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배신의 끝(2)
박정환은 참지 못하고 버럭 외쳤다.
“이 바보 같은 새끼가!”
차기범은 박정환을 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냥 손을 내렸으면 됐을 것을.
미련하게 끝까지 총 겨누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왜… 왜 그랬어, 왜!”
이해할 수 없다.
원망스럽다.
답답했다.
그제야 차기범이 했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15년이나 넌 늘 의심했지.
-일방적인 충성과 헌신에 지쳤다.
박정환이 차기범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이게 아니잖아! 넌 날 쏘려고 했어!”
죽어 버린 차기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날 배신하려고 경호실과 수도 경비 사령부에 숨어든 첩자와 오성회 회원들을 전부 색출했잖아!”
덜컥덜컥.
차기범을 아무리 흔들어 봤자 대답하지 않는다.
“내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막고, 충성을 가장해서 권력을 탐했잖아! 내 자리가 갖고 싶어서! 날 죽이려고!”
차기범이 첩자와 오성회 회원들을 청소한 건 사실이다.
접근을 막은 것도, 박정환에게 총을 겨눈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박정환은 선수 쳤다.
배신을 확신했기에.
그런데 빈총을 들고 있었을 줄이야.
“왜! 왜 그랬어! 왜! 대답해!”
박정환이 아무리 차기범을 쥐고 흔들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니 끝내 이유를 듣지 못할 것이다.
“이 멍청하고 모자란 놈…….”
허심탄회하게 물어볼 것을.
마지막까지 어찌 나오나 시험하지 않고, 한 번은 대놓고 물어볼 것을.
그랬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넌 죽는 그 순간까지 내 가슴에 못을 박을 작정이구나.”
박정환은 불현듯 마음이 허탈해졌다.
손아귀의 힘이 빠지자 차기범의 멱살을 놓쳤다.
털썩.
차기범은 그대로 무너져 바닥에 쓰러졌다.
박정환은 떨리는 눈동자로 차기범을 노려봤다.
목소리마저 잘게 떨렸다.
“그래, 기범아. 네 말이 맞다. 난 널 의심했다.”
배신했다고 확신했다.
권총을 들고 자신을 쏘기 전에 먼저 차기범을 쏘았다.
차기범이 자신을 쏘지 않을 것이란 생각 따윈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차기범 몰래 방탄조끼를 입고, 품에 권총을 숨기고, 수도 경비 사령부를 움직여 반란을 막으려고 했다.
“네 충성과 헌신은 일방적이라 했지? 그래서 지쳤더냐? 이렇게 변명 한마디 없이 죽을 자리를 찾아드는 게 네 결심이야?”
전두호의 외침도 생각났다.
-박정환이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으냐? 너 몰래 수경사를 불렀다잖아!
-너도 이미 찍힌 거야, 병신아!
-박정환이 배신을 알았다! 그것으로 끝이야! 끝!
차라리 전두호는 솔직했다.
“그래, 전두호가 제대로 봤다. 난 처음부터 널 용서할 생각 따윈 없었다. 끝까지 네 진심을 시험했을 뿐,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차기범의 진심을 확인하려 했던 일은 박정환의 속내만 확인시켜 주고 말았다.
오히려 차기범이 박정환을 시험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잘 가라. 그동안 수고했다.”
박정환은 차기범의 눈을 감겨 주었다.
소태를 씹은 것처럼 입맛이 쓰디썼다.
박정환은 뒤를 돌아봤다.
“전두호.”
아직 살아 있는 배신자가 한 명 더 있지 않은가.
“이제 너 하나 남았다.”
박정환이 핏발이 선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다 이곳에 전두호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신경이 차기범과 전두호, 두 배신자에게 쏠렸기 때문에 한 남자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강태수.”
다리를 꼬고 앉은 상태로 미동도 없다.
세 명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벌이던 개싸움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태수였다.
“당연히 혼란을 틈타 도망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한청호가 들여놓은 고가의 붉은색 화려한 의자가 왕좌라도 된 것 같다.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한 손은 팔걸이에 늘어뜨린 태수의 모습이 퍽 여유로웠다.
책의 표지에서 나 볼 법한 자세로, 태수 혼자 다른 세상 사람처럼 멀끔했다.
“여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가?”
“제가 왜 도망가야 합니까?”
“이 꼴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배짱은 인정해 주지. 저 덩치를 믿고 있나?”
박정환의 시선 끝에는 태수 곁을 지키고 있는 2미터짜리 거한이 있었다.
전두호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온 김광록이었다.
어느새 핏자국으로 길을 만들며 기어간 전두호.
전두호가 김광록의 다리를 붙들었다.
“기, 김 중령, 도와줘! 저 새끼만 잡자. 그러면 끝나!”
김광록은 군에서 알아주는 최고 실력자다.
일대일로 붙어서 여태 한 번 져 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그러니 북한 특수 요원들을 상대하도록 보내지지 않았던가.
“이거 안 놔?”
김광록은 눈을 아래로 깔아 봤다.
경멸 어린 시선이었다.
“김 중령, 너와 나는 전우다!”
“네놈이 내게 오성회 절대 복종 서약서를 들이밀 때 연 끊은 것으로 아는데.”
전두호 눈 밖에 난 김광록은 쫓겨나듯 외지로 전출됐다.
북한 간첩 때려잡는 전공만으로도 김광록을 따를 자가 없다.
하지만 김광록은 무수한 공을 세웠음에도 겨우 중령 자리 보전하기도 어려웠다.
전두호와 오성회는 별 같잖은 시비를 다 걸었다.
덕분에 김광록은 별 더럽고 치사한 꼴을 다 봤다.
“그럼 명령이다! 난 네 상관이야! 저 새끼 죽여!”
“군복 벗은 지가 언젠데. 네 눈깔은 폼으로 달렸냐? 내 상관은 지금 여기 계시잖아.”
김광록이 친히 태수를 소개해 준다.
태수는 물끄러미 전두호를 내려다봤다.
차가운 눈이었다.
전두호는 이를 악물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 해!’
오성회만 들이닥치면 모든 일은 끝난다.
무장한 70여 명의 오성회를 이길 수 있는 세력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 싸움이다. 불명예를 감수하여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전두호는 이번엔 태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강 회장, 김광록을 보내 줘. 그럼 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어!”
“저더러 반역에 가담하라는 뜻입니까?”
“박정환, 저 새끼만 죽이면 다 해결되는 일이야!”
박정환이 전두호를 보며 웃고 있다.
어디까지 어떻게 나오나, 태수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가늠하고 있는 눈이었다.
‘이 와중에도 날 시험하겠다는 소리군.’
저 정도면 의심도 병이지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수는 코웃음 쳤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무장한 오성회 회원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내 자네를 일등 공신으로 삼지. 나 전두호, 배포 크게 베푸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대신 시간 좀 벌어라, 이 소립니까? 오성회가 올 때까지?”
태수는 비웃었다.
“뻔뻔하군. 내게 대뜸 선전 포고를 날려 놓고 이제 와서 목숨 구걸이라니.”
가만히 있는 태수에게 시비를 건 전두호가 아닌가.
전두호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날 일은 내가 잘못했다. 그건 내가 말실수 한 거야. 생각해 봐. 나는 사돈 된 한청호에게 장단을 맞춰 준 것뿐이야. 자네와 대놓고 원한 가진 일은 없었어!”
태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두호를 처음 만나던 날, 그는 무슨 말을 했던가.
-내가 태양 그룹을 산산조각 낼 수 있을까, 없을까.
-내가 마음먹어서 안 되는 일은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어디 태양 그룹 잘 꾸려 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조만간일 거야.
초면에 만나자마자 시비를 건 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육군 보안 사령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말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다니.”
별을 달고 있는 이 나라 군대의 지휘권자인 장군이다.
실망스러운 대응이었다.
“태양 그룹의 뒤는 내가 책임지지. 약속하겠어!”
“난 말이 가벼운 사람과는 약속하지 않습니다.”
태수가 손목시계를 슬쩍 본다.
-1975년 5월 18일 오후 11시 21분.
전두호 처형식으로 정한 날짜다.
전생에 전두호 때문에 무수한 시민들이 피를 흘렸던 끔찍한 날이기도 하다.
2020년이 될 때까지 전두호는 그 일을 부인하고, 뻔뻔하게 모르쇠로 넘어갔다.
“난 당신의 선전 포고를 받아들였고, 대응을 결심했습니다.”
12시 종이 울리기 전에 놈의 목숨을 끝낼 것이다.
“난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두고 돌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치워 버리는 타입이지.”
태수는 씩 웃었다.
“게다가 난 적에게 자비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그래서 결론이다.
“지옥으로 꺼져.”
태수가 구둣발로 전두호를 뻥 찼다.
박정환이 태수를 보며 웃었다.
“이래야 강태수지.”
머리 좋고, 눈 좋고, 배짱 좋고, 판단력 좋고.
크게 될 놈이다.
박정환은 이번엔 전두호에게 눈을 돌리고선 혀를 찼다.
“구차하다. 체통을 지켜라, 전두호.”
대답은 태수가 대신했다.
“기르던 개는 주인이 책임지십시오.”
“그래야지.”
박정환이 권총 든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김광록이 전두호의 뒷덜미를 와락 잡고 질질 끌어가기 시작했다.
박정환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간다.
“김 중령, 이대로라면 반역으로 전부 죽는다. 네 전우였고, 동료였던 사람들이야. 그들을 생각한다면 딱 한 번만……!”
“좆 까.”
김광록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나 군복 벗었어. 몇 번을 말해?”
“한 번 전우는 영원한 전우다!”
“그런 개소리는 오성회 개들에게나 하시고. 난 개새끼 동료는 안 키우거든.”
내가 무슨 군견병도 아니고.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남에게 똥물 튀길 생각은 그만할 때도 됐잖아?”
전두호는 박정환에게 배달되었다.
전두호를 내려다본 김광록은 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별 달고 쪽팔리게.”
김광록은 등을 돌려 태수의 곁으로 돌아왔다.
박정환이 차가운 눈으로 전두호를 노려봤다.
“두호야, 네가 기범이 총에서 총알 뺐냐?”
“씨발, 그럴 정신이나 있었고? 그 병신이 총 들었으니까 쏘라고 했지. 총탄 없는 총으로 위협 조준하는 놈이 제정신이냐?”
억울한 건 이쪽이다.
열심히 박정환 뒤로 몸을 숨겼던 전두호가 아닌가.
“차기범이 빈 총을 든 줄 알았다면 눈치 보지 않고 그때 널 죽였어!”
천추의 한이다.
박정환만 죽일 생각이었으니 몸을 사렸다.
그게 이렇게 후환으로 돌아올 줄이야.
“집 지키던 충견을 제 손으로 죽인 기분은 어떤가? 응? 난 사냥개라서 삶으려나? 토사구팽?”
전두호가 비웃었다.
“엿이나 먹어. 퉤!”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면서.
탕-
박정환이 무심하게 말했다.
“사격 실력이 녹슬었나. 건방진 손가락만 날려 버리려고 했는데 말이야.”
전두호는 손목을 부여잡고 끅끅댔다.
이제 전두호에겐 악다구니밖에 남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박정환을 후벼 파길 바랐다.
“의심만 더럽게 많은 새끼. 넌 늘 그랬어. 언제 나를 제대로 믿어 주기나 했냐? 그래 놓고 충성을 바라? 그게 욕심이지.”
전두호 역시 죽은 차기범과 똑같은 소리를 지껄인다.
그런데 그 말은 박정환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배은망덕한 놈이 뚫린 게 입이라고.”
감히 차기범을 들먹이며 날 농락하려고 해?
박정환은 전두호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전두호는 멈추지 않았다.
“배은망덕? 충성을 바친 자의 말로가 어땠지? 저기 저 시체, 안 보이나? 네놈의 15년 수발을 든 결과다!”
전두호와 박정환은 서로를 노려봤다.
서로를 향한 적의와 살의가 들끓고 있는 눈이었다.
“차기범을 죽인 건 결국 너야. 배신자는 차기범이 아니라 박정환이라고. 나 역시 그런 꼴이 될 텐데 무슨 짓을 못해?”
전두호는 굴하지 않았다.
“오성회가 오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넌 죽어! 내가 죽어도 넌 죽는다! 어디 같이 죽어 보자, 이 시팔 새끼야!”
박정환이 피식 웃었다.
마지막 총알 한 발을 확인한다.
“총알이 한 발뿐이라서 유감이야. 건방진 주둥아리를 날려 줘야 하나, 아니면 똥으로 가득한 머리통을 날려 줘야 하나.”
어딜 날려도 죽는 건 마찬가지다.
“남자는 세 끝을 조심하라고 했다. 손끝, 혀끝, 좆끝. 그런 의미로 주둥이까지 마무리해 줘야겠군.”
결심은 끝났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야지. 너 역시 10년은 내 밑에서 굴렀으니까.”
그 모습을 태수는 의자에 앉아, 김광록은 태수의 곁에서 팔짱을 한 채 지켜보았다.
탕- 쿵쿵쿵.
정말 밖에서 총성과 함께 구둣발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보안 사령관님! 여기 계십니까?”
“여기야! 7층이다!”
전두호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성회가 가까이에 있다.
굴욕을 감내하며 어떻게든 시간을 벌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나.
전두호의 얼굴에서 기쁨이 번져 갔다.
그때 김광록이 팔짱을 풀고 손을 올렸다.
“전부 죽여. 한 놈도 이 안으로 들이지 마라.”
“예.”
전두호는 소름이 끼쳤다.
‘왜 대답이 들려?’
전두호는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7층 홀의 전경.
이미 태양 그룹 경호원들이 7층 홀을 점거하고 방어선을 구축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