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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찍고 건설 재벌-174화 (174/230)

174화 배신의 끝(4)

박정환이 직접 작성한 면죄부였다.

태수는 테이블 위로 면죄부를 쭉 밀었다.

박정환이 차가운 눈으로 제가 했던 서명을 힐끔 보았다.

“면죄부를 청할 일이구나.”

면죄부를 청한다는 건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겠나.

갑과 을이 확실해졌다.

그제야 곤두섰던 신경이 느슨해진다.

박정환은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들어 볼까?”

태수도, 김광록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김광록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담배 케이스를 주워서 내밀었다.

박정환이 그 안에 들어있던 서약서를 구겨서 바닥에 던져 버린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박정환.

“각서? 의미 없어. 차라리 계약서를 쓰는 게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계약 위반을 이유로 불이익 조치와 소송이 가능해지지. 안 그런가?”

박정환의 눈이 노골적으로 휘어진다.

태수 역시 박정환에게 각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제가 각하께 계약서를 받아서 뭐합니까? 지속적으로 거래할 것도 아닌데.”

단발성 약속을 보증하기엔 각서면 족하다.

“세상은 계약서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쓸모가 없다면 진즉 없어졌겠죠.”

태수가 각서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다.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한 약속을 뒤돌아보라는 뜻에서 받는 겁니다.”

“내가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나? 앞만 보고 살기에도 바빠. 그건 퇴물이나 하는 짓이야.”

현재가 고단하고 앞날이 어둡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뒤를 돌아본다.

빛나던 전성기를 그리며 마음의 위안을 삼기 위해서.

하지만 박정환은 이 나라 최고 권력자다.

뒤를 돌아보며 과거를 회상하기엔 앞날이 너무 창창하지 않은가.

“불.”

그렇기에 박정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스스로 담뱃불을 붙여 본 적이 손에 꼽는다.

다들 담배만 찾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라이터를 갖다 대곤 하니까.

굳이 품에 라이터 따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받으쇼.”

김광록이 대충 차기범의 품을 뒤져 라이터를 찾아 던진다.

피범벅이 된 라이터를 받게 된 박정환이 눈을 부라렸다.

“강태수, 아랫사람 교육 똑바로 시켜야겠어.”

누구도 대통령에게 이리 오만불손하게 굴 수는 없다.

핏자국이 묻었으면 옷으로 그것을 닦아 내고 바쳐야지.

라이터를 던질 게 아니라 공손히 불을 붙여 주는 게 아랫사람의 도리다.

하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박정환의 담뱃불을 붙여 줄 생각을 않는다.

“아랫사람 교육이라. 차기범과 전두호처럼 말입니까?”

그놈들은 배신하다가 조금 전에 박정환 손에 죽었다.

“스스로 담뱃불조차 붙일 줄 모르는 흡연자라니. 차라리 이참에 담배를 끊는 건 어떠십니까?”

“담배와 권력은 한 번 맛 들이며 못 끊는다. 아, 너는 애초에 그 맛을 모르나?”

찰칵.

박정환이 스스로 담뱃불을 붙인다.

하지만 사나운 눈은 태수에게 고정한 채다.

“강태수, 너까지 내가 우습게 보이냐? 밑바닥을 봤다 이거야?”

“그 밑바닥, 제대로 확인해 보죠.”

“용기와 만용은 한끝 차이야. 강태수,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곤란해.”

“이거 잊으셨습니까?”

태수가 손끝으로 면죄부를 톡톡 친다.

오늘 자정이 되기 전까지 청일 호텔에서 태수가 하는 모든 일을 용서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영악한 놈. 좋다, 봐주지.”

박정환은 웃었다.

“일본 금고 턴 거, 어떻게 했어?”

박정환이 아내의 유품인 담배 케이스를 태수에게 던졌다.

태수 앞에서 김광록이 간단하게 담배 케이스를 낚아챘다.

“내 딸이 그걸 일본 금고에서 꺼내 와 자네에게 주었지. 그 뜻이 무엇이겠나.”

“영부인을 협박에서 구해 줬다는 뜻이죠.”

박정환에게는 그것보다 다른 게 더 중요했다.

“금고 안에 들었던 내 물건들은 어떻게 했어?”

금고 안에는 박정환이 빼돌린 막대한 재산과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가 들어 있었다.

“이거 말입니까?”

태수가 품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제7 광구에 관한 한일 양국 협정 계획서:1970>

제주 해분 일대에 설정된 자원 탐사 구역에 관한 양국 간 밀약이었다.

1974년 1월 30일, 대한민국과 일본은 이 지역을 공동 개발하기 위한 한일 대륙붕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1978년에 발효되고, 2028년까지 50년의 유효 기간을 설정했다.

‘이곳에 매장되었다고 추정되는 자원은 최소 약 600억 배럴, 최대 약 1,000억 배럴 규모.’

사우디의 석유 가채 매장량이 약 2,700억 배럴, 러시아가 800억 배럴, 미국이 300억 배럴임을 감안할 때 엄청난 규모였다.

‘전생에선 2020년까지도 제대로 개발되지 않았지. 일본 측의 일방적인 협력 거부로 인해 해당 수역은 방기되고, 양국의 공동 탐사가 중단된 탓이다.’

대신 중국이 근처에 유전을 설치해 빨대 효과로 이득을 누렸다.

정작 한일 양국은 협정에 묶여 손도 대지 못했는데 말이다.

‘전생에서는 몰랐다. 그 이유는 이 서류의 뒷면에 적힌 밀약 때문이었어.’

태수가 서류를 뒤집어 뒷면을 보인다.

제7 광구에 관한 박정환과 일본 수상의 밀약이 영어로 적혀 있다.

모든 글귀와 서명까지 전부 양국 수장의 자필로 쓰였다.

<1. 종전 배상금을 명목으로 일본은 박정환에게 50억 달러를 지급한다. 대신 박정환은 제7 광구에 대한 소유권을 일본에 넘긴다.>

<2. 1978년 영유권 문제를 잠정적으로 보류하고 한일 공동 개발 구역 설정을 발효한다.>

<3. 1980년까지 잔금 지급을 완료함과 동시에 일본은 완전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4. 협약이 완전히 이행하기 전까지 양국은 학술 조사 및 자원 탐사를 이유로 공동 의결권을 행사한다.>

<5. 위의 특약은 앞서 합의한 모든 조약보다 우선한다.>

“각하께선 1970년 해저 광물 자원 개발법을 공포하여 이 해역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습니다.”

일본보다 대한민국이 한발 빨랐다.

때문에 일본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부랴부랴 일본에서 한국 정부에게 협정을 제안해 온 것이다.

“기술 부족으로 석유 탐사에는 실패했지만 69년 북해대륙붕 소유권 판결에 따라 우리나라의 제7 광구 설정권이 인정받았죠. 한국에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전역이 떠들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석유가 나온다!

-우리도 산유국이 될 것이다!

국민들은 들떴고, 언론은 앞다투어 이에 대한 기사를 쏟아 냈다.

그렇게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이뤄진 한일 협정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고작 50억 달러에 이걸 팔아먹었습니다.”

전생에 제7 광구는 양국 간 의견 불일치 및 일본의 일방적인 거부권 행사로 개발되지 못했다.

더욱이 1983년 UN에서 해양법에 관한 국제 연합 협약이 발효됨에 따라 배타적 경제 수역 개념이 등장했기에 이후 점점 일본에 유리하게 변해 간다.

“못 들은 것으로 하지. 그 면죄부, 라이터와 바꾼 값어 치는 해야지.”

박정환이 면죄부를 손끝으로 툭툭 친다.

“서류를 내놓고 돌아가. 그렇게 한다면 내 이번 일은 눈감아 주지.”

“그러길 바랐다면 애초에 가져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작정했군.”

박정환이 담배를 힘껏 빨았다.

뱉어 내는 담배 연기에는 한숨이 묻어나왔다.

“이유가 뭡니까?”

“대답을 듣고 나면 넌 정말 죽는다. 그래도 물을 테냐?”

“전 대답을 들어야겠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불사하는 민주 투사라는 거냐?”

“그럴 리가요. 이익이 걸린 일이라서 말입니다.”

“이 문제에서 자네가 이익을 논할 부분이 있던가?”

“태양 그룹은 제7 광구를 개발해 석유를 캐낼 겁니다.”

대통령인 박정환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었다.

80년까지 잔금 지급이 끝나면 대륙붕의 소유권은 일본에 넘어가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무슨 수로?”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건 성사를 막아서.’

2020년까지 개발이 유야무야 되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나.

‘전생에서는 79년에 박정환이 죽었기 때문이지. 대한민국이 아니라 박정환에게 50억 달러 지급을 조건으로 했다.’

이번엔 아예 성명문이 발효되기도 전에 조건 성립을 막을 생각이다.

‘박정환, 오늘 죽어 줘야겠어.’

배신의 대가는 가혹한 법이 아닌가.

한청호, 차기범, 전두호, 오성회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다면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조국과 국민을 배신한 박정환은 어떤 대가를 치를까?

“조국과 국민을 위해서였어.”

“나라를 팔아먹는 게 조국과 국민을 위한 일입니까?”

태수는 한일협정 서류를 가리켰다.

“제7 광구, 8만 2천 제곱킬로. 대한민국 전체 면적의 약 80%에 해당하는 자원의 보고입니다. 그걸 헐값에 넘겨 놓고 조국과 국민을 들먹입니까?”

“석유 탐사를 해 봤지. 석유는 없었어. 석유가 없으니 50억 달라면 비싸게 받는 거 아닌가?”

박정환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피웠다.

“이 나라는 가난해. 전쟁으로 인해 도시와 시설은 전부 파괴됐고, 국민 소득은 쥐꼬리만 하지. 외국 차관도 얻어 낼 만큼 얻어 냈다. 나올 돈이 없어.”

박정환이 성토한다.

“갚지 못한 차관이 68억 달러나 돼. 하지만 1인당 GDP는 1,000달러조차 안 되지. 이 나라는 거지같이 가난해. 서둘러 중공업으로 갈아타지 않으면 조국에 미래는 없어.”

박정환은 중공업 육성 정책에 사활을 걸었다.

노동 임금을 쥐어짜고, 사채를 한순간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면서 재벌들을 밀어준 이유다.

“지금까지 얼마나 받았습니까?”

“매해 말 10억 달러씩 받기로 했다.”

“그럼 총 10억 달러를 받았다는 소리군요.”

“내 주머니만 채운 게 아니야. 그 돈으로 고속 도로를 깔고, 항만을 건설하고, 다리를 놓고, 공장을 지었어. 그 덕에 나라가 발전했어.”

태수는 코웃음 쳤다.

“금고에 든 돈이 아주 많으시던데. 10억 달러는 족히 나왔을 겁니다.”

금고를 털어 봐서 잘 안다.

친일파에게 뜯은 돈뿐만 아니라 뇌물로 받은 돈이 얼마나 많던가.

박정환에게 그런 금고가 모두 몇 개나 있을까.

“나라를 발전시킬 돈이 없다는 말로 비겁하게 변명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금고를 전부 털면 50억 달러가 나올까, 안 나올까?”

태수의 품에서 종이가 하나 더 나왔다.

송 비서가 적었던 치부책의 일부였다.

“한청호가 찾아낸 비밀 금고만 일곱 개야.”

박정환이 눈썹을 씰룩였다.

‘지금껏 한청호가 자청해서 더러운 뒤처리를 도맡아 한 이유가 이것이었나? 내 금고를 노려?’

박정환과 한청호가 끈끈한 관계를 이어 왔던 이유.

서로 필요한 일을 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청호는 박정환의 치부를 처리하고, 뇌물을 제공하고, 재벌들을 감시해 보고해 왔다.

박정환은 한청호에게 일거리를 던져 주고, 뒤를 봐주고, 편의를 제공했다.

‘한청호가 죽어야 할 이유가 늘었군.’

중앙 정보부에 끌려간 이상 곱게 놔줄 생각은 없다.

한청호는 거기서 죽어야 한다.

‘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박정환이 손목시계를 힐끔 본다.

-1975년 5월 19일. 오전 0시 1분.

“면죄부 시간이 지났군.”

박정환이 담배를 면죄부 위에 비벼 껐다.

‘강태수, 너 역시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 너도 오늘 죽어야겠다.’

박정환이 슬쩍 바닥을 보았다.

전두호와 차기범이 꺼냈던 권총 세 자루 중에서 나머지 한 자루가 보인다.

그런데 먼저 김광록이 그 권총을 주워 든다.

“또 총 쓰시게?”

김광록이 순식간에 탄창을 분리한다.

그러고는 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는다.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아? 난 대통령이라도 안 봐줘.”

이젠 태양 그룹 경호실장 김광록이다.

박정환이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마음에 드는 친구로군.”

“당신 마음에 들자고 하는 일 아니야.”

“어떤가? 마침 대통령 경호실장 자리가 비었는데.”

박정환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 밑에서 일해 보지 않겠나? 태양 그룹 이상의 돈과 권력을 보장하지.”

잇몸을 드러내며 웃던 김광록이 웃음을 뚝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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