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결혼식(2)
태수가 말했다.
“화려한 결혼식을 준비하셨다던데.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왠지 뼈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결혼식을 빌미로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태양 그룹에 청첩장 보낸 기억은 없는데.”
대놓고 타박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뻔뻔하게 웃었다.
품에 손을 넣어 푸른색 카드를 꺼냈다.
“청첩장이라면 이렇게 받았습니다만.”
진짜 청첩장이었다.
한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태양 그룹에 청첩장 보내란 지시는 안 내렸다. 착오가 있던 모양이군.”
“그러게요. 저도 별로 자리를 빛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예의상 왔습니다.”
“자네랑 예의 차리고 싶은 생각 없다.”
“카메라 앞에서는 웃는 게 좋을 텐데요.”
촤촤촤촤촤촤.
연예인 찍듯 태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찍는 취재진이었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여자들도 모두 태수를 보고 있었다.
“청일의 이미지를 바꾼다고 취재진 모은 거 아니었습니까?”
어쩔 수 없이 한청호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촤촤촤촤촤촤.
태수와 한청호는 서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강태수, 오늘이다.’
‘한청호, 오늘이다.’
같은 생각, 다른 미래를 그리는 두 남자.
한청호가 억지웃음 속에 작은 소리로 실어 이죽거린다.
“어디 전두호도 박정환처럼 구워삶아 보지? 내가 보기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 그건 불가능하다 싶습니다.”
“주제를 아는구나.”
태수는 씩 웃었다.
“그럼요. 전두호에게 대통령이 가당키나 합니까?”
대통령도 아닌 전두호를 구워삶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당돌한 놈. 강태수, 넌 후회하게 될 거다.”
“그건 당신이나 하십시오.”
“우리 사돈이 기회를 줬었다지. 10억을 바치고 순순히 고개를 조아렸다면 태양 그룹 간판은 보전했을 거야.”
“태양 그룹 간판 걱정하기 전에 청일 그룹 재정부터 걱정해야 할 텐데.”
태수는 씩 웃었다.
“부도나기 직전이라지?”
한청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고 봐라. 청일이 부도가 나는지 안 나는지. 태양 그룹 간판이 내려지는지 안 내려지는지.”
“내기할까요?”
태수와 한청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강태수, 태양 그룹은 당장 내일을 두려워해야 할 거야.”
“청일 그룹은 당장 오늘이 두렵지 않습니까? 인생을 걸고 크게 베팅했으니 후회한다 해도 돌이키기 힘들겠군요.”
태수의 말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저 눈빛이 걸린다.
많이 당해 봐서 안다.
한청호는 불안해졌다.
‘거사에 대한 정보가 새었나?’
한청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강태수, 그게 무슨 뜻이냐?”
“결혼식.”
결혼 역시 인생을 걸고 크게 베팅했으니 후회한다 해도 돌이키기 힘든 게 맞다.
하지만 다르게 들리니 문제였다.
“순진한 척 헛소리하지 말고.”
“결혼 축하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태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한청호는 서늘하게 노려봤다.
“자네 선물은 사양하지.”
“아, 그럼 더 땡큐. 축의금이 굳었군요.”
약이 오른다.
한청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 딸의 결혼식은 아주 화려할 거야. 내 딸 이상으로 자네의 인생 역시 곧 뒤바뀌게 되겠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지.
네 인생을 시궁창으로 처박아 주겠다, 강태수!
“사양하죠. 전 당분간 결혼식 올릴 생각은 없어서.”
촤촤촤촤촤촤촤.
취재진의 플래시가 터지자 태수는 등을 돌렸다.
“딸의 결혼으로 인생 역전을 꿈꾸다니, 잔인한 아버지군요.”
“칭찬으로 듣지. 넌 뭐 다를 것 같나?”
“다를 겁니다.”
“글쎄, 내가 보기엔 너 역시 똑같아.”
한청호의 말이 우습게 들렸다.
“사람 보는 안목은 한청호가 최고라더니, 틀렸군요.”
“아니, 너도 나랑 똑같아.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하지 마라, 강태수. 너에게서 난 청일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
청일의 그림자?
태수의 발걸음이 멎었다.
한청호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네가 보기에 너는 선이고 나는 악인 것 같나? 왜? 수단 방법이 독하니까? 틀렸다. 너와 나는 근본적으로 똑같아.”
한청호의 혓바닥이 태수를 자극한다.
“내가 사업 대신 정치질로 이 자리에 올랐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건 강태수, 너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네 자신을 돌아봐.”
아니다.
나는 한청호와 다르다.
돈 냄새 맡는 능력이 있는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태양 그룹이 어떻게 컸나? 사우디 공사는 어떻게 따냈지? 청일 정유는 어떻게 얻었나? 청일 중장비는?”
솔직히 사업에 정치가 섞였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겠다.
“우리가 서로 같은 기회, 같은 목표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인가?”
결혼식을 디데이로 정했다.
그건 태수도, 한청호도 똑같다.
“사람을 이용하는 건 어떻지? 디테일만 다르지 우린 근본적으로 같은 족속이야. 권력에 빌붙어 영화를 꿈꾸는 기생충. 우리는 승리자를 원하지.”
“확실히.”
태수는 피식 웃었다.
“당신과 난 아주 다르군.”
흔들리지 않는다.
뿌리부터 부정하는 말에도 태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틀렸어. 당신은 권력을 좇지만 난 다른 것을 쫓아.”
복수.
그리고 행복.
지난 생에선 지키지 못했던 가족과 내 삶을 지켜 낼 생각이다.
“당신과 달리 권력에 빌붙지 않아도 난 내 능력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어. 그게 당신과 나의 근본적인 차이야.”
돈 냄새를 맡는다.
45년 청일을 끌어왔던 경험이 있다.
한청호조차 엄두도 내지 못한 세계적인 기업 청일을 만들었다.
능력은 충분하다.
“이런 생각은 못해 봤나? 지금껏 내 특기가 아니라 당신의 특기로 상대해 주고 있었다고.”
“뭐?”
“한청호, 당신의 특기 말이야. 사업보다 정치질을 잘하는 기업가.”
한청호가 눈을 부릅뜨고 태수를 노려봤다.
태수는 웃고 있었다.
아주 차가운 눈으로.
“기대하시죠. 이 분야 최고라고 자부하던 당신의 자부심을 내가 어떻게 박살 내는지.”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각자 자기가 잘하는, 유리한 방법으로 싸운다.
하지만 태수는 한청호와 싸우는 방법으로 특기 대신 다른 것을 택했다.
“열등감, 굴욕감, 패배감, 비참함. 한번 제대로 느껴 보라는 소립니다.”
태수의 특기가 아니라 한청호의 특기로 부딪치는 이유.
죽을 때까지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며 이 분야 최고라고 위안 삼았던 거물 한청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태수는 한청호에게 가장 아픈 방법으로 복수하길 원했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족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야. 당신이란 존재 자체, 그 자부심과 우월함, 스스로에 대한 믿음. 난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경쟁자는 어떻게든 짓밟아서 열등감을 해소해 왔던 한청호다.
그에게 커다란 벽을 보여 줄 것이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초라할 거야. 패배자로 남아서.”
그 말은 저주와도 같이 한청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비참하겠군. 청일이 무너지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할 테니까.”
태수는 씩 웃었다.
“당신과 나의 차이, 어디 한번 지켜보라고.”
태수는 그 말을 끝으로 식장 안으로 걸어갔다.
한청호에게 등을 보인 그대로.
“강태수!”
한청호는 태수를 불러 세우려고 했지만 밀려드는 하객들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태수의 뒤를 태양 그룹 사장단과 임원진, 그리고 경호원들이 따랐다.
곧 태수의 등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한청호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강태수, 난 죽을 때까지 승자가 되어 화려하게 살 거다. 절대로 초라하거나 비참할 일은 없을 것이다!’
태수를 뿌리부터 흔들어서 도발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뿌리부터 흔들리는 건 한청호였다.
한청호는 마른세수를 하면서 이를 갈았다.
‘승리자는 내가 될 것이다, 강태수!’
* * *
식장 안에 들어가 테이블을 차지했다.
한경련 회원들이 태수를 알아보고 인사한다.
저쪽 신랑 하객석에 앉아 있는 군 장성들도 몇 명 태수에게 인사를 보낸다.
육군 참모 총장 이하 장군들이었다.
태수는 그들과 눈인사를 나눴다.
“일찍 왔군.”
안정우와 장말동이었다.
송진구와 안소정도 보인다.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양 그룹 사장단과 임원진들을 남겨 두고, 안정우의 테이블에 앉은 태수.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생각보다 경계가 삼엄하다. 하지만 우리 쪽 사람들은 전부 제대로 들어왔다.”
다행이었다.
“준비물은 모두 챙겼습니까?”
“물론. 태양 전자에서 아주 좋은 것들을 개발해 준 덕분에.”
안정우는 작은 리모컨 스위치를 들고 웃고 있었다.
“신호가 잘 잡혀. 기술력 좋은데? 우리 무기 공장과 기술 제휴할 생각 없나?”
“차라리 저희 제품을 구매하시죠. 동맹인 점을 고려해 할인가로 넘기겠습니다.”
“좋아, 사업 얘기는 내일 마저 하지.”
안소정이 작게 말한다.
“퇴로 확보해 뒀어요.”
“잘했습니다.”
그때였다.
“강태수 씨.”
젊은 여자가 태수를 불렀다.
태수가 고개를 돌리자 박경혜가 웃고 있었다.
“영애께서도 오셨습니까?”
“물론이죠. 저쪽 테이블이 보이시나요?”
박경혜가 가리키는 곳에는 박정환이 착석해 있다.
그 곁에는 차기범도 있었다.
“당신에게 이것을 전해 주기 위해서 왔어요.”
박경혜가 품에서 은색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꺼냈다.
“이게 필요하다고 하셨다죠?”
“이건…….”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박경혜가 그걸 태수의 손에 쥐여준다.
“어머니를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 말을 끝으로 박경혜는 그대로 홀 입구를 나갔다.
태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박정환이 내게 이것을 보내는 것을 묵인했다는 뜻이군.’
태수는 조심스럽게 물건을 살폈다.
커다랗게 청와대 마크가 찍힌 은색 담배 케이스였다.
태수는 한눈에 알아봤다.
‘라이터와 한 쌍인 물건.’
라이터는 박정환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이다.
그런데 영 부인이 일본 금고에 숨겨 둔 보물은 담배 케이스라니.
달칵.
담배 케이스를 열자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태수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펴서 읽었다.
‘이, 이건……!’
어째서 영부인의 부친께서 딸에게 이것을 물려줬는지 알 것 같다.
‘한청호도 알고 있을까?’
아마도 영부인에게서 들었을 테지.
이것이 박정환을 흔들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이것 때문에……. 이것을 얻겠다고…….’
최태문을 시켜 사람을 기만했던 것인가.
고작 이것 때문에!
태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하객 여러분들은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가 크게 외치자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었다.
* * *
취재진은 정신없이 결혼식 광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방송용으로, 또는 신문 사진용으로.
“엄청나군.”
“보세요. 1층이 꽉 차서 2층까지 손님들로 가득해요.”
“대체 몇 명이나 온 거야?”
아주 바글바글하다.
그 모습은 카메라에 생생히 잡혔다.
고급 내장재로 장식한 최고급 청일 호텔 내부가 전국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정말 화려한 결혼식이로군.”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박정환은 눈을 감고 있었다.
차기범은 그런 박정환을 무심한 표정으로 보았다.
박정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은 때다.”
언제나처럼 차기범은 대답이 없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한 쌍의 젊은 남녀를 위해 이토록 많은 하객이 몰려와 축하해 주지 않나.”
차기범은 묵묵부답이다.
박정환은 아랑곳없이 말했다.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지. 짝을 잘 만난다는 게 그만큼 중요한 일이야.”
결혼식에서 있을 수 있는 소회였다.
“세상에서 가장 질긴 인연이 셋 있다. 부모와의 연, 부부와의 연, 그리고 자식과의 연. 이 중에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부의 연뿐인데.”
박정환이 혼인 서약을 하고 있는 부부를 보았다.
“오죽하면 결혼식을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겠나.”
박정환의 눈이 싸늘했다.
“이런 귀중한 자리를 기회랍시고 달려드는 꼴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