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인생 한 방(1)
안정우는 피식 웃었다.
“정치적 기반도 없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나.”
국회 의원에서부터 차근차근 인지도를 높인다.
그 이후 굵직한 국정 운영 자리를 꿰차고 당내에서 세력을 확보한다.
그렇게 나가는 정치 인생의 마지막 끝이 바로 대선이었다.
“박정환이 김종표와 함께 4대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모아 놓은 세력이 있잖습니까.”
공화당.
박정환이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엄청난 뒷돈을 들여 만들어 놓은 세력이 고스란히 남았다.
태수는 제7 광구에 관한 한일 협정 서류를 흔들었다.
“박정환이 이걸 남기고 죽으면서 그들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김종표가 이걸 갖겠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박정환과 함께 얽혀 매국 혐의를 받게 되지 않을까 염려될 것이다.
그들의 부정부패 사건과 정치 공작이 수면에 드러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김종표는 이 일을 덮으면서 그들을 휘어잡을 생각일 겁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그건 안 돼. 절대로 덮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어르신은 고작 50억 달러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행적이 이대로 역사 속에 묻히게 되는 것을 두고 볼 참이십니까?”
안정우는 술을 단번에 마셨다.
“야당에 거물이 있다. 25살에 젊은 국회의원이 된 김영상과 그와 정치적 동지로서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김대준이 있다.”
이미 태수를 다녀간 사람들이다.
“박정환이 만든 여당 세력은 거대합니다. 야당이 이를 뒤집으려면 71년 대선 후보 경합처럼 한 사람이 양보를 해 주어야 합니다.”
71년 대선을 두고 신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1차 투표는 김영상이 이겼다.
하지만 2차 투표는 3등 후보였던 이승철을 끌어들인 김대준이 이겼다.
김영상은 결과에 승복하여 김대준의 선거를 적극 도왔다.
“이미 한 번 힘을 합친 전력이 있지 않나. 아마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그때는 박정환이라는 거대한 적이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박정환이 죽고 공화당엔 마땅한 후보가 없습니다.”
박정환이 자신을 견제할 만큼 힘 있는 자를 거대 여당에 놓아둘 리가 있겠는가.
박정환에 대한 충성과 떨어지는 콩고물로 뭉쳐 있던 공화당은 사분오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 자리는 하나뿐이죠. 없던 욕심도 나지 않을까요? 그런데 권력욕 없는 정치인이 있긴 합니까?”
전생에서 노태오가 그렇게 어부지리를 얻었다.
여소야대가 된 상황에서 양 김이 힘을 합치기만 하면 대통령 당선은 확정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후보는 대통령 자리를 두고 서로 갈라서서 힘을 합치지 않았다.
욕심 때문이었다.
“이 사람아, 설사 그렇다고 해도 잘못 찍었네. 내겐 공화당을 포섭할 힘이 없잖나.”
“왜 없습니까?”
태수가 씩 웃었다.
“초명 은행을 통해서 치부책을 얻으셨잖습니까.”
한청호와 최무룡이 함께하던 시절, 공화당 의원들에 건넸던 뇌물과 자금 세탁에 관한 장부다.
한청호는 박정환의 뒤처리를 도맡아 왔고, 최무룡은 사채로 자금 세탁을 도왔다.
최무룡이 사채 동결조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치부책?”
“이런, 그것까진 아직 못 들으셨군요. 제가 따님께 부탁해 미리 확보해 두었습니다.”
그때 드르륵, 하고 장지문이 열리며 안소정이 들어왔다.
그녀가 태수에게 치부책을 건넸다.
또한 그녀가 여태 정보 상인을 움직여 모아 놓은 공화당 의원들의 약점을 장부로 묶어 왔다.
“광화당 의원들 목줄입니다.”
탁.
태수가 치부책 뭉치를 안정우 앞에 놓는다.
“이걸 보고도 자신 없습니까?”
안정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태수가 하나 더 올려놓는다.
탁.
치부책 맨 위에 제7 광구에 관한 밀약서가 올렸다.
“이래도?”
태수가 쐐기를 박았다.
탁.
제7 광구 밀약서 위에 청일 호텔 VIP룸을 도청했던 기록물이 올라갔다.
“합동 수사 본부장인 이세후에게 기자 회견을 열어 달라 부탁했습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몰린 그곳에서 제가 당신을 슈퍼스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슈퍼스타라니…….”
“매국노 박정환의 비리를 캔 독립 투사. 타이틀, 마음에 드십니까?”
“…….”
안정우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진다.
“인생 한 방입니다.”
반면 태수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태수가 안정우를 남겨 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르신 앞길은 제가 열어 드리죠.”
태수가 성큼성큼 걸어가 장지문을 닫았다.
그 뒤를 안소정이 따랐다.
대운각 룸에 남겨진 안정우는 말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밤을 꼴딱 샐 기세로 말이다.
* * *
“컷!”
그 소리에 고석만 CP가 제일 먼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좋았어!”
TBS 동인 방송과 태양 건설이 함께 만들었던 드라마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마지막 화를 찍었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했다.
“끝났다!”
무려 8개월이라는 대장정을 끝낸 것이다.
첫 방영부터 순조롭게 시작한 연속극은 끝내 동인 방송국의 기록을 연이어 갈아 치웠다.
-최단 기간 시청률 1위 기록!
-최단 기간 시청률 40% 돌파!
-최장 기간 시청률 1위 고수!
-동인 방송국 역대 최고 시청률 경신!
시청자들에게 1975년 상반기를 가장 뜨겁게 달군 드라마로 기억되었다.
덕분에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의 몸값과 드라마 앞뒤로 붙는 광고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방송 스태프들의 추가 수당과 성과급 보너스는 덤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 촬영의 즐거움을 만끽할 때 고석만 CP가 크게 외쳤다.
“끝나고 회식 있습니다! 마지막 회식이니까 다들 도망가기 없기!”
배우와 스태프들은 환호했다.
“회식! 회식!”
“우리 뭐 먹어요?”
“소고기! 소고기!”
고석만 CP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태수와 이건후에게 바톤을 넘겼다.
“메뉴는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이건후 이사님과 태양 그룹 회장님께 달렸습니다.”
마지막 촬영이 아닌가.
태수와 이건후도 스튜디오 뒤에서 마지막을 함께 지켜봤다.
태수가 웃으면서 화답했다.
“소갈비 어떻습니까?”
“우와아아-!”
“소갈비! 소갈비! 태양 그룹 최고!”
태수가 품에서 두툼한 지갑을 꺼내 내밀었다.
“이걸로 계산하십시오. 배우와 스태프들 회식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물주는 그렇게 정해졌다.
비서 송창준이 태수의 지갑을 받아 챙겼다.
이건후가 웃었다.
“강 회장님 덕분에 우리 방송국 식구들이 호강하겠네요. 제가 그동안을 감사하며 연속극 최대 투자자님께 술 한 잔 따르겠습니다.”
이건후가 에둘러 태수에게 같이 회식 자리에 가자고 권유한다.
그 말을 듣자 미혼의 젊은 여자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모두 간절하게 태수의 참가를 바랐다.
‘제발 같이 갔으면…….’
‘은근슬쩍 말이라도 한번 붙여 봤으면…….’
‘촬영이 끝나 버렸으니 이제 다시 보기 어려울 텐데. 제발…….’
지난 8개월간 건설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태수의 모습을 곁눈질한 배우와 스태프들이 아닌가.
몰래 태수에게 마음을 품은 여자들이 꽤 많았다.
이번 드라마로 70년대 트로이카로 떠오르게 된 신인 여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윤아, 장미현, 그리고 유지연도 은연중에 두 손을 잡고 태수만 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동인 방송국 식구들끼리 즐기는 마지막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태수는 웃으면서 정중히 거절한다.
여자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투자자는 뒤에서 밀어야죠. 앞에 나서면 불편할 겁니다.”
8개월간 간간이 방송국 회식을 책임졌다.
하지만 한 번도 회식 자리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태수다.
이건후가 부드럽게 웃으며 한 번 더 권한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시죠. 마지막이 아닙니까?”
눈치껏 고석만 CP와 연출 감독 등이 합세한다.
“8개월이나 동고동락했는데, 이대로 헤어지면 너무 서운할 것 같습니다.”
“회장님의 지원 덕분에 어려움 없이 그간 촬영할 수 있었어요. 감사하단 인사는 드려야죠.”
“마지막 인사는 제대로 하고 헤어져요. 이별주 한잔하시고 가시죠.”
배우와 스태프들의 거듭된 권유.
이건후가 스태프들의 권유를 부추기고 있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이건후가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나 보군.’
마침내 태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태수의 말 떨어지기 무섭게 여자들의 환호성이 유독 크게 울렸다.
* * *
근처 소갈비 집.
이건후와 태수, 그리고 고석만 CP, 연출팀 감독과 극본가 등 굵직한 인사들이 따로 테이블을 받았다.
이건후가 태수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동안 우리 TBS 연속극에 투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연속극 촬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태수 역시 이건후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TBS 동인 방송의 적극적인 지원에 감사합니다. 덕분에 태양 아파트 분양 문의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서로 금칠을 해 주며 즐거운 술자리를 이어 갔다.
감사의 인사로, 작별의 인사로.
특히 여자들이 줄을 서가며 태수에게 술 한 잔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너도나도 술을 권하니 태수는 꽤 많이 마시게 되었다.
이건후 역시 얼굴이 벌게지도록 마시긴 마찬가지였다.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별을 고한다.
“전 이만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봐야겠군요.”
이건후가 기다렸다는 듯이 뒤따라 일어선다.
두 사람이 일어나자 술과 음식을 즐기던 모든 이들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이건후는 두 손으로 그들을 만류했다.
“마지막 회식이 아닙니까.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뒤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건후 역시 지갑에서 돈다발을 꺼내 고석만 CP에게 넘겨주고 신발을 신는다.
뒤따라 나오려는 감독과 고석만 CP까지 전부 물린 이건후.
태수와 이건후가 소갈비 집을 나왔다.
“후식 커피 한잔할까요?”
이건후가 후식 커피를 내밀었다.
태수는 잠자코 커피를 마셨다.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려고 절 이곳까지 데려온 건 아닐 텐데요.”
“역시, 눈치채셨을 줄 알았습니다.”
“마지막 작별 인사는 이쯤에서 끝내고, 우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좋습니다.”
이건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강 회장님께선 누구에게 그걸 내어 주실 생각입니까?”
역시.
짐작대로였다.
“삼청 그룹 정보력이 대단하군요.”
“그룹의 사활이 걸린 문제니까요. 5.18 청일 호텔 참변 이후 그룹 차원에서 연일 회의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죠.”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느냐.
그것은 재벌 그룹의 미래가 좌지우지되는, 커다란 일이었다.
“삼청 그룹의 선택은 누구입니까?”
“태양 그룹입니다.”
이건 뜻밖이었다.
김종표, 김영상, 김대준 등 대선 후보를 제치고 태양 그룹을 선택하다니.
“삼청은 태양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 회장님께 온 겁니다.”
삼청 그룹 총수 이병춘은 그 막중한 임무를 셋째 아들 이건후에게 맡겼다.
‘삼청 그룹이 먼저 태양 그룹에 손을 내밀 줄이야. 그것도 그룹 후계자를 보내서.’
태양 그룹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겠다는 소리였다.
이건후가 태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강 회장님이 가시는 길에 삼청 그룹이 힘을 보태겠습니다.”
“제가 누구를 찍을 줄 아시고요?”
“강 회장님이 누구를 찍던 그분께 물건이 갈 것 아닙니까. 더구나 태양 그룹과 삼청 그룹이 전력으로 밀어준다면?”
안정우의 승률이 치솟아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베팅하겠습니다. 어련히 잘 고르셨겠습니까.”
“누군지도 모르면서 태양 그룹을 밀어준다는 결정,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원래 인생은 한 방입니다.”
삼청 그룹을 걸고 도박을 부르짖다니.
그런데도 신뢰가 가는 묘한 남자다.
“삼청 그룹은 어중간할 수 없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지키는 것보다 잃는 게 많습니다. 확실한 정보와 판단을 두고 제대로 내린 선택만이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이건후가 통 크게 선언하며 씩 웃었다.
“솔직히 여차하면 말 바꾸는 정치인을 믿는 것보다 강 회장님 수완을 믿는 게 더 확실하잖습니까?”
이건후가 푸른색 명함을 슬쩍 꺼내며 말했다.
“강 회장님, 이참에 명함 좀 쓰시죠?”
태수의 품에는 삼청, 럭키 세븐, 금산, 대한 정유 공사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