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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찍고 건설 재벌-169화 (169/230)

169화 박정환과 세 가지 치부(2)

비밀 금고란 소리에 박정환의 눈썹이 씰룩인다.

비밀 금고가 왜 비밀 금고인가.

박정환이 숨겨 두고 싶은 비밀스러운 것들을 숨겨 뒀기 때문이지 않나.

그것은 박정환의 치부와 빼돌린 재산을 모아 놓은 최후의 보루였다.

“감히 내 금고를…….”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들었다.

그때 태수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박정환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면죄부라며 미리 받아 놓은 각서였다.

“진정하십시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

‘라이터와 바꿔 목숨 걸고 말하는 거라더니, 영악한 놈.’

박정환은 홧김에 약속을 깜빡 잊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오늘 태수가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용서해 주기로 했다.

‘이제 보니 나 때문에 각서를 받았군.’

치밀한 놈, 아주 작정을 했구나.

박정환은 담배를 뻑뻑 피웠다.

“이게 그 증거입니다.”

김재국이 서류를 박정환에게 넘긴다.

재산 목록을 정리한 명단은 한청호가 작성했던 친일파들의 명단이다.

압수 재산 목록과 처분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적힌 서류였다.

“내 비밀 금고라기엔 재산 압수 자료가 조금 이상하군.”

“대부분 영부인이 건넨 오 씨 집안 부동산과 재산이라 그럴 겁니다.”

“이것들을 팔아 치웠다고?”

김재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팔아 치운 정황을 포착, 증거를 회수했습니다.”

오 씨 집안 은혜를 받았던 김재국이 아닌가.

영부인 오영순의 재산을 팔아 치우는 것을 보고 눈에 불을 켜고 뒤졌다.

중앙 정보부 요원들을 동원해 악착같이 찾아내어 전부 목록으로 작성했다.

‘한청호! 이 개새끼!’

한청호를 보는 김재국의 눈이 번들댔다.

한청호는 직감했다.

‘박 비서가 잡혀갔구나. 죄다 불었겠지.’

어쩐지 아침부터 안 보인다고 했다.

결혼식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손발이 되어야 할 그룹 총괄 비서가 잠적이라니.

짜증이 났던 한청호는 울분을 토해 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잡아간 것이었다.

“정보의 신뢰성은 확실합니다. 우리 중앙 정보부에서 직접 조사했고, 잡아 온 놈 역시 시인한 일입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신원이 아주 확실한 정보원의 정보가 아닌가.

박정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다는 뜻이다.

“장물을 처분한 자는 청일 그룹 총괄 비서실장입니다. 한청호 회장의 심복 중의 심복이죠.”

“그래?”

“각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놈을 이곳으로 불러오겠습니다.”

“됐어.”

박정환이 비뚜름하게 한청호를 본다.

“많이도 뜯어냈군.”

“가, 각하!”

박정환이 가지고 있는 금고는 총 일곱 개나 된다.

이건 박정환의 금고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재물이다.

그런데도 기분은 더럽게 나쁘다.

“간도 크게 내 아내의 재산을 뜯어냈을 뿐만 아니라 내 금고까지 털어서 팔아 치워? 뭐에 썼어?”

오성회 군자금으로 건네고, 일부는 청일 호텔 완공에 썼다.

하지만 한청호는 감히 사실대로 실토하지 못했다.

대신 오리발을 내밀었다.

연기에는 일가견이 있는 한청호가 아닌가.

“각하,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로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김재국의 비웃음이 뒤따랐다.

“증거가 이렇게 확실한데도 발뺌이신가?”

“제가 금고에 손을 댔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각하, 중앙 정보부에서 제대로 확인했습니다. 각하의 새로운 금고가 싹 털린 게 확실합니다. 그리고 금고의 암호는 한청호에게서 나왔다고 합니다.”

박 비서가 고문에 못 이겨 전부 불어 버린 모양이다.

“돈의 사용처도 확인했습니다. 결혼식을 위한 내부 인테리어, 그리고 오성회 군자금. 이상입니다.”

돈의 출처까지 드러난 상황이다.

한청호는 재빨리 말했다.

“제 수하가 간도 크게 그런 큰일을 저질렀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꼬리 자르기, 뒤집어씌우기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심정입니다. 여태 그런 놈을 믿고 맡겼다니. 어째 내 딸의 결혼식에도 보이질 않더라니.”

한청호는 딱 잘랐다.

박 비서, 그 쓸모없는 놈은 제 몫도 다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잡혔다.

그러니 이것으로 그 쓸모를 다해야 할 것이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놈이 횡령한 자금을 어떻게 썼는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박 비서에게 정확한 위치와 비밀 암호를 친절하게 가르쳐 준 사람은 한청호가 아니던가.

“각하의 비밀 금고를 털다니요! 제가 감히 무슨 깡으로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릅니까?”

한청호는 필생의 연기력으로 절절하게 하소연했다.

“전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어떻게 키운 청일인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믿어 주십시오! 너무 억울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깜빡 넘어갈 정도로 대단한 열연이었다.

태수는 태연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금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각하의 일본 금고는 왜 영부인의 재산으로 채워졌을까요?”

박정환과 관련된 두 번째 치부인 영부인까지 나왔다.

저 말을 시작하면 줄줄이 딸려 나오게 된다.

‘이판사판 개판이다! 혼자 죽을 수는 없지!’

한청호는 태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몰라서 묻나? 강태수, 네가 각하의 금고를 털었기 때문이잖아!”

너 죽고 나 죽자!

하지만 태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만.”

오리발은 한청호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이쪽은 면죄부가 있다.

한청호는 악을 썼다.

“한 발 먼저 금고를 털고 그 안에 종이를 집어넣었지!”

“제가요?”

“그래! 강태수, 너!”

“증거 있습니까?”

증거가 있을 리 있나.

그러나 태수도 알고 한청호도 아는데 박정환은 알지 못한다.

꼬투리를 잡기 위해 한청호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태수는 박정환을 돌아봤다.

“각하께서는 한청호에게 이에 관한 보고를 받으셨습니까?”

“못 받았지.”

박정환이 차갑게 웃었다.

“그럼 한청호는 왜 각하의 금고가 털렸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요?”

“그야 한청호가 그 일을 수습하기로 했으니까.”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는 내내 궁금하셨을 겁니다. 분명 청일 정유만 넘기기로 했었는데, 어째서 한청호는 청일 중장비까지 넘기는 계약서에 서명했을까.”

한청호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한청호는 그때 박정환에게 이렇게 변명했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제 비서에게서 얻은 그것을 들이미니 제가 얌전히 두 손 들고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내어놓을 수밖에 없잖습니까.

-증거는 그 자리에서 태워 버렸습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금산의 장준용을 불러 물어보십시오. 회의실에서 뭔가 태운 흔적이 있었는지 확인하시면 될 겁니다

“당시 청일 중장비는 제가 갖고 있던 원본 필름과 바꿨지요.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갖고 있던 서류가 아니라.”

사진은 한청호가 낚아채서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리고 필름 태울 때 같이 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한청호의 말과 다르죠?”

한청호는 그때 태수와 박정환을 이렇게 이간질했다.

-고속 도로 건설하러 간 놈이 공을 세울 일이 뭐가 있을까요? 강태수가 어찌 석유 공급 권리증을 얻었겠습니까?

-제 비서를 잡아다 각하의 약점을 사우디 국방부 장관에게 바쳤다. 이게 더 말이 되죠?

“그때 사우디 국방부 장관의 아들 라흐만이 직접 와서 각하의 오해를 풀어 주었습니다.”

라흐만은 대놓고 뻥을 쳤었다.

-강태수는 중동 전쟁을 조기 종결시킨 공으로 석유 공급 권리증을 얻었다.

더구나 사우디 국왕이 된 칼리드가 그 뻥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 공을 인정하여 사우디 명예 훈장을 수여한다.

신문과 방송에서 한동안 도배될 정도로 떠들썩했던 일이지 않은가.

그 정도가 되면 이미 뻥이 아니라 사실로 둔갑한 지 오래다.

“한청호가 영부인을 협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각하께서 아셨겠지! 난 영부인을 협박하지 않았어!”

한청호가 태수를 매섭게 노려봤다.

“모함하지 마라. 증거 있나? 너 역시 없지!”

다 태워 버렸으니까!

차기범이 그것마저도 빼돌렸으니까!

“강태수, 잘 생각해.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들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박정환이 제 마누라의 불륜을 알게 된 자를 가만히 둘 것 같아?

“제가 왜 죽습니까? 당사자도 아닌데.”

태수가 금고 털었다는 증거는 없다.

또한 태수는 영부인 협박의 당사자도 아니다.

게다가 면죄부까지 있지 않은가.

태수는 무서울 게 없었다.

“제가 그날 금산 호텔에서 청일 중장비를 인수할 때 들이민 물건은 바로 이겁니다. 한청호가 영부인을 협박하던 물건입니다.”

태수가 품에서 흰 종이에 싼 것을 꺼내 테이블 위에 풀었다.

다 타 버린 필름 찌꺼기와 사진 재였다.

“이게 무슨 증거야? 쓰레기지.”

한청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 타 버린 필름 찌꺼기와 사진 재가 증거가 되나?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는데.”

결정적인 증거는 이미 인멸했다.

한청호가 그날 직접 확실하게 확인한 후 처리하지 않았던가.

‘그날 태워 버린 건 원본 필름이 틀림없어!’

또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청일 중장비를 넘긴 이유였다.

“영부인은 가정을 지키고 싶어 했습니다.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한청호의 협박이 먹혔습니다.”

“각하, 믿지 마십시오! 제가 영부인을 왜 협박했겠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한청호가 태수를 무섭게 노려봤다.

“돌아가신 분을 모욕하지 마라!”

“여태 영부인을 욕되게 하기 싫어서 꺼내 놓지 않았습니다만, 각하께서 진실을 원하시니 내놓겠습니다.”

태수가 품에서 멀쩡한 사진 두어 장을 꺼낸다.

그것을 보고 한청호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한청호가 태수에게 달려들었다.

아차 할 새도 없이 사진을 빼앗아서 마구 구겼다.

그리고 입안에 욱여넣어 우적우적 씹어 대충 삼켰다.

박정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누명 쓰기 싫습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작태였지만 한청호는 끝까지 뻔뻔하게 우겼다.

‘박정환이 그 사진을 보면 눈이 뒤집힐 거야. 그것보다는 의심을 사는 게 낫지.’

목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따가워도 좋다.

쓰라린 입안에서 피 맛이 돌아도 상관없다.

박정환이 눈 돌아가면 모든 게 끝장이다.

“이제 보니 배가 많이 고프셨나 봅니다. 그게 맛있습니까?”

맛있겠냐!

한청호가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꿀꺽 삼켰다.

태수는 품에서 사진 한 무더기를 꺼내며 얄밉게 씩 웃었다.

“원하신다면 실컷 드셔도 좋습니다. 아직 많거든요.”

“강태수!”

태수가 허공에 사진 무더기를 힘껏 날렸다.

사방팔방 팔랑이며 아름답게 떨어지는 사진이 수백 장이다.

‘틀렸다!’

쿵.

한청호가 팔을 뻗어 사진을 줍는 대신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각하!”

박정환이 차가운 눈으로 한청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한청호를 노려보면서 박정환이 손을 뻗었다.

김재국이 사진을 주워 박정환의 손바닥 위에 공손히 올렸다.

“사진 잘 나왔군. 죽은 아내를 이렇게 다시 보니 참 반가워.”

박정환은 사진을 한 장씩 볼 때마다 그걸 와작 구겨 한청호의 얼굴에 던졌다.

지은 죄가 있기에 한청호는 인상조차 찡그리지 못하고 과녁 노릇을 해야 했다.

그저 눈만 질끈 감았을 뿐이었다.

탁. 탁.

한청호의 얼굴을 맞고 튕긴 사진 뭉치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가, 각하!”

“치사하게 남자 얼굴이 안 나왔어. 꼭 자네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뭐라 증명할 방법이 없네?”

탁. 탁. 탁. 촤라락.

한청호의 얼굴에 사진 무더기가 쏟아졌다.

과녁 노릇을 끝낸 한청호가 재빨리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오, 오해십니다! 제가 아닙니다!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이게 나오자마자 달려들어 목구멍에 쑤셔 넣고도 그런 말이 나와?”

우당탕탕.

박정환이 테이블을 밀어 넘어뜨렸다.

테이블 위에 올렸던 금고 처분 서류가 바닥에 우르르 쏟아졌다.

박정환은 내친김에 서류 뭉치를 집어 들어 한청호에게 냅다 집어 던졌다.

“얼굴 들어!”

한청호가 무릎을 꿇은 채 상체를 세웠다.

박정환의 눈이 불을 뿜을 것처럼 이글댔다.

박정환이 손을 높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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