런 비서를 얻으셨습니까?”
“사우디에서요.”
“……?”
사우디에서 외교관을 맡고 있던 송창준을 알게 됐고, 송 비서가 심혈을 기울여 교육했다.
이건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한국인 아니었습니까?”
사우디 사람치고 한국말을 엄청 잘하네요.
* * *
금산 호텔 회의실.
기자들이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생방송으로 전국에 생중계할 방송국 관계자들까지 전부 총집합했다.
“텔레비전 방송뿐만 아니라 라디오 생방송까지 할 줄이야.”
“그뿐이겠어요? 신문 기자들은 아주 떼거리로 몰려왔다고요.
정치부는 물론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에 국제부 기자들까지 죄다 몰렸다.
“보통 일이 아니니까.”
“하기야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사안이니 오죽하겠어요.”
금산 호텔의 홀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여는 기자 회견이다.
“이세후 합동 수사 본부장이 중대 발표를 한다면서요?”
“저기 온다. 준비해.”
회의실 입구에서 육군 참모 총장이자 계엄 사령관이며 또한 대통령 암살 사건 합동 수사 본부장인 이세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사방에서 번쩍이는 빛을 무시하고 이세후가 단상에 올랐다.
마이크를 조정하면서 기자들을 둘러본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대통령 암살 사건 합동 수사 본부장인 이세후입니다. 국민 여러분들께 수사 진행 도중에 알게 된 중대한 사안에 대해 발표하고자 합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먼저 녹음된 음성을 들어 보겠습니다.”
이세후가 손짓하자 참모장이 녹음기를 틀었다.
스피커를 통해 금산 호텔 회의실 가득 울려 퍼지는 목소리.
작고한 박정환 대통령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