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68화 (168/230)

168화 박정환과 세 가지 치부(1)

태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제가 오늘 하루 동안 이곳에서 벌이는 모든 일에 대한 면죄부를 청합니다.”

박정환의 눈썹이 꿈틀댄다.

“대체 무슨 사고를 치려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박정환이라고 그걸 모를까.

박정환이 담배 연기를 흠뻑 빨아 마셨다가 뱉었다.

눈에 보이는 한숨이었다.

“반역은 안 돼.”

“물론입니다.”

“그럼 됐어.”

“그럼 여기에…….”

허락을 받자마자 태수는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것을 박정환에게 들이밀자 황당해하는 박정환.

“이게 뭔가?”

“전 사람 말은 안 믿습니다.”

준비성이 철저하다.

종이 위에 제목은 물론이고 내용도 적혀 있다.

태수는 미리 서명까지 끝낸 뒤였다.

<각서>

“각서? 난 마누라한테도 이딴 건 한 번도 안 써 봤어.”

“영광입니다.”

“…….”

헛웃음이 절로 난다.

내용은 한 줄짜리다.

<나 박정환은 1975년 5월 18일 하루 동안 강태수가 청일 호텔에서 한 모든 일을 용서하겠다고 약속한다.>

박정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 박정환이야.”

“예, 거기에 그렇게 이름 쓰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

사채 업자에게 차용증을 받아 낸 태수가 아닌가.

대통령이 눈을 부라려도 꿈쩍도 않는다.

“건방진 짓도 적당히 해야 하는 거 모르나?”

“각하의 라이터와 바꾼 겁니다.”

라이터를 반납할 때 무슨 청이든 들어주겠노라고 했었다.

“유효 기간이 채 반나절도 안 남은 종이 쪼가리입니다. 청일 호텔에서 귀가할 때 각하께 직접 반납하겠습니다.”

“그 말은…….”

“각하께 목숨 걸고 드릴 말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태수의 표정이 비장하다.

박정환과 태수가 서로를 보았다.

누구도 먼저 눈을 돌리지 않는다.

박정환은 태수의 눈에서 각오를 읽었다.

스윽.

태수는 박정환 앞으로 종이와 펜을 한 번 더 깊숙하게 밀었다.

‘목숨 걸고 할 말이 있다더니, 물러서지 않을 셈이군. 정면 승부라……. 이래야 강태수지.’

마침내 박정환은 피식 웃었다.

“나한테 각서를 받겠다는 사람은 장인어른 이후 처음이야.”

박정환의 약속은 무겁다.

박정환은 일필휘지로 적어서 각서를 내민다.

맨 마지막에 특약 사항까지 추가해 적은 게 박정환답다.

<특약 사항: 반역은 해당 사항 없음.>

“철저하시군요.”

“자네야말로.”

각서의 양 끝을 잡고 두 남자는 동시에 씩 웃었다.

슬쩍 당기는 태수와 버티는 박정환.

종이가 허공에서 파르르 떨었다.

마침내 박정환이 손을 떼자 태수는 각서를 품에 넣었다.

“약속은 이것으로 지켰어.”

“감사합니다.”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면서 몰래 의자 밑에 도청기를 붙였다.

태양 전자에서 개발한 신형 도청기는 찰떡같이 착 달라붙었다.

박정환이 물었다.

“눈치가 좋은 건가, 정보가 좋은 건가? 아니면 배짱이 좋은 건가?”

“각하께서 아까 친히 경고하셨잖습니까?”

“이제 보니 머리가 좋은 거였군. 나쁘지 않아.”

박정환이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목숨 걸고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 전에 먼저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태수와 박정환이 마주했다.

“왜 그냥 두고 보십니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면서.

“그놈들은 아직 죄를 짓지 않았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죄는 죄가 아니야. 안 그런가?”

박정환이 경고만 하고 그들을 잡아 처넣지 않은 이유였다.

박정환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할 때까지.

처분은 그 이후에 결정하면 그만이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나?”

경호실장과 보안 사령관이 등을 돌린 참이다.

자신의 안전을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사람들이 배신했다.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박정환은 왜 이리 태연하게 구는 걸까.

“목숨은 하나뿐이니까요.”

“난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다.”

박정환이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겨 재를 떨어낸다.

단단히 뭉쳐서 벌겋게 타오르던 재는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날렸다.

이미 힘을 잃고 하얗게 타 버린 담뱃재가 사분오열되었다.

“경호실이고 군대고 깡패고 나발이고. 전부 내 앞에서 꿇어야지.”

탁탁.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담뱃불이 꺼졌다.

박정환은 이미 불 꺼진 담배를 재떨이에 우악스럽게 짓눌렀다.

“이 꼴이 되기 싫으면.”

* * *

오성회 회원들이 모인 청일 호텔 스위트룸.

70명의 인원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벽장 안에서, 장식장 뒤에서, 바닥 밑에서, 소파 등받이를 뜯어내고 무기 상자를 꺼낸다.

전두호가 말했다.

“챙겨.”

오성회 회원들이 무기를 꺼내 무장하기 시작한다.

전두호도 권총을 하나 챙겨 품에 넣었다.

“잘 들어. 육군 장성들은 한 명씩 따로 불러서 은밀히 뵙길 청한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으슥한 곳에서 수면제와 마취제로 입을 틀어막아. 기절한 놈들은 저쪽 방에 묶어 놔.”

“알겠습니다.”

“여의치 않으면 무기를 사용한다. 총소리가 들리면 전원 비상사태로 돌입한다.”

“알겠습니다.”

“전원 소음기를 장착하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쉽군.”

군용 무기이니 어쩔 수 없다.

그때였다.

똑똑똑.

오성회 회원들이 급히 무기를 숨겼다.

“누구십니까?”

“접니다.”

한청호였다.

전두호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한청호는 딴생각을 하고 있던데.

-한청호와 차기범이 은밀한 회동을 가졌습니다.

강태수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오성회 회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전두호는 문을 노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그게 고민이다.”

믿기로 했으니 정말 끝까지 믿어야 할까?

* * *

박정환은 웃었다.

“내 아내의 유품은 잘 받았나?”

“이거 말입니까?”

태수가 품에서 은색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커다랗게 청와대 마크가 찍힌, 라이터와 한 쌍의 담배 케이스였다.

“내 장인의 선물이었다네.”

“그럴 거라 짐작했습니다.”

“안에 들어 있는 거 봤지?”

“네.”

담배 케이스 안에는 누렇게 변색된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소감이 어떻던가?”

“영부인께서 애지중지 보물로 간직한 이유를 알겠더군요.”

“고작 담배 케이스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그러나.”

“사연이 있는 물건이니까요. 돈 주고는 못 구할 물건이잖습니까.”

“그래.”

원래 보물로 간직하는 물건엔 사연이 깃드는 법이다.

박정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신 장인께서 자네가 들고 있는 라이터와 한 쌍으로 만들어 하나씩 나눠 주셨지.”

담배 케이스는 딸에게.

라이터는 사위에게.

모두 품에 넣고 다니는 물건들로 준비했다.

“그 양반, 결혼 반대가 아주 심했었어.”

박정환이 오영순 영부인을 만날 땐 애 딸린 이혼남이었다.

그것도 8살이나 나이 많은 육군 소령.

전쟁 직후였기에 북한군 척살 1순위인 군인 장교이기까지 한 최악의 상대였다.

그런데 유서 깊은 부잣집 딸을 애지중지하여 공부시켜 놨더니 이상한 놈을 데려온 것이다.

좋은 가문과 혼담까지 오간 마당에 흠 많은 사위가 눈에 찰 리가 없다.

둘은 끝내 허락받지 못한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우리가 딸을 둘이나 얻었어도,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도, 죽기 직전에야 날 사위로 인정하던 고집불통 양반이었지.”

박정환이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이다. 그러면서 내게 당부하셨네.”

-애연가인 자네라면 언제나 이것을 가지고 다니겠지.

-담배를 피울 때마다, 이것을 볼 때마다, 한 번씩 이 말을 생각해다오.

“그 담배 케이스 안에 들어 있던 종이 말이야. 내가 직접 적은 서약서라네.”

아까 각서 쓸 때 언급했지 않나.

장인어른 이후로 태수가 처음이라고.

다른 말로는 장인어른에게 적어 준 적이 있다는 소리다.

박정환이 담배 케이스 안에 들어 있던 누런 종이를 눈으로 읽었다.

<오영순을 사랑합니다. 그녀와 일심동체로서 사랑과 믿음과 책임을 함께 짊어지겠습니다.>

“유치한 놀음이었지.”

그래도 그 양반은 그걸 보고 만족하며 죽었어.

오영순은 그걸 보물처럼 여겼다.

일본 금고에 따로 소중히 간직할 만큼 말이다.

“한청호가 그것을 노렸다지?”

“예.”

“이것이 내 약점이라 생각했겠군.”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이것을 보고 한청호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직도 이게 내 약점이라고 여길까?”

“잘못 짚었다고 땅을 쳤겠죠. 그건 각하의 약점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을 테니까요.”

박정환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눈에 보이는 한숨이었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태수는 라이터와 담배 케이스를 나란히 테이블 위에 올렸다.

“각하의 약점이 맞습니다.”

“하하하. 고작 이깟 물건이, 이깟 서약서가 날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네.”

“어디에도 내 자필 서명이 안 들어가 있지. 이건 그냥…….”

“영부인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

박정환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다 닳아 버린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새로운 담배를 하나 더 꺼냈다.

태수는 자연스럽게 담뱃불을 붙였다.

째깍, 째깍.

정적이 흘렀다.

담배를 몇 대나 태웠을까.

“지라시라고.”

박정환은 품에서 신문 한 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내가 요즘 아주 재밌게 읽고 있는 신문이 있어. 그중에서도 오늘이 마지막 화로 완결된 소설이 물건이야.”

익명으로 개재된 소설은 한청호와 영부인의 이야기를 주제로 썼다.

흥미진진한 음모론과 상상으로 가득한 막장 소설이었다.

하지만 박정환이 보기에는 있었던 일을 전하는 메시지에 불과했다.

“재밌게 읽고 있었는데, 작가가 이렇게 뒤통수를 치네? 이렇게 마무리가 엉성한 소설은 처음이야.”

박정환이 손끝으로 신문 한 구절을 쿡쿡 찌른다.

<영부인의 금고에서 꺼낸 물건을 가지고 있는 자를 찾았다. 나는 그가 품에서 꺼낸 증거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숨겨진 이야기는 또 있었다. -Fin->

손끝에 분노가 실렸다.

막장 이야기의 끝이 너무 허무하다.

그러니 애독자의 분노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의 끝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데 말이야. 실망이 아주 컸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니까요.”

“차라리 2부를 예고했으면 더 깔끔했을 텐데.”

신문을 노려보던 박정환이 시선을 돌려 태수를 본다.

“내게 그런 이야기를 전한 이유가 뭔가?”

박정환은 확신하고 있었다.

태수가 지라시를 통해 박정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고.

“알고 계셨습니까?”

“오늘 알았어. 내 딸이 일본까지 가서 그 물건을 찾아오기 전까진 몰랐지.”

죽은 아내의 이야기를 전하던 자가 꼬리를 자를까 봐 내버려 두었던 신문이다.

그렇기에 박정환은 웃었다.

“일본 금고에서 꺼낸 물건을 가진 자를 만났으니 나도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태수는 일부러 이야기의 끝을 그리 맺었다.

바로 지금 이런 상황을 노리고서.

“처음부터 자세히 이야기해 주게. 당연히 증거도 가지고 있겠지?”

“좋습니다.”

소설에서 나왔던 그대로, 태수는 품에서 증거를 꺼내기 시작했다.

“중앙 정보부 차장 김재국과 한청호를 불러 주십시오.”

“좋아.”

한청호와의 지긋지긋한 오랜 싸움.

이젠 끝낼 때가 되었다.

‘한청호, 내가 만든 외통수다. 어디 갈 데까지 가 보자.’

태수는 품 안에서 만져지는 면죄부를 믿었다.

박정환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오늘 한청호와 박정환이 얽힌 세 가지 치부가 전부 드러나게 생겼군.’

태수가 꺼낼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청일 호텔 7층 구석에 마련된 VIP룸 앞에서 한청호는 숨을 골랐다.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

하지만 도망갈 수는 없다.

한청호는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너구리굴이 따로 없다.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세 명이 보인다.

박정환, 강태수, 그리고 김재국.

‘김재국이 왜…….’

한청호가 의문을 품고 이상한 조합을 살폈다.

박정환이 담배 끝으로 가리켰다.

“앉아.”

한청호는 자리에 앉았다.

박정환이 손을 들었다.

“계속해.”

그러자 김재국이 서류를 꺼내어 박정환에게 건넸다.

“각하의 비밀 금고를 열어서 안에 든 재산을 팔아 치운 자가 있습니다.”

비밀 금고.

박정환과 관련된 첫 번째 치부다.

태수와 한청호는 서로를 보았다.

‘강태수!’

‘한청호.’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열었던 두 사람이 모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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