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박정환과 세 가지 치부(3)
박정환이 한청호의 따귀를 내려쳤다.
“내 금고를 털어?”
짝.
“내 아내를 찍어?”
짝.
“감히 협박을 해?”
짝.
“내 뒤에서?”
짝.
“그걸로 청일을 키웠다 이거야?”
짝.
박정환이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푼다.
“담배!”
김재국이 재빨리 담배를 내밀었다.
라이터로 불을 대자 박정환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청와대 마크가 찍힌 라이터를 찾았다.
아까 테이블을 엎는 바람에 저것들까지 바닥에 굴러다니게 됐다.
장인어른이 남겨 주신 한 쌍의 담배 용품을 보자 울화가 치밀었다.
장인어른 앞에서 썼던 글을 오랜만에 확인한 이후라 더욱 격분했다.
“내 아내를 농락했다는 것은 나를 농락한 것과 같다는 것을 몰라?”
박정환이 구둣발로 한청호를 찍었다.
한청호는 이를 악물고 맞다가 박정환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각하,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누명입니다! 모함입니다!”
곧 죽어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
인정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제가 아닙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제가 아닙니다!”
한청호는 대신 태수를 노려봤다.
“저놈, 강태수가 각하의 비밀 금고를 털었습니다! 이제 생각났습니다! 제게는 증인이 있습니다!”
한청호의 말에 박정환이 태수를 돌아본다.
“사실이야?”
“전 모르는 일입니다.”
태수 역시 딱 잘라 부정했다.
이 일은 한청호가 독박을 써야지 논점을 흐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 한청호가 저리 물고 늘어지는 것이리라.
한청호가 재빨리 외쳤다.
“증인으로 차기범 경호실장을 불러 주십시오!”
“기범이, 들어와!”
어떻게 태수가 금고를 열었다는 증인으로 차기범을 꼽은 것일까.
차기범이 VIP룸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남자는 너구리굴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문을 닫았다.
차기범이 난장판이 된 안을 슥 본다.
“부르셨습니까?”
박정환 앞에 엎드려 있는 한청호.
평소와 달리 넥타이까지 풀어 흐트러진 차림의 박정환.
박정환 옆에 서서 한청호를 벌레 보듯 노려보고 있는 김재국.
그리고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태수까지.
“음?”
바닥에 굴러다니는 은색 라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청와대 마크가 크게 찍혀 있는 저 물건.
차기범이 몇 년이나 품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각하의 담뱃불을 붙여 주던 라이터가 아닌가.
그게 땅바닥을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차기범이 작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강태수, 라이터 간수가 형편없군.”
“아까 반납했습니다.”
“반납?”
차기범이 박정환을 본다.
박정환은 한청호가 달라붙어 있는 다리를 털고 있었다.
차기범은 테이블을 바로 하고, 바닥에 떨어진 라이터와 담배 케이스를 주워 올려놨다.
바닥에 흩날린 사진을 보아하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겠다.
‘영부인의 일이 걸렸나 보군.’
한청호가 재빨리 말했다.
“차 실장님, 대답해 주십시오. 강태수가 그날 차 실장님께 무엇을 건넸습니까? 각하를 만나고 싶다 청탁하며 무엇을 주었습니까?”
모두의 눈이 차기범에게 꽂혔다.
한청호가 믿을 건 차기범밖에 없었다.
“은행 대출이 전부 막힌 강태수가 각하를 만나 읍소하기 위해 차 실장님께 건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만 건네면 각하께서 자신을 만나 줄 것이라고!”
박정환이 담배를 뻑뻑 피우며 버럭 외쳤다.
“차기범, 똑바로 대답해! 거짓이 있을 땐 너 역시 용서치 않을 것이다!”
박정환이 화가 난 이유를 짐작한 차기범이 아닌가.
‘나야 상관없는 일이었지.’
그러니 두려울 것도 없다.
차기범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강태수는 그날 제7 광구에 관한 서류 한 장을 전했습니다.”
한청호는 희희낙락했다.
“그것 보십시오. 제 말이 맞지요. 각하의 비밀 금고에 들어 있던 서류가 아닙니까?”
확실히 일본 비밀 금고에 제7 광구에 관한 한일 협약서가 들어 있다.
박정환이 사우디 국방부 장관에게 그에 관한 서류 일부를 받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바가 있다.
국제 사회에 치부가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태수가 그 말을 끊었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에게 건넸던 서류의 일부입니다.”
“각하, 보셨습니까? 강태수가 시인한 겁니다. 금고를 털었다는 증거로 그보다 더 정확한 게 있겠습니까?”
“각하,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보냈던 서류를 기억하십니까? 각하께서는 그 서류를 보시고 한청호를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청호는 금고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전했죠.”
한청호는 영부인의 입을 틀어막고 그런 보고를 올렸다.
‘이제 보니 그것이 패착이었구나. 차라리 각하께 진실을 알리고 그 책임을…….’
한청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당시 내게 그 책임을 무겁게 물었겠지. 박정환의 성질에 청일은 박살 나고, 나 역시 감방에서 썩고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한청호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박정환의 치부를 너무 많이 알고 있고, 그 분노를 감당할 능력은 없으니까.’
이 모든 것이 강태수 때문이다.
“각하, 저는 그날 제7 광구에 관한 보고서의 일부를 베낀 사본을 차 실장님께 드렸습니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보냈던 문서의 다음 장이었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사본? 베껴?”
한청호는 그런 말을 처음 듣는다.
박정환도, 차기범도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청호는 넘겨짚는 것만으로도 모든 일을 해결해 왔다.
태수는 차기범에게 물었다.
“당연히 필적 조회를 해 보았겠죠?”
대답은 박정환이 했다.
“물론이다. 내가 지시했다.”
“그렇다면 말이 더 쉽겠군요. 당연히 제 필체가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래.”
차기범이 마저 대답했다.
“죽은 청일 그룹의 총괄 비서 송 씨의 필체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그런……!”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한테 그런 소리는 없었잖아! 분명 강태수가 제7 광구에 대한……!”
“내가 당신에게 그것까지 보고해야 하나?”
차기범이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박정환에게 마저 말했다.
“또한 강태수에게 일부가 훼손된 필름을 받았습니다.”
“필름? 저거 말입니까?”
김재국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사진과 필름 재를 가리켰다.
한청호가 금산 호텔에서 확실하게 태워 증거를 인멸한 찌꺼기였다.
차기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훼손됐긴 했지만 훨씬 상태가 멀끔했다.”
태수가 조용히 물었다.
“사진을 현상해 보셨습니까?”
“그래.”
차기범의 말에 한청호가 숨을 죽였다.
‘차기범이 받았다는 망가진 필름이 이게 아니라고?’
상황이 아주 미묘하게 다르다.
한청호가 직접 확인했더라면 바로 문제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시작됐다.
태수가 차기범을 통해 물건을 받았다면 박정환이 의문을 느꼈을 것이라 자신한 이유기도 하다.
태수는 계속했다.
“필름이 훼손되긴 했지만 사진을 현상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요.”
“그래.”
“어떻게든 현상하긴 했고, 사진을 보긴 했다는 뜻이군요.”
“그래.”
태수가 품에서 손을 넣어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이거 맞습니까?”
현상했던 사진과 동일하다.
차기범이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청호와 박정환이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한청호는 태수의 손에 들린 사진을 알아보자 비명을 질렀다.
“안 돼!”
태수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차기범이 한청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청호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박정환이 사진을 확인했다.
“이건?”
아내가 찍힌 사진이 아니다.
한청호와 웃으며 악수하고 있는 남자는 박정환도 아는 놈이다.
대통령 암살 미수범이자 영부인 저격 시해 사건의 범인인 문세기다.
크게 노한 박정환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한청호!”
표정이 무참하게 일그러진 한청호.
박정환은 한청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암살범과 네놈이 만날 일이 뭐가 있나!”
박정환과 관련된 세 번째 치부가 공개됐다.
태수가 박정환의 궁금증을 한마디로 풀어 줬다.
“한청호는 오래전부터 각하의 암살을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수가 가족들과 자신의 안전을 위해 내세웠던 세 번째 치부.
한청호가 무슨 일이 있어도 틀어막고 싶었던 가장 무서운 치부.
송 비서가 제대로 된 증거로 사진 단 한 장밖에 구하지 못했던 마지막 치부였다.
“헛소리! 내가 문세기와 만난 거? 우연이야! 그게 뭐가 그리 큰 죄인가? 심지어 그건 2년도 더 전의 일! 이건 누명이야!”
하지만 문세기와 한청호가 접촉한 사진 한 장만으로는 암살 도모를 증명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묻혔던 엉성한 증거였다.
태수가 당장 사용하지 못하고, 한청호가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던 치부였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 이후 문세기 뒤에 사람을 여럿 붙여 철저하게 증거를 모았지.’
한청호의 목표와 수단을 알았는데, 뒤를 캐지 못할 리가 있나.
그로 인해 태수는 반년이나 숨죽여 몸을 낮춰야만 했다.
태양 그룹의 출범 준비에만 전심전력을 쏟는 척, 태수는 한청호의 의심을 사지 않고 물밑에서 움직였다.
“청일 그룹은 문세기와 총 다섯 차례 접촉했습니다.”
태수의 손에서 나머지 사진이 차례로 나왔다.
박 비서가 문세기에게 신분증과 서류를 건네는 사진.
박 비서가 문세기에게 돈 가방을 건네는 사진.
박 비서가 문세기에게 무기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건네는 사진.
“이것만으로도 청일 그룹과 문세기의 관련성만큼은 충분히 입증했을 겁니다.”
“박 비서가 만났어! 난 모르는 일이야! 내가 그것까지 어찌 알았겠어? 그 간 큰 놈이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닌 거야!”
한청호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최후까지 버티고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다.
‘거사가 시작되고 있어.’
한청호는 악착같이 버텨야 했다.
박정환이 죽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발뺌한다.
박정환이 죽으면 다 해결될 일이다.
죽은 놈은 말조차 못하는 법이니까.
“중앙 정보부에서 문세기를 취조했고, 검찰과 경찰이 들이닥쳐 암살 사건을 전부 파헤쳤다! 문세기가 사형까지 당한 마당에 이제 와서 그 모든 것을 청일에 뒤집어씌우다니!”
“당신이 박 비서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는 거겠지.”
태수는 김재국에게 말했다.
“이에 대해 박 비서는 뭐라고 말하던가요?”
“한청호가 모든 일을 사주했다고 시인했다.”
“아니야! 난 아니야! 모든 건 박 비서가 했어! 내게 뒤집어씌우는 거야, 그 배은망덕한 놈이!”
한청호는 박정환의 다리에 다시 매달렸다.
“정말입니다! 각하, 믿어 주십시오!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사람을 몇 차례나 이리 몰아붙이는군요.”
“넌 이미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다.”
금고와 영부인.
“금고는 시인하겠습니다. 금고를 털었다는 게 아니라 금고의 책임자로서 후환이 두려워 영부인께 간청하여 사건을 덮으려 했습니다. 그것만이 제 잘못입니다!”
“도저히 못 봐주겠군.”
박정환이 김재국을 돌아봤다.
“이 새끼 끌어내.”
“예.”
“중앙 정보부 취조실로 끌고 가.”
“각하! 각하!”
한청호가 질질 끌려가며 울부짖었다.
이대로 내쳐지면 정말로 끝이다.
“각하, 억울합니다! 각하! 증거도 제대로 없이 절 이리 내치실 수는 없습니다! 그간 제가 각하께……!”
“그놈 입부터 틀어막고 끌고 가.”
박정환은 차기범에게 말했다.
“전두호 불러와!”
그때였다.
VIP룸이 활짝 열리면서 전두호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문밖에서 진즉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하, 부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