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61화 (161/230)

161화 결혼식 이틀 전(1)

태수는 이미 오래전부터 차기범의 수작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다.

‘당시 내가 건넸던 증거 자료를 박정환에게 제대로 건넸다면? 박정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호출했어야 했다.’

차기범은 몰라도 박정환은 동요할 수밖에 없는 자료였다.

태수는 확률이 낮은 일에 요행을 바라는 자가 아니다.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외통수를 때리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네 확실하게 휘어잡는 타입이지.

‘박정환이 그걸 받았다면 한청호가 무엇으로 협박받았는지 전후 사정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날 밤 결백을 주장하며 태수가 차기범에게 보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건 태우다 만 필름과 사진이었다.

금산 호텔에서 청일 중장비를 빼앗아 오던 때 한청호가 직접 태우던 것의 찌꺼기였다.

한청호가 영부인을 협박했던 결정적인 단서다.

‘박정환은 장준용에게 내가 보냈던 청일 정유 인수 계약서를 받으며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고 했다. 장준용은 태운 흔적에 대해서도 말했을 사람이다.’

한청호가 무슨 말을 했든 그 흔적을 확인했다면 박정환은 태수를 불렀어야 한다.

박정환의 성미라면 반드시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하지만 박정환은 그러지 않았다.

‘박정환이 끝내 모른 척했을 때 차기범이 한청호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짐작했다.’

이후 태수는 차기범을 신뢰하지 않았다.

차기범과 거래를 계속했을지언정, 속내를 밝히며 도움을 청한 적은 없다.

신뢰할 수 없는 자와는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차기범, 그런데 그거 아나? 내가 그날 당신에게 건넨 증거는 가짜였다. 박정환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가짜 증거 말이야.’

그건 박정환을 꾀어낼 미끼였다.

사정을 아는 자라면 누가 봐도 이상한 가짜 미끼 말이다.

그런데 그 미끼를 덥석 문 사람은 박정환이 아니라 차기범이었다.

태수는 겸사겸사 차기범을 시험했고, 차기범은 보기 좋게 걸렸다.

‘덕분에 오늘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차기범, 당신의 약점 말이야.’

이제껏 알아내지 못했던 충직한 경호실장의 약점을 벌써 두 개나 얻었다.

소득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태수는 웃고 있었다.

“그건 배신도 아닐뿐더러, 화가 나지도 않습니다.”

더러운 인간들에게 치여서 닳고 닳았던 태수가 아닌가.

가족들을 비명횡사로 차례로 떠나 보냈다.

그것이 사고가 아닌 살해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만큼 충격적이지 않았다.

한평생을 다 바쳐 믿고, 따랐고, 충성했던 한청호와 한일권 부자.

그들 손에 가족과 친구를 전부 잃고, 끝내 태수까지 죽었다.

배신은 그럴 때 쓰는 단어였다.

“복수할 생각인가요?”

복수(復讐).

원한을 갚다.

차기범에게는 아직 원한이 생길 만큼 당하지 않았다.

복수란 단어 역시 지금 태수가 청일에 하고 있는 일에나 사용될 단어였다.

“당한 만큼 갚아 주면 그만입니다. 호의는 호의로, 악의는 악의로, 배신은 배신으로.”

그거면 족하다.

“이해관계가 틀어졌으니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해관계가 그리 깊게 얽혔었나요?”

목숨보다 더 강한 이해관계가 또 어디 있을까.

상대가 태수를 짓밟겠다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이상, 태수 역시 그 이상으로 갚아 주는 게 당연하지 않나.

“많은 사람이 휘말릴 일이니까.”

“5월 18일, 결혼식 날을 생각하느라 고민이 길어졌군요.”

“대통령과 군 장성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내가 디데이를 잡은 것처럼 한청호도 같은 날을 노리고 있을 겁니다.”

천금 같은 기회가 아닌가.

“대통령의 안전을 확보해야 할 차기범까지 역모에 가담한다면 진짜 개판이 되겠군.”

“한청호가 차기범을 끌어들인 또 다른 이유겠죠.”

“경호실 인력들이 대통령 경호에 만전을 기하면 박정환이 멀쩡할 테니 그걸 두고 볼 순 없었을 겁니다.”

충직했던 차기범마저 돌아설 줄이야.

“한청호도 대단하군. 충성도 돌려놓는 혓바닥이라니.”

“뇌물과 이간질만으로 재벌이 되었다는 한청호예요.”

안소정은 말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던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태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환의 심복이던 박태종을 포항 철강으로 쫓아버린 것도 한청호였습니다.”

“비서실장 김정림의 옷을 벗긴 것도 한청호고요.”

“군에 심어 놨던 오성회의 수장 전두호를 끌어들여 쿠데타를 부추기고.”

“경호실장 차기범의 마음을 돌려 배신하게 만들었죠.”

이쯤 되자 태수 역시 조금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박정환은 스스로 적진에 걸어 들어가는 형국이 되겠습니다.”

이 상황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일단 박정환을 죽인 후에 차기범과 전두호가 승부를 가릴 작정일까? 아니면 각자 따로 기회를 노리게 될까?’

그에 따라 태수의 방법이 달라질 게 아닌가.

태수 역시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할 터다.

“차기범과 한청호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았으니, 이제 어쩌실 생각이에요?”

“우선 날 밝는 대로 태양 전자를 찾아갈 겁니다.”

“태양 전자를?”

“도청기와 중계 장치의 개발 상황을 확인해야겠습니다.”

청일 호텔 곳곳에 설치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일이다.

오버 테크놀로지는 지양해 왔지만 어쩔 수 있나.

현재 기술 수준에서 가능한 범위 내 개발 단계를 억지로 끌어올리고 있다.

지금 몇 달째 태양 전자 및 기술 개발 연구소 인력들이 내내 갈려지고 있었다.

5월 18일이라는 시간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중앙 정보부 차장 김재국을 만날 겁니다.”

전생에 차기범을 잡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김재국이다.

그는 최후까지 차기범과 대립각을 세운 남자다.

“지라시 내용도 보강해야겠습니다. 소설 속 전두호와 차기범의 이야기를 추가합시다.”

“알겠어요.”

박정환을 만날 수 없지만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흔들 수 있다.

바로 신문으로.

그 우회적인 방법을 손에 넣었다.

한청호와 달리 태수는 박정환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애달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전두호.’

그에 대한 고민이 아주 길었다.

‘선전 포고를 받은 이상 전두호와는 함께할 수 없지. 맞선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한청호가 저리 나오는 것을 알았다.

적진 한가운데에 터트릴 수 있는 모든 폭탄을 터뜨려야 하지 않겠나.

그 방법에 대해 고심했었다.

“한청호는 그동안 전두호와 차기범 사이를 오가며 박쥐 짓을 하고 있었군.”

“한청호의 특기죠.”

재벌 기업가보다 정치인 소리를 듣는 한청호가 아닌가.

박정환의 손을 놓고 갈아탈 배를 마련하는 것이다.

“전두호에게 모든 것을 걸기에는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보험 생각이 간절했겠죠.”

전두호의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 차기범이라는 소리다.

아니면 그 반대거나.

“하지만 박정환을 버렸다는 뜻만큼은 분명합니다.”

“한청호는 박정환과 끈끈한 사이였어요. 그런데 어째서 한청호는 박정환과 완전히 틀어질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잘 빨던 사탕을 뱉어버릴 때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고민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됐다.

한청호는 왜 박정환을 버리려고 하는가.

청일을 키워주고, 박정환의 치부를 치워주고.

그들이 등을 돌려야 할 이유는 딱히 없을 텐데.

‘그게 한청호의 결정적인 족쇄가 될 것이다.’

짐작 가는 게 있다.

* * *

1975년 5월 16일 금요일.

결혼식 이틀 전.

‘만반의 준비는 거의 다 끝났다. 마지막 카드만 얻으면 돼.’

태수가 아침 일찍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였다.

“바쁜 사람이 여기까진 어쩐 일인가?”

중앙 정보부 정원.

태수가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김재국은 정원 벤치에 앉아 있는 태수를 발견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셨습니까?”

“보다시피.”

태수가 김재국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둘은 나란히 앉아 잠시 커피를 마셨다.

김재국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국빈관 놈들을 풀어 줬다.”

그러리라 생각했다.

한청호가 차기범에게 오성회 회원 12명과 바꾼 청탁이 아니던가.

“한일권 대신 김재학이란 놈이 뒤집어썼다.”

“김재학?”

“청일 화학 김봉남 사장의 아들. 청일 건설의 부사장을 맡고 있다지?”

일이 그렇게 됐군.

“관련된 증거를 많이 구해 왔던데, 아쉽게 됐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였다.

또는 덮어씌우기.

“이 나라 정의가 왜 이 모양이 된 건지.”

김재국은 분개했다.

“각하께 한번 이 일을 직접 말씀드려야겠다.”

“차기범이 그 꼴을 두고 보겠습니까? 각하를 만나기 힘들죠?”

“무척. 차기범이 다른 건 몰라도 디펜스 하나는 기가 막히다.”

김재국조차 박정환을 만나기 어려울 정도였다.

누가 이 정도로 접근 차단하고 있는지는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차기범, 이 빌어먹을 개새끼!”

김재국은 주먹을 쥐었다.

그를 보며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도 김재국과 차기범은 앙숙이었지.’

그래서 찾아왔다.

‘박정환을 흔들 결정적인 카드가 필요해.’

김재국이 몰래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김재국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요즘 차기범이 하는 꼴이 가관이야.”

“이번 법 개정으로 경호실장의 권한이 아주 막강해졌습니다.”

“그래. 차관급인 경호실장의 지위를 장관급으로 격상시켜 버렸지.”

“현역 중장을 경호 차장으로 두고, 현역 육군 준장은 경호 장보에 두지요?”

“거기에 수도 경비 사령부도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차기범이 이번에 기를 쓰고 오성회를 색출한 두 곳은 바로 대통령 경호실과 수도 경비 사령부였다.

모두 차기범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곳이기에 더 그랬다.

“경호실장 전용 식당을 만들고, 따로 경호원가를 만들어 임무 교대 때 부른다더군.”

“충성심과 소속감을 높이기 위해서죠.”

“월요일 아침마다 경복군 연병장에서 국기 하강식과 함께 분열식을 한다.”

“대한공화당 중진들과 장관들을 모아 한 주를 활기차게 시작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죠.”

모두 차기범이 김정림을 몰아내고 모든 권력을 틀어쥐게 된 이후에 생긴 것들이었다.

차기범의 권력을 내보이기 위한 일련의 쇼였다.

“전차 행진이 제일 문제야.”

그 정점은 한밤의 전차 시위였다.

수도 경비 사령부 30경비단 전차 한 개 중대를 밤마다 출동시켜서 청와대 근처를 빙빙 돌게 한 것이다.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벌어진 전차 행진에 주민들은 전쟁이 난 줄 알고 불안해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이 차기범의 권력 과시 행사였다.

“누구든지 각하를 방해하는 자는 전차로 밀어 버리겠다는 뜻이라는데, 이것 참.”

“민원이 그렇게 빗발치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죠?”

“지금 그놈 눈에 뭐가 보이긴 하겠나? 아주 제 세상이 된 것처럼 미쳐 날뛰고 있는데.”

권력에 취한 차기범은 어느새 나라를 망치는 주적이 되었다.

후한 말 황제의 곁에서 날뛰었던 십상시(十常侍)가 이럴 것이다.

황제의 귀와 눈을 막고 전횡을 일삼던 환관 말이다.

“난 각하께서 차기범의 월권 행위를 가만히 지켜보는 이유가 궁금해. 정말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 겁니다.”

박정환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있나.

“자네는 짐작하는 게 있나? 난 도통 모르겠어.”

태수는 힌트를 주었다.

“대통령 각하께서 제일 염두에 두시는 일이 뭡니까?”

“어디 보자. 권력은 정점에 서 있고, 돈 역시 부족하지 않으시지. 여자 아니면 명예인데…….”

영부인이 죽었으니 후처를 들인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박인혜인가 하는 여 가수를 꽤 예뻐하신다지.”

“박인혜요?”

설마 전생의 그 여가수를 말하는 건가?

박정환과 죽는 당일까지 같이 술을 기울였다는 그 여자?

그 여자는 심수빈인가 하지 않았나?

“통기타를 치며 구슬픈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하는 가수라더군.”

통기타를 치는 여 가수?

심수빈과는 조금 다르다.

‘심수빈이 아닌 박인혜라고? 아, 데뷔 시기가 안 맞아서 그런가.’

태수가 기억하기로 심수빈은 78년 대학 가요제로 데뷔했다.

‘전생에서는 박정환이 심수빈의 데뷔곡을 좋아해서 종종 불러들여 노래를 감상했다고 들었는데.’

1975년 5월.

전생에서 태수는 지금쯤 빚쟁이에 쫓기다 한청호의 그늘 밑에 들어갔다.

“각하께서 영부인이 돌아가신 후 부쩍 울적해지신 모양이야. 노래를 들을 때마다 영부인 생각이 나신다며 종종 불러 직접 노래를 듣곤 하시지.”

김재국이 태수의 표정을 살피다가 웃었다.

“내가 잘못 짚었군. 이제 보니 여자가 아니라 명예였나?”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 각하께 부족한 건 역시 그것뿐이죠.”

명예.

국민들의 인정.

더럽혀진 과거의 이미지 쇄신.

“차기범이 각하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다. 그걸 가만히 두고 보는 이유가 명예 때문이라고?”

얼핏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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