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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찍고 건설 재벌-175화 (175/230)

175화 배신의 끝(5)

“전두호 때문에 중령 자리보전하기도 힘들었다지? 전두호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대통령 경호실장 자리야. 초고속 승진이 아닌가.”

박정환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면죄부의 시간은 끝났다. 앞으로 강태수와 태양 그룹이 어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그래.”

태수를 보는 박정환의 눈길이 차가웠다.

한청호를 끌어낼 때부터 태수의 끝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눈앞에 알짱대는 반역자 놈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기 때문에 가만 놔두고 있었다.

태수가 도망가지 않고 있던 것에 놀란 이유였다.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겠나,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함대로 갈아타겠나?”

박정환이 새로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김광록을 향해 라이터를 던졌다.

“불.”

그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라는 명백한 요구였다.

굴복, 그리고 복종.

다른 말로는 배신.

“앞으로 그 라이터는 자네가 맡는 거야. 차기범이 평생을 노력해도 얻을 수 없던 라이터지.”

라이터를 받아 든 김광록의 표정이 굳었다.

그럴수록 박정환은 느긋해졌다.

“담배 한 개비의 값으로 목숨과 승진이라니, 다시없을 기회로구나.”

“지금 나더러 배신하라고?”

“잘 생각해. 작게 보면 목숨을 구하는 일이요, 크게 보면 앞날이 보장된 성공 대로를 걸을 결단이다. 그 대가는 고작 상관의 변변치 않은 목숨. 참으로 싸다.”

태수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서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태연자약을 넘어 미소까지 짓고 있다.

김광록은 태수를 보고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넌 지금 이런 소리를 듣고도 웃음이 나와?”

“같잖아서 그렇습니다.”

“그렇지?”

김광록은 라이터를 등 뒤로 던졌다.

“좆 까. 사람 우습게 보고 있어.”

김광록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배신당한 놈에게 치를 떨었던 놈이 나더러 배신하란 소리가 나오냐?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박정환이 표정을 구겼다.

김광록은 나머지 가운뎃손가락을 더해 양손을 올렸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게 목숨값이다. 목숨값 변변치 않게 보는 놈치고 쓰레기 아닌 놈은 없었다.”

태수는 더욱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럴수록 박정환의 웃음은 점점 더 비틀렸다.

“대통령 경호실장 자리를 마다한다고?”

“내가 사탕 준다고 따라갈 애새끼로 보여?”

평생 충성한 수하에게도 내어 주지 않던 라이터다.

그런 걸 초면에 주겠다는 놈을 어떻게 믿겠나.

자기 사람 챙기지 않고 다른 놈을 꼬여 내는 놈을 어찌 따르겠나.

충성했던 차기범의 말로를 알고 있지 않은가.

“봐라. 네 곁에 지금 누가 남아 있는지. 아무도 없어.”

영부인도 죽었다.

비서실장 김정림도 나갔다.

경호실장 차기범도 죽었다.

군에서 눈과 귀가 되어 주던 전두호도 처리한 마당이다.

박정환 홀로 이곳에 남겨지지 않았던가.

탁탁.

태수가 밀약이 적혀 있는 한일 협정 서류를 정리한다.

“전 이걸 세상에 알릴 겁니다.”

“강태수!”

“잘못은 바로잡아야죠. 그리고 한국은 산유국이 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석유는 없어!”

“그건 당신 생각이고.”

21세기에 중국이 잘만 뽑아 먹던 석유와 천연가스가 아닌가.

기술이 뒤떨어져서 석유를 못 캐냈던 것이지만 태수는 다르다.

“사우디에서 기술 협조를 얻어 낼 겁니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가 아닌가.

사우디 국왕은 칼리드, 그의 아들 라흐만은 태수의 동맹이자 친구다.

이 석유로 앞으로 있을 세계 제2차 오일 쇼크를 넘길 것이다.

“이 밀약이 세상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일본 수상은 이에 대해 뭐라고 주장을 할까요?”

국가를 대표해 체결한 한일 양국 협상이다.

이면지에 일본 수상과 밀약을 나눴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일이다.

무엇도 국가 조약에 우선할 수는 없다.

그것이 설사 국가 원수의 결정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일본 수상은 딱 잡아 뗄 겁니다. 그래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박정환, 당신만 모든 죄를 떠안고 독박 쓰겠군요.”

“강태수!”

“이 일은 역사서에 길이 남을 겁니다.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 소리를 두고두고 듣겠군.”

“안 돼!”

아무리 우습게 여겨도 민심은 천심이다.

개개인은 개미만도 못하지만 국민들이 협심하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권력을 얻은 후 명예와 체면에 목숨 걸던 박정환이 아닌가.

“죽어도 그건 안 돼! 절대로 안 돼!”

매국노 소리를 들어서야 어찌 이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 꼴은 못 본다.

박정환이 태수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김광록이 간단하게 박정환을 제압했다.

팔이 뒤로 꺾인 박정환은 몸부림쳤다.

“나라 망신이 따로 없다! 그게 알려지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그 나라 망신은 당신이 시켰습니다. 한국이 영유권과 우선권을 얻은 제7 광구를 팔아먹은 대가를 치르십시오.”

“강태수, 난 힘으로 덮을 수 있다! 어떤 언론과 방송도 네 말을 틀어 주지 않을 거야!”

방송에서 떠들지 않으면 묻힐 일이다.

그리고 박정환은 그 정도는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자였다.

하지만 태수는 코웃음 쳤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십시오. 국민들의 입을 어디까지 틀어막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

그건 박정환이라도 불가능하다.

봇물 터진 국민들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박정환은 악을 써야 했다.

굴복하기 싫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강태수, 그 서류를 놓고 나가.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처음부터 말했잖습니까. 협박에 굴할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가져오지 않았을 거라고.”

태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당신을 배신한 자들은 죽음으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럼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매국노는 어떤 대가를 치를까?”

태수는 쐐기를 박았다.

“당신은 내가 아니어도 곱게 죽지 못할 겁니다. 치욕스럽게 죽어서, 이후엔 영원히 역사서에 매국노로 기록되겠지. 대대손손 당신 자손들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살 거야.”

“그만!”

쿵.

박정환이 무릎을 꿇었다.

김광록이 팔을 뒤로 꺾고 있음에도 무릎을 꿇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약속하겠다. 너와 태양 그룹엔 이 앞으로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이다.”

박정환은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 석유가 없다고 섣부르게 오판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었어!”

태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는다.

“한일 협정을 파기하고 대한민국이 제7 광구에 대한 영유권과 소유권을 확실히 하겠다. 그리고 석유를 채굴하마. 그건 태양 그룹에 맡기겠어. 그러니 그 서류만은……!”

숨이 막혀서 박정환은 길게 심호흡했다.

“그것만은 한 번만 봐주게. 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은혜?”

자신의 금고를 털었는데 죄를 묻지 않고 은혜를 갚겠다고 나오는 자가 있을까?

박정환은 얼간이가 아니다.

그리고 태수는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한 애송이도 아니었다.

“당신은 이 위기를 넘기면 나를 없앨까, 일본 수상을 없앨까, 아니면 최고 통수권자로 자신의 말을 모두 지켜 낼까? 한 가지는 분명하군.”

태수는 품에서 서류를 꺼내 팔랑팔랑 흔들었다.

여전히 등을 돌린 태수의 어깨 너머로, 서류만 흔들린다.

“당신은 당장 이 서류부터 없애 증거를 말살할 테지.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입니다.”

태수가 어찌 그 얄팍한 속셈을 모를까.

박정환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다.

그 무엇도 태수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

“잘 가십시오.”

“강태수!”

박정환이 서둘러 따라 달려가려고 했지만 김광록이 놓아주지 않는다.

태수를 둘러싸고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따라붙는다.

청일 호텔 7층 홀을 점거했던 방어선 대신 태수 개인 방어에 주력한 것이다.

“회장님 앞길을 뚫는다.”

“전부 붙어.”

“철저하게 방어한다.”

그 모습을 보며 박정환은 VIP룸에 남아 울부짖었다.

“돌아와! 강태수, 내가 약속한다지 않나! 잘못했다고 했어! 당장 돌아오란 말이야!”

김광록은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박정환은 김광록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어 그저 몸부림치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강 회장!”

김재국이 뛰어왔다.

태양 그룹 경호원들은 김재국을 말리지 않는다.

김재국이 태수에게 보고했다.

“수도 경비 사령부에서 전차를 이끌고 오고 있어. 군용 수송차가 줄지어 그 뒤를 따르고 있다고 한다. 이르면 10분 내에 도착할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박정환이 크게 기뻐하며 웃었다.

“보았지? 곧 반란은 모두 평정될 것이다. 강태수,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김재국!”

박정환의 부름을 받은 김재국이 씩 웃는다.

“이제야 날 찾습니까? 늘 내 보고를 거부하더니, 필요할 때만 간절히 찾아 부르는군요.”

김재국이 박정환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김광록에게 눈짓하는 김재국.

“수고했다. 하지만 내게 양보해 줄 순 없겠나?”

“음?”

김재국은 김광록을 똑바로 보았다.

“부탁함세. 이 일은 내가 지고 가겠네. 상관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속죄라고 봐도 좋아.”

김광록을 제치고 김재국이 박정환 앞에 섰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데도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잠잠한 이유는 뭘 것 같습니까.”

김재국이 VIP룸 구석 벽에 붙은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중앙 정보부 임시 상황실에서는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도청하여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요원들 전부 각하의 매국 행위를 알게 됐죠.”

“안 돼! 기록 자료 전부 폐기해!”

“기록된 자료는 이미 전부 들고 날랐습니다. 난 그 끝을 고하러 온 겁니다.”

김재국은 웃었다.

“그래서 늦었습니다. 기록된 자료를 나르라고 했더니 전부 총 빼 들고 각하를 죽여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거든요. 애국 청년들을 뜯어말리는 게 보통 일이랍니까.”

김재국이 품에서 총을 꺼낸다.

“부하들을 대표해서 내가 이 자리에 왔습니다.”

“김재국, 너도 배신이냐?”

“배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처단하는 건 애국이다.”

박정환은 얼굴이 굳어졌다.

김재국이 총을 겨눈다.

각오가 깃든 단단한 눈빛이었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각오였다.

“당신이 죽으면 밀약 조건 성사가 파기된다지? 일본은 대한민국이 아닌 박정환 개인에게 50억 달러를 지급하는 대가로 제7 광구 소유권을 주장하기로 했으니까.”

태수가 그날 호텔 방에서 이 서류를 보여 줬을 때 김재국은 결심했다.

이 매국노는 반드시 이 손으로 처리하겠다고.

“김재국!”

“내가 네놈에게 총을 쏘아야 하는 이유는 다섯 가지다.”

탕-

김재국이 총을 쏘았다.

박정환의 가슴에 총알이 박혔다.

하지만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자 김재국은 총구를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방탄복이 가릴 수 없는 곳으로.

“첫 번째가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탕-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아야 해서고.”

탕-

“세 번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려 함이며.”

탕-

“네 번째는 네놈이 망친 외국과의 관계를 회복해서 국익을 도모하고자 할 따름이다.”

마지막 한 발은 머리통이다.

탕-

“다섯 번째는 독재 국자의 이미지를 씻고 이 나라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철컥철컥.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개인적인 소감이야.”

박정환은 머리통에 구멍이 나서 축 늘어졌다.

무릎을 꿇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모습이 꼭 석고대죄를 청하는 죄인 같았다.

“넌 진짜 구제불능 쓰레기야. 최악의 좆 같은 상관이었지. 이상이다.”

박정환이 죽을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김재국은 홀가분하게 허리를 폈다.

빈 총을 등 뒤로 던져 버리고, 품에서 담배를 찾는다.

“김 차장님.”

태수가 돌아와 김재국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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