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새로운 시대의 주역(1)
김재국은 품에서 라이터를 찾는다.
손에 집히는 게 없자 김재국은 어쩔 수 없이 박정환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후- 하고 한숨처럼 짙은 담배 연기가 뿜어진다.
“김 차장님, 굳이 왜 이러신 겁니까?”
박정환은 김광록이 처리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걸 김재국이 가로챘다.
“이유? 말했잖아.”
박정환을 쏘면서 친절하게 읊어 주지 않았던가.
김재국은 픽 웃어 버린다.
“떠나게. 곧 수도 경비 사령부가 들이닥칠 거야.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퇴로를 확보해 뒀으니 그놈들을 따라가면 될 거야.”
“김 차장님은요?”
“나까지 도망가서야 쓰나.”
김재국이 담배를 피운다.
“뒤를 부탁하네.”
김재국은 등을 돌렸다.
태수가 그 등을 돌려세우려고 했지만 김재국은 손을 들었다.
“가. 남자는 뒤를 돌아보면 안 돼.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야지.”
“김 차장님.”
“태양 그룹이 한일 협정을 어떻게 파기하고, 석유를 채굴해 이 나라를 산유국으로 만드는지 지켜보겠네.”
태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될 겁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석유 자원을 얻게 될 겁니다.”
“좋아. 더할 나위가 없군.”
김재국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등을 돌리지 않는다.
김재국은 바닥에 떨어진 영부인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김광록이 재촉한다.
“서두르자.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귀찮아진다.”
“갑시다.”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앞을 뚫는다.
김광록이 태수 곁에 딱 붙어 서서 호위에 집중한다.
“뚫어!”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물밀듯이 몰아붙여 가볍게 앞길을 뚫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전차를 앞세운 수도 경비 사령부대가 청일 호텔에 도착했다.
“반란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모두 항복하라!”
전차 부대를 지휘하는 수도 경비 사령부 참모장 장태원이 소리를 높였다.
“반란군 무리에 잡혀 있는 육군 장성들을 구출하라! 각하를 보호하라!”
청일 호텔에 도착한 수도 경비 사령부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청일 호텔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오늘 처음 대중에 공개된 청일 호텔 1층, 2층, 3층 창문으로부터 시뻘건 화마가 넘실댄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인화성 물질을 잔뜩 뿌려서 불을 낸 게 틀림없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수도 경비 사령관이 버럭 소리쳤다.
“소방차 불러!”
이래서야 군인들이 진격할 수 있겠나.
수도 경비 사령부대는 손 놓고 불길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소방차가 온 이후에도 한참이나 더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결국 34층 1,300여 개의 객실을 보유한 청일 호텔은 도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 * *
1975년 5월 18일.
그날에 대해서 하루 종일 신문과 방송에서 일제히 청일 호텔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선 화려한 결혼식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재계 13위인 청일 그룹과 육군 보안 사령관의 집안이 맺어지다!
-전국 별들이 모두 모인 장성들의 잔치!
-정재계 유명 인사들로 문전성시!
-동양 최고급 호텔을 꿈꾸는 청일 호텔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다!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청일 호텔!
그렇게 청일 호텔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그를 위해 한청호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최대한 화려하게 호텔을 꾸몄다.
취재진들을 모두 불러 엄청나게 성대한 결혼식을 전국으로 생중계하지 않았던가.
1975년 5월 19일 월요일.
다음 날에도 청일 호텔에 대한 이야기로 신문과 방송이 발칵 뒤집혔다.
-청일 호텔, 문 연 첫날에 화재로 문 닫다!
-동양 최고 호텔의 꿈이 하루 만에 타 버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일 호텔과 관련된 비극이 줄줄이 보도되었다.
-청일 호텔에서 박정환 대통령이 암살되다!
-박정환 대통령을 암살한 자는 중앙 정보부 차장 김재국!
-김재국, 자수하다! 중앙 정보부는 지금 대혼란!
무려 대통령 암살 사건이다.
심지어 74년 8월 15일에 벌어졌던 대통령 암살 미수 및 영부인 저격 시해 사건이 벌어진 지 1년도 채 되지 않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전두호 보안 사령관과 차기범 대통령 경호실장 역시 청일 호텔에서 숨을 거두다!
-육군 장성들이 전부 납치, 구금, 억류되어 있던 청일 호텔! 별들의 무덤이 될 뻔!
신문들은 이에 관해 속속 후속 기사를 내보냈다.
-피로 물든 청일 호텔, 문을 열자마자 사상자만 200여 명!
-화려하게 꾸미느라 안전은 뒷전! 대피로가 없어서 피해를 키우다!
한청호가 그토록 공들였던 청일 호텔이었다.
그렇게 동양 최고를 꿈꾸던 청일 호텔에 원치 않는 별명이 자꾸 붙었다.
-독재자의 처형장.
-군인들의 화장터.
-구시대의 상징.
청일 호텔의 이미지 추락은 청일 그룹 전체 주가를 출렁이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재빠르고 자세한 소식을 전한 신문이 있었다.
바로 화려하게 부활한 동방일보와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선 지라시였다.
두 신문은 앞다투어 청일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독점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신문 주세요!”
“지라시 한 부!”
“동방일보 한 부!”
사람들은 발 빠르게 소식을 전하는 두 신문을 사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다른 신문과 방송들은 동방일보와 지라시가 전하는 기사를 읽고서야 기사를 작성하는 일이 빈번했다.
모두 동방일보와 지라시의 소식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순식간에 신문 구독률부터 판매량까지 두 신문사가 맹렬히 치고 올라갔다.
“이대로라면 자네 말처럼 떼돈을 벌어들이겠어.”
안정우가 신문을 반으로 접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두 신문이 나란히 1위와 2위를 차지하면서 합계 점유율 50%를 넘겼어. 불과 열흘 만에.”
이건 반짝 인기다.
하지만 국민들의 뇌리에 강렬히 박히게 된다면 그 신문은 하나의 브랜드가 된다.
브랜드 신문이 시장을 장악하여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면 또 다른 권력이 된다.
태수가 동방일보를 인수한 이유였다.
“동방일보 사장이 아주 입이 함박만 하게 벌어졌어. 떼돈이라며 좋아 죽는다.”
“신문 팔아서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습니까?”
신문 구독료로는 부족해 광고료로 운영하는 신문사가 아니던가.
“신문사에 광고 요청이 쇄도하고 있거든. 동방 일보 사장이 행복한 비명을 지를 정도로.”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그간 무료로 배포하던 지라시 발간 적자까지 이번에 다 털어버리겠어.”
태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안정우는 신문을 흔들었다.
“언론의 힘이 정말 대단하군. 이것을 시작으로 사회 전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군.”
“바람직한 일입니다.”
시민들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박정환의 독재 정권은 너무나 오랫동안 언론을 탄압해 왔다.
“자네, 그런데 정말로 그걸 세상에 발표할 생각인가?”
“네. 그럴 생각입니다.”
“이 나라가 발칵 뒤집힐 텐데, 괜찮겠나?”
“각오하고 있습니다.”
욕을 먹으면 박정환이 먹겠지.
태수가 욕먹을 일이 뭐가 있겠나.
“자네가 들고 있는 그 서류는 이 나라 정권의 판도를 바꿀 강력한 무기가 될 거야.”
“그럴 겁니다.”
태수가 손에 쥐고 있는 제7광구에 관한 협정 밀약서.
그것은 박정환을 무릎 꿇릴 만큼 대단한 무기였다.
또한 새로운 정권에 새바람을 불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한 이슈이기도 했다.
“자네가 그걸 누구에게 쥐여 주느냐에 따라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할 것 같군.”
“무기는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지만 안정우도, 태수도 안다.
이 나라를 통째로 뒤집을 만큼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는 무기.
그건 들고 있기만 해도 충분한 위협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권력이고 힘이었다.
안정우는 웃었다.
“자네는 그걸 누구에게 줄 생각인가?”
“글쎄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자네가 갖고 있는 VIP룸의 기록물까지 합세하면… 게임은 끝날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
태수가 했던 말처럼 박정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매국노가 될 것이고, 그 매국노를 사장시키는 사람은 샛별처럼 급부상할 것이다.
“자네가 대통령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떤가?”
“대통령 말입니까?”
태수는 신문을 톡톡 건드렸다.
태양 일보 분양 광고가 실린 광고란이었다.
“전 정치인이 아닙니다. 재벌로서도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죠. 할 일이 많습니다.”
“남에게 줘 버리기엔 아까운 기회가 아닌가.”
“욕심나십니까?”
“물론이지.”
“어르신이 쥐고 흔들어 보고 싶으십니까?”
안정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말을 고르던 안정우는 화제를 돌렸다.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은 5월 19일 새벽 4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김종표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었다.
‘전생과 달리 아직 최규혁이 국무총리를 맡지 않아서 그렇게 됐군.’
전생에선 79년 박정환이 죽을 때엔 최규혁이 국무총리였다.
어지러운 시절을 이끌었던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이름이 높았다.
계엄 사령관이자 박정환 암살 사건 합동 수사 본부장을 지낸 전두호가 전권을 틀어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환의 죽음이 전생보다 앞당겨지면서 국무총리가 달라졌다.
김종표는 최규혁과 달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김종표는 야망이 큰 자였지. 박정환의 지낭으로 꼽히기도 했어.’
그는 5.16 군사 정변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박정환과 인척이자 측근이기도 했지만 장기 집권을 위해 박정환의 견제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린 후 3김 시대로 대표되는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최규혁처럼 허수아비 대통령이란 소리는 절대 듣지 않을 작자이지.’
능수능란한 전략가이자 모략의 대가로 불리는 김종표가 아닌가.
더구나 여당과 야당을 오가며 뒤에서 판을 쥐고 흔드는 인물이었다.
“계엄법에 의거해 계엄 사령관이 합동 수사 본부장으로 자동 보직되었다.”
“수사 본부장은 누구입니까?”
“육군 참모 총장 이세후.”
뜻밖이었다.
‘전생에선 육군 참모 총장이 정승환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달라졌구나.’
전생에선 79년 3월 박정환이 직접 계엄 사령관으로 전두호를 임명했었다.
따라서 전두호가 육군 참모 총장 대신 계엄 사령관으로서 수사 본부를 진두지휘했다.
당시 중앙 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국이 대통령 암살 범인으로 몰려서 중앙 정보부가 사실상 올 스톱되었다.
전두호가 대통령 암살 사건 수사를 빌미로 전권을 틀어잡고 12.12사태를 일으키게 된 계기이기다.
‘이세후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지. 박정환과 전두호 사이에서 능숙하게 줄타기하여 정년 퇴임까지 했을 정도니까.’
육군 참모 총장이었으나 전두호에게 납치당해 굴욕을 당했던 정승환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때 비서 송창준이 다급하게 달려와 보고했다.
“김종표 대통령 권한 대행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밤에?
태수와 안정우는 두 눈을 마주쳤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 * *
김종표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 초면인가? 나 김종표일세.”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태수와 김종표가 악수했다.
김종표는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본론으로 직행했다.
“자네가 대통령 암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네.”
“취조하러 오셨습니까?”
중앙 정보부 도청으로 얻어 낸 기록물을 태수가 갖고 있다.
하지만 김종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도 대충 알고 있어. 자네가 결백하다는 것도 물론 알지.”
김종표는 다른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번 일에 깊이 얽히게 됐으니 여러모로 귀찮을 거야. 꽤 오랫동안 시끄러울 테니까.”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이번 일에서 자네를 완전히 빼 주겠네. 그러니 자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싶은데.”
결백하다고 해서 경찰이나 검찰, 중앙 정보부를 오가는 게 피곤하지 않을 리 있나.
더구나 태수처럼 재벌 기업 총수쯤 되면 매우 짜증 나는 일이 된다.
사람들 시선이 험악해지는 건 덤이었다.
그렇기에 김종표의 제안은 흥미로웠다.
“자네가 날 도와준다면 나 역시 자네에게 큰 선물로 보답할 것일세.”
“선물?”
“청일의 한청호가 중앙 정보부에 잡혀갔다지?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고 들었어.”
김종표는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난 한청호를 감옥에서 푹 썩게 해 줄 수 있지. 어떤가?”
김종표가 이리 달콤한 제안을 건네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태수는 그의 속을 단번에 꿰뚫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