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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찍고 건설 재벌-167화 (167/230)

167화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결혼식(4)

전두호가 싸늘하게 태수를 보았다.

“농담이 지나쳐.”

태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라 인정하지도, 아니라고 부인하지도 않는다.

대신 태수는 다른 말을 한다.

“어느 쪽이 보험일까요?”

태수의 말은 전두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차기범이 여러모로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딱 하나 장점이 있지. 각하께 충성한다는 점. 그거 하나로 경호실장 자리를 꿰찬 놈이다.”

“충성, 아주 멋진 단어죠. 그건 당신이 각하께 바치던 단어가 아닙니까?”

전두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두호 역시 박정환의 충성을 담보로 지금 이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박정환이 가장 측근에서 안전을 믿고 맡기는 경호실장의 자리.

그리고 박정환이 가장 무서워하는 세력인 군의 감시를 믿고 맡기는 오성회 수장의 자리.

모두 박정환에 대한 뿌리 깊은 충성으로 얻어 낸 자리였다.

‘하지만 난 변심했다. 차기범 역시 변심하지 말란 법은 없지.’

처음으로 의심이 싹텄다.

차기범이 딴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의심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청호가 알고 부추겼다면…….

‘한청호 수완이라면 차기범이 넘어갔을 수도 있겠는데.’

전두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설마 박정환의 자리를 두고 나처럼 차기범 역시 큰 뜻을 품었단 말인가?’

이 나라 최고 통수권자의 자리는 하나뿐이다.

태양 그룹 총수가 아무리 애송이어도 함부로 언급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태수가 슬쩍 한마디를 보탰다.

“대통령 경호실에서, 차기범이 지휘할 수 있는 수도 경비 사령부에서. 어째서 이 두 곳에서 오성회 회원들이 색출됐을까요?”

아주 쏙쏙 골라 뽑았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차기범은 오성회 회원들만 골라 처리했을까?”

오성회 회원은 극비 중의 극비다.

군 내부에서도 누가 오성회 회원인지 확실히 파악할 수 없도록 관리하고 있다.

그들 내부에서 다져진 끈끈한 충성과 맹약이 버젓이 존재한다.

‘설마 한청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간단히 색출할 수 있겠나.

전두호의 마음속에 의심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렸다.

‘한청호, 설마 배신한 건 아니겠지?’

전두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한청호가 차기범과 거사를 논의했다면…….’

전두호는 이 거사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반역을 감수하고 군에서 무기를 빼돌려 잠입했다.

더구나 오성회 회원들과 뜻을 모았지 않나.

-목표는 박정환의 목과 국군 장성들의 신원 확보.

군 우두머리들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웠다.

다시없을 기회가 아닌가.

그 틈을 타서 군에 남은 다른 오성회 회원들이 순식간에 군 통치 체계를 장악하기로 했다.

그러면 차기 정권은 전두호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만일 한청호가 차기범과 손을 잡고 이 모든 계획을 박정환에게 알린다면…….’

전두호만 독박을 쓰고 죽는다.

반역죄란 최악의 죄명을 얻고서 손도 못 써 보고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청호와 차기범은 어찌 되겠나?

‘나를 팔아넘긴 대가로 둘은 공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겠지.’

이가 갈린다.

‘날 팔아넘기기 전에 거사를 성공하면 돼. 그때 가서 제깟 놈들이 뭘 어쩔 거야?’

마음이 급해진다.

하지만 전두호는 인내심을 쥐어짜서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내게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전부 알아들어 놓고서는.”

태수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을 뿐이다.

술이 아주 달디달았다.

“난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 배신하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자신을 총애하여 끌어 주던 박정환의 믿음을 저버린 자는 누구지?

아픈 곳을 찔렸다.

전두호는 절로 주먹을 꽉 쥐었다.

“태양 그룹 간판만으로 봐주려고 했더니 안 될 놈이로군.”

“나 역시 당신 군복 벗기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는 걸 어쩝니까.”

태수의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싸늘했다.

“가만히 있는 내게 먼저 선전 포고를 한 건 당신이야.”

“내게 이런 건방진 말을 하고서도 사지육신 멀쩡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나? 착각은 집어치워.”

“배신을 하고서도 용서받길 바라는 건 욕심 아닌가?”

태수는 전부 마셔 버린 샴페인 잔을 테라스 난간에 올려놓는다.

“그 욕심, 끝까지 가지고 가길 바라지.”

욕심 때문에 믿음을 저버렸다.

욕심 때문에 전쟁을 선포했다.

욕심 때문에 미래를 꿈꿨다.

‘한청호, 차기범, 전두호. 배신으로 얽힌 자들의 말로가 기대되는군.’

물론 그 끝은 좋지 않을 거야.

태수는 등을 돌렸다.

전두호는 태수의 등을 보며 말했다.

“이간질을 하는 이유란 뻔하지. 강태수, 내가 두려운가?”

“전혀.”

태수는 등을 보인 채 대답했다.

“두려운 건 당신이겠지. 아까부터 손이 떨리고 있던데.”

전두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를 악물었다.

‘강태수!’

태수는 떠났다.

하지만 전두호는 테라스를 떠날 수 없었다.

태수에겐 태연한 척 가장했지만 그 마음속은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청호, 감히 나를 두고 딴생각을 품었단 말이냐? 그것도 차기범과?’

술잔을 집어 던지자 그대로 박살 났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마침 전두호를 찾으러 나온 오성회 회원.

전두호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오성회 회원들, 전부 한 방으로 집합시켜.”

늦은 밤까지는 도저히 못 기다리겠다.

“서두른다.”

오성회 회원이 눈을 빛냈다.

* * *

청일 호텔 7층 홀.

정재계 고위급 인사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어른들의 홀이다.

홀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광록이 슬쩍 귀엣말을 전한다.

“준비는 끝났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차기범이 홀에 들어서는 태수를 발견했다.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들어가 봐라.”

“독대입니까?”

“그래.”

홀에 모여 있는 정재계 인사들이 태수에게 주목했다.

‘청일의 한 회장이 나가고 난 후 누구도 들이질 않으시더니.’

‘이제 보니 태양 그룹 총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군.’

‘삼청과 럭키 세븐, 금산 회장을 제치고 태양 그룹 강태수가 낙점됐어?’

‘각하께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란 말인가.’

박정환의 VIP룸 소환은 보통 중요도 순으로 이뤄진다.

청일의 한청호는 이 결혼의 혼주였으니 제일 먼저 부르는 게 당연하다.

청일 호텔이 완공하고 처음 찾아오는 자리였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태양 그룹의 강태수를 첫손에 꼽아 부르다니.’

이건 뜻밖이었다.

강태수의 재계 서열은 고작 200위권대.

비공식적으로는 그보다 윗줄에 쳐주지만 그래 봐야 첫손에 꼽히진 않는다.

그래서 자연히 다른 쪽으로 머리가 굴러간다.

‘아까 영애께서 강 회장에게 뭔가 선물을 내주는 것 같던데.’

‘영애께선 그것만 전해 주고는 바로 청와대로 돌아갔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그렇지 않고서야 각하께서 굳이 강 회장을 기다려 가면서까지 부를 이유가 없겠지.’

오늘은 청일 호텔에서 박정환의 두 측근 집안이 맺어지는 결혼식 날이 아닌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강태수의 뒤를 쫓았다.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헛꿈을 꿀 때 한쪽 구석에서 사색이 된 사람들이 있었다.

‘안 돼! 우리 서연이는 어쩌고!’

금산의 장준용 회장과,

‘이런 빌어먹을! 박정환이 강태수를 노리고 있었어?’

장수은행의 장말동 은행장이었다.

위기감이 엄습했다.

* * *

VIP룸은 쾌적했다.

오늘따라 담배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애연가인 박정환이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다.

태수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낯설었다.

‘금산 호텔 VIP룸에 들어올 때면 매캐한 담배 연기로 꼭 너구리굴 같았는데, 오늘은 웬일로?’

의문은 곧 풀렸다.

딱. 딱. 딱. 딱.

박정환은 담배 케이스 모서리로 테이블을 찍다가 태수를 힐끔 본다.

“늦었어.”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담뱃불을 맡아 놓은 자가 왜 이리 안 나타나나 했다. 담배 한 대 피우기 왜 이리 어렵나.”

박정환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웃었다.

“라이터가 없잖나.”

“…….”

담배 연기로 너구리굴이 되지 않은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황당하게도 라이터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늘 남이 붙여 주는 담뱃불이 익숙할 권력자이니 라이터를 안 가지고 다니는 것도 이해한다.

“차 실장님을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자네를 기다리는 이유를 짐작할 텐데.”

태수가 품에서 은색 라이터를 꺼내어 박정환의 담뱃불을 붙였다.

박정환이 태수에게 선물로 준 라이터였다.

태수가 라이터를 슬쩍 보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담배 한 개비를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라이터를 반납하겠습니다.”

대신 청을 하나 올릴 것이다.

“드디어 그걸 쓸 생각이 들었나?”

박정환은 웃었다.

“되돌려 받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저도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내놓고 싶지 않았다.

“각하께서 주신 보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박정환이 곁에 불러 종종 말을 나누는 자들은 이것을 알아보곤 했다.

그러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의미를 잘 알아들었다.

그래서 태수는 종종 요긴하게 써먹었다.

단지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쓰임을 다하는 물건들이 있는 법이니까.

“아주 마패처럼 들고 다녔다지?”

“알고 계셨습니까?”

“어떤가, 호가호위해 본 기분이.”

“편리하더군요.”

“하하하, 권력을 등에 업은 소감이 고작 그것뿐이란 말인가?”

“어차피 제 것이 아닌 권력이잖습니까. 저는 그런 욕심은 없어서 말입니다.”

“좋아.”

박정환이 턱을 쓸며 웃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시험에 통과했구나, 태수는 직감했다.

“자넨 가진 것들을 참 잘 써먹는단 말이야.”

“가진 게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권력도, 돈도, 사람도, 힘도.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그 라이터, 기범이가 탐내던 물건이란 것은 알고 있나?”

대운각에서 엿듣기 전까지는 몰랐다.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기계처럼 박정환의 곁을 지키는 차기범.

그가 마음속에 그리 강렬한 질투심과 탐욕이 있었다는 것을.

“일부러 제게 이걸 주셨단 것을 압니다.”

이 모든 것을 박정환이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이유가 뭡니까?”

이것 하나 때문에 엉뚱하게 꼬였다.

모두 박정환의 수작 때문이었다.

그래도 좋은 관계였던 차기범과 파탄 나게 된 결정적인 물건.

박정환은 처음부터 이리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자넨 처음부터 기범이를 믿지도 않았지. 그리 말하면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군 그래.”

박정환은 담배 연기를 뱉었다.

“그냥 믿지 그랬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제가 누구를 믿어야 했습니까? 차 실장님을? 아니면 각하를?”

박정환은 한청호와 함께 태수의 은행 대출을 막아 숨통을 조인 적이 있다.

태수를 길들여 굴복시키기 위해서였다.

차기범은 이번 거사를 끝내면 태수의 태양 은행에 보복하겠다고 다짐한 자다.

질투와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런 자들을 믿으라고?

“아니, 라이터를 믿었어야지.”

태수가 라이터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거와 담배 한 개비를 바꾸지.

-어떤 청이든 하나 들어주겠다.

그렇게 약속했던 일이다.

“나보다 내 말 한마디가 더 무겁다는 것을 알지 않나.”

이 나라 최고 통치자의 말은 무거워야 한다.

박정환이 지키려고 하는 체통이자 자존심이었다.

“어디 한번 무슨 청인지 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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