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새로운 시대의 주역(2)
김종표는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그가 떠보듯 물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더군. 강태수는 한청호를 치워 버리기 위해 거물들을 이용했다. 무려 대통령과 경호실장, 보안 사령관, 그리고 중앙 정보부 차장까지.”
대뜸 정곡을 찔러 들어온다.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태수가 아니다.
태수는 태연자약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궁금하군요.”
“자네 빼고 전부 몰락했으니까. 세 명은 죽고, 두 명은 취조받고 있지.”
김재국은 대통령 암살범으로, 한청호는 박정환의 지시에 따라.
“청일 호텔에 있던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하나같이 입 모아 말하더군. 자네가 박정환의 매국 혐의를 잡았다고.”
“그러던가요?”
태수는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부인하지도 않았다.
그 애매모호한 표현이 뜻하는 바를 김종표가 어찌 모르겠는가.
‘확실하군. 강태수를 잡아야 한다.’
결심을 한 김종표가 은근하게 물었다.
“어떤가. 나와 손을 잡고 구시대 독재 정권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겠나?”
이럴 줄 알았다.
태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차기 대통령이 되고 싶으십니까?”
“이건 기회야. 달려들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지.”
현재 김종표는 대통령 권한 대행이다.
박정환이 없는 이상 행정부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전생에서도 끝까지 대선에 목을 맸던 김종표가 아닌가.
당연히 욕심이 났을 터다.
“제가 뭘 도와드려야 합니까?”
“그 매국 혐의 말일세…….”
“이걸 어쩌나.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그런 말은 하지 않던가요?”
예정에 없던 대답이다.
‘누구에게 줬다는 뜻인가? 아니면 훼손됐다는 뜻인가? 그도 아니라면…….’
태수는 찻잔을 내려놓는 것으로 김종표의 생각을 끊었다.
“용건이 그것이라면 죄송하게 됐습니다.”
김종표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닐세. 그럼 오늘은 일단 정치 자금부터 대화해 볼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돈은 챙겨 가야겠다는 소리다.
‘그거라면 아주 쉽지.’
원래 여야를 가리지 않고 거물 정치인들에게 정치 자금 건네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오죽하면 재벌들의 소임이라고 할 정도가 아닌가.
“1억. 가능하겠나?”
오일 쇼크의 여파가 가시지 않을 때다.
2020년을 기준으로 25억에서 27억 정도다.
태수가 숨겨 놓은 비자금이 얼마던가.
하지만 태수는 일부러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전액을 마련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태양 아파트 준공이 계속 미뤄져서 분양을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달라는 대로 다 주면 주머니로 안다.
그러니 슬쩍 양념을 쳐야 한다.
“일단 오늘은 3천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태양 아파트 분양이 끝나는 대로 나머지를 마저 챙겨 드리죠.”
태수의 눈짓에 송창준이 밖으로 나갔다.
금고에 있는 3천만 원을 챙겨 돌아올 것이다.
김종표는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태양 아파트 준공을 막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그렇다면 분양엔 문제없겠지?”
역시 바로 알아들을 줄 알았다.
공무원들이 아파트 준공을 트집 잡고 차일피일 미루면 피곤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
‘전생에 청일 아파트가 준공 트집으로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가.’
78년 8.8 부동산 규제 대책으로 대치동 청일 아파트는 부도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마침 78년 말 79년 초에 세계 제2차 오일 쇼크가 터지는 바람에 살았지.’
시장이 불안해지자 안전 자산인 부동산으로 돈이 몰렸기 때문이다.
박정환의 청일 길들이기는 그것으로 끝났었다.
태양 부동산 역시 위에서 슬쩍 압박을 하는 바람에 준공이 계속 늦춰지고 있었다.
“원래 아파트 준공은 고작 3천만 원짜리 청탁이 아니야. 하지만 태양 그룹과 함께하자는 의미에서 내가 먼저 성의를 보이겠어.”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군요. 큰 뜻을 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김종표는 3천만 원을 가지고 돌아갔다.
건물을 나서자마자 뒤를 돌아보는 김종표.
‘애송이의 눈빛이 뭐 이리 날카로워?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총명을 감추고, 속내를 감추고,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는 깊은 눈이라니.’
태수의 눈은 심연과 같았다.
김종표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정보가 더 필요해. 어째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 튀어나온 것을 모르고 있었지?’
김종표는 그간 강태수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파악했다고 생각해 왔었다.
-운 좋은 놈.
-박정환이 희한하게 예뻐하는 귀염둥이.
-그 덕에 천지 분간을 못하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
소문으로, 보고서로, 한청호를 통해, 신문 기사로.
그렇게 간접적으로 파악했던 태수는 그런 운 좋은 망나니였다.
그런데 직접 만나 보니까 소문과 너무 다르다.
‘강태수, 풋내 나는 애송이일 줄 알았더니 여간내기가 아니야. 호락호락하지 않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으니 곤란해.’
김종표는 한참이나 뒤를 돌아봐야 했다.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순히 운 좋은 놈이라고 할 수 없겠어. 하기야 3년 만에 100대 기업 재벌 총수가 된 놈이 비범하지 않을 리가 없지.’
분위기부터가 거물이었다.
그런 놈을 애송이 취급했던 게 실수였다.
보다 철저한 준비를 해야 했다.
‘한청호가 밀릴 만했군.’
하지만 김종표는 한청호가 아니다.
그놈처럼 로비와 뇌물로 기생충처럼 붙어서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네놈이 어찌 나오는지가 너와 태양 그룹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그제야 김종표는 발길을 돌렸다.
* * *
안정우가 태수에게 물었다.
“자네는 김종표를 밀어줄 생각인가?”
“정치 자금 건넸다고 밀어주는 겁니까?”
“하긴, 정치인들이 먼저 찾아왔을 때는 빈손으로 돌려보내면 안 되지.”
정치인들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다뤄야 한다.
소득 없이 돌아가면 귀한 시간을 망쳤다는 생각부터 드는 게 인지상정이다.
체면이 상하면 앙심이 생기고, 앙심은 적을 만든다.
적은 기회만 노리다 뒤에서 앙심을 되갚는다.
“김종표 말처럼 태양 아파트 준공을 막아 놓은 걸 푸는 데 3천만 원이면 싸게 먹힌 게 맞습니다.”
강남 최대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가 될 태양 아파트가 아닌가.
그것도 최고급 프리미엄 고급 아파트.
아파트 준공을 위해 건설사들은 돈다발을 싸 들고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 돈은 대부분 정치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행여나 있을 미래를 위해 보험을 들어 놓는 것뿐이란 소리군.”
“아닙니다. 보험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김종표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김종표가 박정환의 지낭으로서 무슨 일을 했었나.
정보 상인을 거느리고 있는 안정우가 모를 리 있으랴.
“김종표는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환 군사 정부의 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일으킨 대한민국 네 가지 부정부패 사건의 주역입니다.”
“이 사건들로 인해 군사 정권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았지.”
“막대한 자금 대부분은 공화당 창당 자금으로 들어갔습니다.”
“박정환을 든든하게 떠받쳐 줄 여당을 위해, 그리고 야당의 정치 모략을 위해.”
사람들은 군사 정권이 주장했던 ‘구악의 타파’를 비꼬며 ‘신악의 주범’이란 꼬리표를 달아 주었다.
“박정환은 이 4가지 사건으로 인해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 손가락질 받는 지도자를 국제 사회가 제대로 대우해줄 리 있겠습니까?”
“박정환은 이미지 쇄신에 목숨을 걸게 됐지.”
“이 모두가 김종표의 머리에서 나왔죠. 김종표와 박정환이 서로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이유입니다.”
안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죽하면 박정환이 조카사위인 김종표를 멀리했겠나. 위험한 놈이야.”
“박정환은 김종표의 수완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 눌러놨죠.”
오랫동안 친인척이기도 한 김종표를 견제한 이유였다.
필요에 의해 국무총리를 맡겨놓긴 했지만 거기까지다.
박정환은 김종표의 머리를 쓰면서도 실질적인 권력을 쥐여 주지 않았다.
“전두호와 차기범은 호가호위할 수 있어도 김종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호가호위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겠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조금만 방심해도 박정환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겠다고 할 작자였으니 말이야.”
“박정환의 성정일 미뤄볼 때 진즉 제거했을 만한 인물입니다.”
“오히려 제 쓸모를 증명하며 버텨낸 게 그자의 뛰어난 점이지.”
“재주가 아까워서 그랬을 겁니다.”
“머리가 좋잖나. 국무총리 자리를 주고 일 맡겨두기엔 제격이지.”
안정우가 손가락으로 제 머리통을 톡톡 친다.
김종표 덕에 박정환은 군부 독재자로 굳건히 자리를 굳혔지만 지도자로서 박정환은 씻을 수 없는 흠결을 떠안아야 했다.
그런데도 놓을 수 없는 유능한 자라는 소리다.
“박정환 밑에서 억눌려 있던 능구렁이가 똬리를 풀고 몸을 곧추세우고자 하는군요.”
안정우가 한숨을 쉬었다.
“박정환의 지낭이야. 박정환 이상으로 나라를 망칠 인물이지.”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회전당구기. 박정환 4대 부정부패 사건은 유야무야 덮어졌죠.”
김종표가 박정환을 위해 꾸몄던 사건들이다.
“증권 파동이 대표적입니다. 정치적으로 돈 쓸데가 많은데 국고금을 쓸 수 없으니 증권 시장을 어지럽힌 일이었죠.”
“이 사건으로 한국의 주식 시장은 투기장이며 위험도가 높다는 인식이 생겼어.”
“그런 이유로 외국 기업들은 한국 기업에 대해 투자를 꺼렸고, 기업들의 성장세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더구나 은행 대출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기업들은 자금 조달을 위해 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
“음지의 지하 금융 시장이 성장한 이유고, 한국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결국 박정환은 화폐 개혁과 사채 동결 조치로 이걸 덮어 버렸지. 모든 부담은 국민들이 떠안은 채 말이야.”
화폐 개혁과 사채 동결조치로 돈이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 사채업의 첫손에 꼽히는 명동 큰손 장말동 역시 사채 동결조치로 쫄딱 망할 뻔했다.
이 나라의 경제를 좀먹은 대표적인 악행이었다.
안정우가 씩 웃었다.
“자네가 아니었더라면 나 역시 알거지가 되었겠군.”
“저도 당시 어르신의 2천만 원이 아니었더라면 광산 개발을 못했겠죠. 광산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기도 합니다.”
태수와 안정우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동맹.
그들은 신의로 맺어져 여기까지 함께 커 왔다.
태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 김종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 머리로 얼마나 더 많은 부정부패를 저지를까요. 앞날이 불 보듯 뻔합니다.”
태수가 어떻게 군부 독재자들을 싹 치워 버렸나.
정치가 아닌 사업으로 태양 그룹을 키우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래, 욕심 많은 능구렁이 모략가는 나라를 망치기 딱 좋아.”
그때 송창준이 다시 와서 말했다.
“육군 참모 총장, 아니 계엄 사령관이자 합동 수사 본부장이신 이세후 장군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안정우가 웃었다.
“자네 집 문턱이 닳겠군그래.”
“글쎄요. 고작 서열 100위권 밖에 안 되는 재벌 총수를 찾아올 사람이 얼마나 더 있겠습니까.”
권력은 돈과 사람을 부른다.
그러니 유력 정치인들 주변엔 똥파리가 꼬인다.
권력을 쥔 그들이 재벌 총수를 일일이 찾아다닐 리가 있나.
재벌들이 대선 주자들을 찾아다니며 상납하기 바쁜 게 현실이다.
“하지만 대통령 권한 대행 김종표도 자네를 먼저 찾아왔지. 이번엔 육군 참모 총장이자 계엄 사령관인 이세후까지 왔어.”
안정우가 뿌듯해하며 말했다.
“현재 이 나라 최고 권력자 둘이 앞다투어 자네를 찾아. 그 뜻이 무엇이겠나.”
사람은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거물이라면 더 그렇다.
“그들도 냄새를 맡은 거야. 자네에게서 풍겨 나오는 권력 냄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